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0년 말씀

우리 함께 짐을 져야 합니다.(갈 06:01~05)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0. 1. 9. 0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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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라과디아(La Guardia)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1933~1945년까지 12년 동안 뉴욕의 시장을 세 번씩이나 역임한 유명한 분인데 이 분의 이름으로 된 공항까지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이 라과디아가 뉴욕 시장으로 재직을 하기 전 그곳에서 즉결 판사로 일할 때 한 노인이 현행범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기 위해 법정에 왔습니다.
그 죄목은 상점에서 빵 한 덩어리를 훔친 일인데 라과디아 판사가 그 노인에게 묻기를, 전에도 훔친 적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처음 훔쳤습니다. 왜 훔쳤습니까? 예, 배는 고픈데
수중에 돈은 다 떨어지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빵 한 덩어리를 훔쳤습니다.
라과디아는 노인의 사정을 다 듣고 난 뒤에 이러한 판결을 내렸습니다. 노인께서 아무리 사정이 딱하다 할지라도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래서 저는 법대로 당신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그리고 난 뒤에 법정 안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노인이 빵 한 덩어리를 훔친 것은 비단 이 노인의 책임만이 아니라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에게도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하며 동시에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분에게도 각각 50센트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먼저 자기의 지갑에서 10달러짜리 지폐를 끄집어내어 모자 속에 넣고는 그 모자를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돌리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거두어진 돈이 모두 57달러 50센트였는데 라과디아 판사는 그 돈을 노인에게 주게 하였고 그 노인은 그 돈을 받아서 10달러를 벌금으로 내고는 법정을 나섰습니다.

 

김해삼일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주변에 있는 형제들 중 혹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가 그 짐을 함께 저 주어야 합니다. 금년에 우리교회 표어가 무엇입니까 바로 열린 교회 열린 성도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서 형제를 바로 세워 주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성취할 수 있음이 교회의 표어를 이루어 가는 일 아닐까요?



 1. 공동체의 가족은 이웃의 짐을 함께 집니다.


0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02절과 05절을 보면 짐이라는 말이 각각 나옵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다소 혼돈되는 의미로 보일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럴 때는 성경 해석의 원리를 따라 원문을 살펴보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02절에서의 짐이란 어떤 사람이 혼자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바로스)으로서 신약 성경 다른 곳에는 수고(마 20:12)라고, 또 다른 곳에는 중한 것(고후 04:17)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렇게 무거운 고통의 짐을 지고 힘들게 버티고 있다면 그 짐을 도와 함께 져주라는 말로 받아도 될 것입니다. 서로서로 무거운 짐을 함께 지라는 말씀입니다.

김해삼일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은 적어도 그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한 지체가 무거운 짐으로 시달리고 있을 때 곁에 있는 다른 지체들이 함께 그 고통을 나누어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할 일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서로의 짐을 지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요 04장의 예수님께서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는 사건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요 0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수가성의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여인을 만나는 순간 이 여인이 정말 무거운 짐을 지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아무도 물을 길러 나오지 않는 이 덥고 힘든 정오에 여인 혼자서 우물에 물 길러 나왔는지 또한 그 여인의 심령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무엇인지를 주님을 보시고 풀어주셨습니다.

 

롬 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우리에게도 이런 서로를 향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무엇인가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힘들다는 사인을 보냅니다. 자존심 때문에 드러내 놓고 말은 하지 않아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사인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돌아보면 그 무거운 짐을 거의 감지할 수 있는데 이럴 때는 모른 채 하고 지혜롭게 다가가서 마음의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알고 보면 우리 모두가 무거운 짐을 홀로 지고 고독하게 살아가지 않습니까? 더러는 혼자 잠자리에 누워 있으면 알 수 없는 눈물도 나지 않습니까? 외롭다는 말이며 다른 말로 힘에 겨운 짐을 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럴 때는요.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 알아도 큰 힘이 되거든요. 내 따뜻한 손을 내밀어 그 지친 손을 잡아 줘 보십시오. 따뜻한 온기로 전해지는 사랑은 큰 위로가 될 겁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어느 초등학교에 연극공연이 있었는데 한 아이가 주연으로 출연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이 엄마는 자기 아들이 나오는 연극이라 큰 기대를 가지고 관람을 갔는데 정작 자기 아들은 나무로 분장을 해서 팔을 벌리고는 끌날 때까지 대사 한 마디도 없이 서 있는 겁니다.
다른 아이들은 들락날락 하며 대사도 하건만 자기 아들은 끝날 때까지 서 있기만 하니 이 엄마가 속이 너무 상하고 분통이 터졌습니다. 그런데 무대 위의 그 아들은 엄마의 얼굴 표정과는 정반대로 그야말로 행복하고 즐거운 표정으로 그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 아이는 행복했습니까?
그 연극제목이 느티나무 아래서입니다. 이 아이는 자신의 느티나무역이 그 연극의 중심이기 때문에 내가 없으면 이 연극은 안 된다는 긍지로 그 역할을 감당한 겁니다.
또한 어떤 아이는 들락날락 하면서 단회 출연만 하는데 비해 이 아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오니까 너무 좋은 거예요. 그런 의미를 알지 못하였기에 어머니는 속상해 했지만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내가 하고 있는 행동 하나 하나가 다른 사람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나만의 역할이 아니라 그 역할이 다 엮어져서 하나의 드라마를 형성하듯 우리의 삶도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안에서 그렇게 엮어져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느티나무의 역할처럼 무게 있게 행복한 웃음을 띠면서 때로는 침묵으로 전체의 팀워크를 이끌어 갈 수 있다면 이 얼마나 귀한 일이며 축복이겠습니까?

 


 2. 공동체의 가족은 자기의 짐은 자기가 집니다.


0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φορτὶον)이란 02절에서의 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로스와 구별하고 있는데 이 짐은 하나님께서 각 성도에게 맡기신 직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고전 12:05).
질 것이라(βαστἁ σει). 미래 시제로서 신앙인이 감당해야 하는 정상 의무와 마땅히 해야 할 일들에 대한 책임성을 진행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 있는 성도는 각자가 감당해야 할 일이 있으며 그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회피하여서는 아니 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는데 있어서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안에 있는 소그룹들을 통해서 입니다. 찬양대, 주일학교, 학신회, 남녀 전도회, 목장 등 이런 모임은 자발적 모임이 아니라 교회가 특성을 따라 묶어준 모임 아닙니까?


이런 소그룹들이 교회에서
아주 유익한 기둥으로서의 역할도 할 수 있고, 아니면 자칫 마지못해 모이는 형식적 모임으로 전락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면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가장 원동력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바로 각자가 자기에게 주어진 짐을 자기가 지는데 있습니다.
각 위원회, 전도회, 교사회, 찬양대, 부속 교육기관 등 모임의 자세가 얼마나 소극적이냐? 긍정적이냐의 여부를 따라 교회의 분위기를 다운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상승시키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0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면서 05 각각 자기의 짐을 지는 자리에 굳게 서 있으십시오. 사람에게 인간적인 시선을 맞추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일에만 초점을 맞추어 나아가십시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주님 앞에서 베드로가 요한을 가리키며 무슨 말을 하였는지 아십니까?(요 21:21) 그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아주 중요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요 21: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나보다 일꾼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이 어떻게 생활하며 어떻게 맡은 일을 감당하던지 간에 그것은 내게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중요한 문제라면 다른 사람과 상관없이 내가 주님을 얼마나 잘 따르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 각자가 자기의 삶을 사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기에 기본적으로 내 믿음이 중요하고, 내 기도가 중요하고, 내 노력이 중요함을 아십시오. 왜냐하면 마지막 그 심판의 날에 각 사람의 모든 행위가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후 0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이 자리에 계신 좀 연로하신 분은 세월이 빠르다는 사실을 잘 아시죠? 나이가 들어보면 그 사실이 더욱 확연해 집니다. 이 시간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인생길은 일방통행이란 사실을,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왕복표를 발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 번 출발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언제라도 쉽게 돌아올 듯이 허송세월 하듯 가볍게 여기며 살고 있습니다.
이 길로 가는 것이 맞는지, 이 사람과 함께 가도 괜찮은지, 우리는 여러 가지 것을 생각해봐야 하는데도 기분에 따라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합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때 그 사람 얘기를 듣는 것이 아닌데 하며 후회를 하지만 그때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현실 앞에 큰 상실감과 견딜 수 없는 불행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3. 공동체의 가족은 자기 짐을 남에게 미루지 않습니다.


0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사역하던 시대에서는 널리 알려진 격언(格言)으로서 흔히들 요즈음 우리가 쓰는 고통분담(苦痛分擔)이란 말처럼 그 시대를 대변하는 문구이었습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는 이 말은 오늘 이 시대의 언어로 말하면 너희가 이웃의 고통을 분담하라는 말이 되겠지요? 그러나 좀 더 적극적 자세에서 보면 공동체의 짐을 남에게 전가시키지 말라는 의미가 됩니다.


롬 15:0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등의 짐(작자미상).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세상을 바로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 때문에 늘 조심하면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를 바르게 살도록 한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사랑을 몰랐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의 무게로 남의 고통을 느꼈고 이를 통해 사랑과 용서도 알았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에게 사랑을 가르쳐 준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미숙하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의 무게가 내 삶의 무게가 되어 그것을 감당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를 성숙시킨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겸손과 소박함의 기쁨을 몰랐을 것입니다. 내 등의 짐 때문에 나는 늘 나를 낮추고 소박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에게 기쁨을 전해준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남에게 짐을 지우거나 책임을 전가하지 마십시오. 여러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는 크고 작은 일거리가 있고 책임도 따라 다닙니다.그런데 일의 결과가 나빠지면 서로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발뺌하며 짐을 남에게 지우기를 좋아하는데 그러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갈등만 계속 됩니다.

움켜진 것보다 나누는 것이 좋고, 좁은 마음으로 살기보다 넉넉한 마음으로 사는 것이 좋고, 흩어짐 보다 하나 됨이 좋고, 변덕스런 마음보다 한결같은 마음이 더욱 좋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의존할 것이 아니라 나를 먼저 살피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미루지 말고 내가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사람들은 난처한 일을 당할 때 본능적으로 핑계와 변명과 책임 전가를 하지만 우리는 의식적으로 그런 비겁한 모습을 떨쳐버리고 자신의 짐을 남에게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눅 11:46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 도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삶의 양식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남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삶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산다는 것도 예수님의 삶의 양식을 그대로 닮는 것입니다. 짐을 서로 지는 참 된 사랑은 거창한 말이나 돈을 들여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이웃들에게, 특별히 낙심한 사람들에게, 주님과 멀어진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관심을 보여주면 그것으로 되는 겁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먼저 관심을 보이고 다가가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는 행동파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람이 보기에 훌륭하다 싶은 신앙 경력이나 성경 지식을 자랑치 마십시오.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일입니다. 우리의 신앙 성숙은 구체적으로 이웃을 향해서 나타나야 하며 이것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입니다. 모든 것에는 존재의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도 하나님이 오늘의 이 장소에 나를 있게 하신 이유는 나에게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 김해삼일교회 성도들에게 주신 귀한 사명들을 얼마나 열심히 감당했는지를 점검해 보십시오. 중직자부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