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24년 말씀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창 12:05~09).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4. 12. 21.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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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하고 말하면서도 교회에 안 나가는 소위 가나안 신자가 이제 200만 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밉상스럽게 나는 지금 방학 몇 년 차입니다. 하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자가 바로 가나안 신자입니다. 혹 가나안 신자에 대한 감이 안 잡히는 분이 있습니까? “안나가를 거꾸로 뒤집은 말로서 이를 사회 통념상 나이롱 신자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가나안 신자가 아닌 진짜 가나안 신자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나안 신자로 부르시는 특별 말씀입니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에 옮깁니다(11:31~12:05).

 

성경은 아브라함이 고향과 친척 집을 떠나는 과정을 생략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말씀을 따라서 옮기는 과정을 알 수 있으면 더욱 실감이 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일에 관한 행적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구속사 차원에서 볼 때 굳이 기록 안 해도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궁금증은 남습니다. 당시 상황을 다소 짐작하게 하는 작은 단서가 있습니다. 야살의 책입니다.

 

성경은 아니나 다소 귀한 자료들이 있어서 랍비들 연구 자료로 활용됩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전쟁 당시 아말렉과 전쟁에서(10:13) 승리한 기록과 사무엘이 사울 왕의 마지막 불행한 행적(삼하 01:18)을 남길 때 야살의 책에도 이런 내용이 있다고 책의 존재를 밝힙니다.

제가 야살의 책을 말하는 것은, 성경에 짧게 나오거나 기록이나 나오지 않는 사건들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창세기에 관한 내용은 성경보다 두 배 정도 많은 분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 밖의 이야기지만 참고할 만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생략된 행적을 성경 밖의 자료를 참고하면서 전하겠습니다. 그래서 말씀 제목을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로 정했습니다.

 

 

1. 아브라함은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왔습니다.

 

0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마침내 라는 단어 부사를 주목하십시오. 부사는 용언, 체언, 관형사 등의 앞에 놓여 그 뜻을 분명하게 하는 품사입니다.

구약성경에 마침내 라는 한글 단어가 32회 나옵니다. 그런데 창 12:05에서 사용된 마침내는 다른 곳에서 31회 사용된 마침내(עַד 아드) 와 다릅니다.

히브리어 성경 원문에 이 마침내 라는 말이 없습니다. 원문에 마침내 라는 단어가 없는데 왜 여기에 마침내 라는 단어를 넣었습니까?

 

우리 개역 성경은 원문이 아니라 번역본입니다. 성경은 대부분 직역(直譯)인데도 마침내 라는 단어를 넣어 의역(意譯)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우여곡절(迂餘曲折) 끝에 가나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가나안 일정이 그만큼 힘들었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오기까지의 과정을 돌아보겠습니다. 전에도 이 부분을 한번 다루었지만, 오늘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는 정처 없이 전하는 말씀을 봅시다(12:01).

당시 문화권의 중심지인 갈대아 우르에서 생활하는 아브라함에게 보여줄 땅은 미지(未知)의 세계입니다. 나라도 다르고, 거리도 멀고, 문화가 다른데 무슨 관심이 있겠습니까? 우르의 도시 생활에 익숙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들이는 게 과연 쉬운 일입니까?

현대는 문명 발달로 인해 교통수단인 비행기나 자동차나 선박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기껏해야 낙타 정도입니다. 사전답사 없이 가는 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아브라함에게는 아내와 조카 롯 부부와 두 딸과 가정 집사 엘리에셀과 가병(家兵) 318명과 그의 많은 가족이(14:14) 있습니다. 또 가축을 돌보기 위한 종들과 목축업으로 기르는 소와 양과 염소 등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들어오는 과정을 추적해 봅시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까지 약 960km입니다. 이곳에 도착하여 기약 없이 머물던 아브라함이 아버지 데라가 죽자, 다시 가나안을 향하여 나섰습니다. 지형으로 볼 때 유프라테스강 변을 따라 광야를 횡단하는 과정을 거쳤을 것 같습니다.

오늘날 시리아를 거쳐서 이스라엘의 헐몬산 남단으로 내려와 가나안에 들어왔을 것입니다. 하란에서 가나안까지 지름길로 오면 480km 정도쯤 됩니다.

가나안에서 다시 정착지를 찾아다니는 거리까지 합하면 약 600km 이상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이 그 먼 거리를 이동해 왔습니다. 믿음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는 말을 넣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길이 살길이요, 영생의 길인 줄 알았습니다.

오는 동안 띄엄띄엄 있는 산촌도 보았을 것이고 험난한 광야 여정을 통과하면서 별의별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워낙 불모지 땅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래도 가야 할 길인 줄 알아서 길 없는 사막에 길을 만들며 나아갔습니다.

낮의 무더운 더위와 밤의 추위를 견디고 강도떼와 맹수들의 위험을 극복하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마침내 들어왔습니다.

 

 

2. 아브라함은 마침내 약속의 땅을 확인하였습니다.

 

0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 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줄 거야, 라는 약속입니다. 여기서 나타나(רָאָה 라아) 라는 단어를 보십시오.

증명하다, 바라보다. 이런 뜻입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현현(顯顯)이 꿈이나 환상이 아닌 눈으로 볼 수 있게 임하셨다는 뜻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영이십니다(04:24). 따라서 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님 임재의 상징입니다(17:22; 03:02). 말씀을 받는 자만이 알 수 있는 형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여기야, 하고 말씀하신 곳이 어디입니까? 07절 만으로 보면 약속하신 땅이 어디인 줄 정확하게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렀다는 06절 말씀을 보면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으로 주신 곳이면 좋은 조건을 갖춘 터전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땅이 그렇지를 못합니다. 옥토는 고사하고 산악지대의 불모지입니다.

 

모레(מוֹרֶה) 상수리나무(אֵלוֹן 엘론). 모레는 본다(רָאָה 라아) 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종교의 측면에서 가르치는 자를 뜻하는 예언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모레 상수리나무는 이교도들이 신의 명령을 받고 전하기 위해 머물던 신탁(神託) 나무입니다. 예언자의 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탁 나무 아래서 예언은 좀 불명확하고 난해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런 예언이라도 붙들고 불행을 막아보려 하였습니다. 이것이 고대인의 심리 상태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세겜을 약속의 땅으로 확증하고 가나안 땅 입성의 모든 일정을 마무리했습니다.

 

그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는 말씀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세겜에 정착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결국 벧엘과 남방으로 옮겨 가게 된 이유가 나옵니다(08~09).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복음의 순례자로 이민을 왔습니다.

하나님 약속을 믿고 가본 적 없는 가나안 땅에 대가족을 이끌고 왔습니다. 들어와 보니 이 땅은 이미 가나안 원주민들이 자리를 잡고 텃세 부리는 땅입니다. 이 민족은 함의 후예(10:06)로 바알을 숭배하는 일을 삶의 목적으로 삼습니다.

세겜 땅 중심지에 바알을 섬기는 우상의 신전이 있습니다. 같이 지내기에는 좁은 땅입니다. 불편한 곳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곳에서 서로 경쟁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특별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오는 과정이 하란을 경유하는 일정입니다. 그런데 하란에서 그만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를 데려가셨습니다(07:04).

아브라함은 안정된 생활을 접고 다시 가나안으로 출발하여 들어왔습니다. 전보다 소유물은 더 넉넉합니다. 그러나 세겜 땅에서의 생활은 괄시받는 히브리인의 삶입니다(14:13).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아니면 감당하기 힘든 생활입니다.

사람이 함께 살면서 제일 힘든 일이 무엇입니까? 종교 간의 차이입니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 일어나는 전쟁 대부분이 종교 간의 갈등 때문입니다. 이런 갈등 전쟁이야말로 불행입니다.

 

 

3. 아브라함은 마침내 제단 쌓는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0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 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그곳에서 제단을 쌓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제단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 곧바로 제단을 쌓았습니다. 바로 제단을 쌓는 일이 귀하고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은 것은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현실로는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그대로 믿겠다는 뜻입니다. 현실이 어렵게 보여도 하나님은 이 모든 어려움을 얼마든지 해결해 주시는 분임을 믿겠다는 뜻입니다.

이때 제단을 쌓은 형태는 정결한 짐승을 잡아서 드린 기념 제단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믿음을 숨기지 않고 주위 사람이 보도록 공개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장차 자기의 후손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내다보고 감사하였습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신앙은 비록 현실에서 보지 못할지라도 장래에 이루어질 줄 믿고 감사합니다.

 

히 11:08 아브라함은….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장래 유업으로 받을 땅을(08 τόπος 토포스) 10절에서 성(πόλις 폴리스)으로 바꾸어 기록했습니다. 이 성은 요한계시록 21장에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되고 22장에 가면 하나님의 나라로 전환됩니다.

약속의 땅은 바로 하나님 나라요 천국입니다. 아브라함이 세겜에서 제단을 쌓고 자리를 잡은 후의 생활이 어떠합니까? 그곳 주민들과 사이에 신앙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0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09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08, 09절 뜻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은 계속 하나님과 신령한 관계를 맺고 믿음 생활을 건강하게 유지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신앙 갈등이 일어났을 것은 능히 짐작됩니다. 아브라함은 결국 그 충돌 현장을 피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때만 아닙니다. 조카 롯과 목초지 문제로 양쪽 목자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을 때도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일에 일절 양보합니다. 신앙의 덕을 세우는 일 때문입니다.

 

창 13:07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0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하나님께 단을 쌓는 일은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렸다는 뜻입니다.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기도와 찬송이 살아있는 공적 예배를 뜻합니다(04:26).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모든 식솔을 모아 하나님께 공적 예배를 드렸습니다.

자기의 가정 예배 규례를 확립하였습니다. 이처럼 아브람은 정처 없이 유리하는 중에도 하나님과의 교제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찬양, 이 영적 흐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으며 자기 믿음 공개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답게 신앙의 덕을 세우는 일을 우선으로 삼았습니다. 이 일은 물질의 손해를 보면서도 지켰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아브람은 아버지 데라가 하란에서 죽은 후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왔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지 않은 데라가 하란에서 발목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명자의 나아가는 길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블레셋 영역인 그랄 땅에서 농사하며 지낼 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므로 창대하였습니다. 마침내(עַד 아드) 거부가 되었습니다(26:12~13).

 

창 26:12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13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이삭은 유목민 아브라함과 달리 반()유목민입니다. 따라서 농사일에 심혈을 기울이고 땅을 개간하는 일은 무척 힘들고 고달픈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할 때 마침내 복을 받았습니다. 나님께 복을 받기 전에는 빈손이었으나 수십 년에 걸쳐 열심히 일하고, 기도하고, 인내하고, 절약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 현재도 그렇고 지금도 이 마침내는 적용됩니다.

한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번영의 길로 나가게 하시면 마침내 복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모두가 열심히 일을 하고, 인내하고, 절약하고, 기도하여 마침내 응답받읍시다. 마침내 번영을 이룹니다. 우리가 종종 오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면 당장에 그 복이 눈앞에 나타날 것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때가 되어야 마침내 복을 받는 일을 체험합니다.

 

믿음의 가족 여러분, 건강한 믿음의 삶은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다양하게 역사하십니다. 기도나, 권면, 신비한 현상 등도 있지만 중심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만으로 충분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갑시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비게이션으로 삼고 나아갑시다. 마침내 복된 삶을 만날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가족 여러분, 세상에서 관광객이 아니라 순례자로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과 더불어 신령한 창문을 열고 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