은혜의 강단/2010년 말씀

시기와 질투는 죽음의 길입니다(창 04:01~15).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0. 1. 30.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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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미국 오하이오(Ohio)州에서 세계 골프 대회가 열렸었습니다. 여기에서 25세 청년 아놀드 파머(Palmer, Arnold Daniel, 1929.9.10.~)가 1등 하였습니다. 그가 두 손을 들어 기쁨을 표현할 때 모든 사람이 환호하였습니다.

그 곳에 14살 난 잭 니클라우스(Jack, Nicklaus William, 1940.1.21~)라는 소년이 구경을 하고 있었는데 역시 환호를 보내면서 마음에 이런 다짐을 하였습니다.
나도 빨리 커서 저렇게 골프 계의 왕자가 되리라. 이후 6년이 지난 1960년 전미(全美) 오픈 대회가 열렸을 때 아놀드 파머가 1등을 하고 잭 니클라우스가 2등을 했습니다.

그 후로 계속 둘이 경쟁을 하는 과정에서 니클라우스가 파머를 이긴 일도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또 파머가 이기고 어떤 때는 니클라우스가 이기고 이렇게 두 사람이 엎치락뒤치락 경쟁 관계를 약 10년이나 하다가 이제 한세월이 다 갔습니다.

 

1992년 63세의 파머와 52세 니클라우스가 대결하게 되었는데 많은 사람이 지켜보면서 걱정을 합니다. 저분들이 한평생 저렇게 경쟁하였으니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한 사람이 죽기를 바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여전히 사이가 좋습니다. 그리고 파머가 니클라우스에게 귓속말로 하는 말이 우리도 이제 나이를 많이 먹었지? 참으로 고마우이. 니클라우스 하였습니다.

그러자 곁에 있는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당신들은 이렇게 둘이 경쟁을 한 평생 하면서도 그렇게 사이가 좋으냐고? 이에 두 사람이 대답합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없어져야 할 적수라고 생각지 않고 오히려 조력자가 된다고 생각을 하오. 저가 있으므로 내가 열심히 하고, 내가 있으므로 저가 열심히 하고, 우리는 서로 도와주고 의지하면서 오늘에 이른 겁니다. 얼마나 좋은 품격입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들에서 돌로 쳐 죽였다고 나옵니다(08). 무서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람은 죽고 나면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요. 이왕이면 짧은 세상 사는데 명예로운 이름 하나 남기고 가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형이 아우를 돌로 쳐 죽였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정말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 통해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서 말씀 제목을 「시기와 질투는 죽음의 길입니다.」로 정했습니다. 자신을 점검하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1. 시기와 질투는 비극을 가져옵니다.

 

0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 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0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안색이 변했다는 의미는 극심한 불만이 안면 근육에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가인은 자기의 제사가 하나님께 합격하지 못하였으니 회개의 자리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막 불만을 토로합니다. 아마 동생 아벨의 제사도 자신의 제사처럼 불합격했다면 이런 모습이 안 나타났을 것입니다. 안면이 변한 것은 독한 시기와 질투가 아벨을 향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이럴 때 믿음 관리, 마음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그럴수록 조용히 동생 아벨을 만나서 이보게 아우, 하나님께서 내 제사는 안 받으시고 아우의 제사는 받으셨으니 어떤 비결 때문인가? 그 방법을 일러 주시게나.
이렇게 대화를 나누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아마 아벨도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면서 형님, 이렇게 해 보시지요. 하며 나름의 방법을 제시하였을 것입니다. 가인도 그 조언을 따라 이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 드렸을 것입니다. 두 사람 다 영원히 행복한 관계를 유지하는 가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자기 제사가 하나님께 합격하지 못한 일을 시기라는 악한 방향으로 끌고 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일을 자기의 제사와 연관하여 시기와 질투로 가지고 갔습니다.

불행의 출발점에 들어서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가인이 처음부터 이렇게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태어난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부모가 가인을 낳고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0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가인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낸 대단히 귀한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그 귀한 존재가 어느 날 질투에 사로잡혀 동생을 돌로 쳐 죽이는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땅을 치고 통곡할만한 일을 벌이고 말았습니다. 이 질투를 가인 콤플렉스라 합니다. 이 가인 콤플렉스 하나님 앞에서 뼈를 깎는 기도로 해결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너도 죽고, 나도 죽고, 공동체도 무너지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가인은 이 콤플렉스 때문에 아벨을 동생이 아니라 경쟁자, 대적자로 보면서 마지막엔 아벨이 죽어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죽어야 하고, 죽여 해결하겠다는 것보다 무서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가인은 앞으로도 계속 아벨이 존재하는 한 자신을 추월할는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히면서 결국은 그 시기심이 사망의 길로 치닫고 말았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남이 잘되는 것을 보아 넘기지 못할 때는 없습니까? 왜냐하면, 상대방이 자기만큼 자랄까 봐, 추월하여 앞설까 봐 염려 말입니다. 지금까지 고생하고 힘들게 살던 이웃이 모처럼 잘 되면 축하해 주십시오.

나보다 늦게 믿은 사람이 더 신임을 받는 자리에 등장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웃이, 형제가, 경쟁자가 자신보다 잘되도록 마음껏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앞선 사람이 뒤에 오는 사람을 끌어주고, 선배가 후배를 격려하면서 나보다는 더 잘할 줄 믿고 밀어주어야 합니다.

 

잠 14:30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

 

 

 2. 시기와 질투는 보호자의 사명을 이탈합니다.

 

0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인은 형입니다. 그러면 아벨은 아우 아닙니까? 인류가 번성하여야 할 당시의 세계에서 맏아들의 위치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장자인 만큼 그 위치로도 절대 강자입니다.

가인은 당연히 동생을 돌봐야 할 위치입니다. 그런데도 시기와 질투로 보호자의 위치를 이탈하고 말았습니다. 09절을 비금 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가인의 행적에 대해 몰라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까?

아니지요. 왜 형의 위치, 장자의 위치, 강자의 위치를 벗어난 행동을 하였느냐는 말입니다. 이에 대하여 가인이 뭐라고 대답을 하는지 보십시다.

 

09….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이제 가인은 심령이 거칠 대로 거칠어졌습니다. 고요함과 평정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지적에 뻔뻔스럽고 반항기 있는 대답을 합니다. 가인 스스로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하고 말합니다. 여기 지킨다는 말은 돌보는 자, 시중드는 자, 파수꾼 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가인은 당연히 형으로서 마땅히 동생인 아벨을 돌보며 지켜 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자입니다. 그런데도 책임을 자기하고는 상관없는 식으로 하나님께 대답합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우리 모두 형과 아우의 관계로 얽혀져 살아감을 아십니까? 이 관계성이야말로 그리스도인 됨을 확인하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언제나 강한 자입니까? 상대방이 언제나 약한 자입니까? 상황이 바뀌어 내가 약한 자가 되고 그가 강한 자가 될 때가 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자리에 계신 우리에게 네 아우 ○○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라는 사명 이탈자의 소리를 하겠습니까? 우리의 아우를, 우리의 약한 자를 잘 돌보고 지키는 삼일인 되기를 축원합니다.

 

살전 05:14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만약 가인이 아우 아벨을 잘 돌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랬다면 그의 존재는 동생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훌륭한 형으로 자리매김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합시다. 보호를 받는 사람보다 보호하는 사람이 복을 받고, 섬김을 받는 사람보다 섬겨주는 사람이 더 가치 있는 복임을 말입니다.

 

높아지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낮아져야 합니다. 명예를 얻기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남을 돌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런 섬김과 돌봄의 사람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현실에서 우리가 돌보고 지켜야 할 아우는 누구입니까? 우선 나보다 약하고, 좀 못한 사람이라 여겨지는 분 아닙니까? 이들이 내가 돌아봐야 할 아웃이며 형제입니다.세상은 오히려 강한 자가 약한 자의 것을 빼앗으며, 약한 자를 죽이며, 약한 자에게 형벌을 부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자리를 배척하여야 합니다.

 

 

3. 시기와 질투는 결국 자신도 파멸입니다.

 

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 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 먹은 죄를 범한 아담에게 찾아와서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네가 어디 있느냐(창 03:09)라는 말씀입니다. 그때 아담이 하나님, 제가 그만 죄를 지었나이다. 는 이 한 마디만 하였더라도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전혀 무책임한 변명을 합니다.

 

창 03: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내 믿음이 살려면 하나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순종의 자리로 가야 합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의 순간부터 복된 길이 열립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0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이때 가인이 이렇게 답을 하였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하나님, 실은 제게 동생 아벨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갈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벨을 죽이려는 무서운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 기회를 노리다가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자리에까지 나아갑니다. 이후 하나님께서 다시 물으십니다.

 

0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여기서 가인이 하나님! 제가 동생을 그만 죽였습니다. 라고 말했으면 살 길이 있을 터인데 오히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라고 못마땅한 반응을 보입니다.

이 일로 가인은 믿음의 공동체에서 쫓겨나고 맙니다(14).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는 것보다 더 무서운 형벌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잊어버리는 것은 파멸입니다. 육신의 죽음보다 더 무서운 고통입니다.

 

시 27:09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마침내 가인은 하나님의 얼굴을 잊어버리고 세상 욕망을 따라 파멸의 길로 떠났다가 그 후손 라멕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느 날 라멕이 사냥을 나갔다가 가인이 숲속에 숨어 있는 것을 짐승인 줄 오인하고 화살을 쏘아 죽였다는 말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고 물으실 때 아담이나 가인 둘 다 자기의 위치와 처지를 고했더라면 역사가 완전히 바뀌어졌을 것입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우리 인생살이 때로는 고달픈 환경에 직면할 때 있습니다. 인간관계의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때 사람은 두 가지 모습으로 나옵니다.

①먼저 불평과 원망을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상처와 고통을 주는 아주 부정 스타일이 있습니다. ②한편으로는 이 환경이 나에게 주는 의미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긍정도 스타일이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는 누에고치가 입에서 실을 내어 스스로 그 속에 갇히는 것 같습니다. 사명에서 이탈하여 파멸 속에 갇히고 맙니다. 이제 불평, 원망, 시기, 질투 버리고 살아가는 성도가 됩시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받고 가인 자기의 것을 안 받은 결과가 아우를 죽였습니다. 이런 것을 보고 시기와 질투라고 하지요. 우리는 이런 것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가볍게 넘길 때가 많습니다.

알고 보면 이게 가장 큰 죄입니다.  내가 못 살아서 스트레스 옵니까? 아니죠. 다른 사람 잘되는 것을 봄으로 배가 아프서 스트레스가 오는 겁니다. 모든 문제가 이 시기와 질투 때문에 생깁니다.

신앙까지 상실하는 비극을 초래합니다. 우리는 그 누구든지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자기도 분발하여야 합니다. 가인 콤플렉스는 분명 파멸의 길입니다. 이 길에 들어서지 않도록 지금붙터 믿음관리 인생관리 잘 하며 살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