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가면서 외면하고 싶은 말, 하고 싶지 않은 말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도무지 적용하고 싶지 않은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실패한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실패는 원치 않고 성공하는 삶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지나온 삶의 흔적들을 돌아보면 성공보다는 실패한 흔적이 더 많음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왜 실패가 두렵습니까?
어떤 일들에 대해 실패할 때 그 일로 인해 잘못되면 실망에 도달하기 때문입니다. 실망(失望)이란 장래의 꿈(vision)을 잃어버린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꿈이 사라져 버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설사 실패를 계속했을지라도 희망이 남아 있으면 그 삶은 실패가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도 그렇습니다. 지난 일을 돌아볼 때 실패한 일이 많을지라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꿈이 있으면 그 인생은 실패의 인생이 아닙니다. 아직도 성공의 현장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살이에 몇 번 실패했다고 소망의 하나님까지 잃어버리면 이보다 더 불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은 꿈입니다.
믿음의 가족 여러분, 꿈이 지워지지 않았으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반면 사람이 장래의 꿈이 없다면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는 사람이 됩니다.
저는 오늘 믿음의 가족 여러분이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꿈을 가슴에 품기를 원합니다. 주어진 신령한 일을 믿음으로 감당하기를 원합니다.
건강한 정신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계속 꿈을 꾸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제목을 「믿음의 꿈을 품고 사십시오.」라고 정했습니다.
1. 믿음의 실상은 실패의 현장을 극복합니다. |
0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실상이요(實像 ὑπόστασις 휘포스타시스). 실체, 확증 등을 뜻하는 말입니다. 사람의 생각에 따라 좌우되는 주관적 실체가 아닌 객관적 실체를 의미합니다.
여기 실상은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관련되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내로라하는 믿음의 선진들 보십시오.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믿고 동행한 사람입니다. 이들의 믿음은 로봇 형태의 믿음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관계에서 나오는 인격의 믿음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아벨부터(04) 시작하여 돌로 침을 받아 죽임당한 예레미야(전승), 톱에 켬을 당한 이사야(전승),
칼에 죽임을 당한 예언자 우리야(렘 26:23), 궁핍과 환난과 학대받은 엘리야와 엘리사(왕상 17:02~16, 19:01~19) 그 외 무명의 인물로 마칩니다.
히 11: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우리의 삶은 생각 여하에 따라서 실패의 연속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부정의 생각으로 볼 때는 그 삶이 잠깐이지만 실패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은 실패처럼 보이는 삶을 실패로 받아들이므로 실패자가 됩니다. 믿음의 가족 여러분, 실패한 현장을 좋은 인생 공부했다는 깨달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오히려 성공으로 나아가는 길목이 될 수 있습니다. 유익한 일도 될 수 있습니다.
시 119: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혹 여러분,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곳에 서 있습니까? 미래를 바라보는 현장으로 돌아서십시오. 그 순간부터 성공의 길로 출발하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확신만 있으면 얼마든지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믿음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이루기 때문입니다(롬 05:04). 돌아보면 우리는 믿음의 실체를 보지 못하여 세상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았습니다. 죄의 길을 반복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어 오직 믿음으로만 사는 자리에 들어왔습니다. 하늘나라의 꿈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신령한 자리에 있습니다. 소망의 삶을 누리는 자리로 들어왔습니다.
롬 08:18 생각하건 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이런 믿음의 꿈을 가지고 산 초대교회 시절 성도들은 로마 학정 아래서 화형과 사자와 맹수의 밥이 되기 위해 끌려가면서도 찬송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어떤 환난과 고난 중에서도 믿음의 승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작은 경제 불황 앞에서도 믿음이 무너집니다. 낙심도 합니다.
성도 여러분, 아직 젊음이 있고 건강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십니다. 약해진 자리에서 일어납시다. 새 힘으로 일어납시다. 누구나 많은 실패의 자리에 머물 수 있습니다. 이 절망의 자리를 탈출합시다.
2. 믿음의 실상은 흔들리지 않는 삶으로 인도합니다. |
0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의 꿈을 품은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히 11장 01절 말씀이 우리에게 확신을 주기 때문입니다. 실상(實像)의 단어(ὑπόστασις)를 보십시오.
믿음을 실상으로 표현한 것은 생각에 따라 흔들리는 그런 주관적 믿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나아가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의 기초를 뜻합니다.
본 절에서 저자는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정의합니다. 동시에 믿음과 소망(hope)을 동일한 것으로 안내합니다. 믿음은 미래 지향의 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란 아직 보이지 않은 사건 미래에 일어날 일을 가리키는 미래 지향의 문구입니다. 여러분은 내가 가진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임을 믿습니까?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임을 믿습니까? 여기까지 이르러야 성숙해 가는 신앙인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소망의 믿음을 가진 신앙인은 어떤 상황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01절에서 강조하는 믿음은 희망에 대한 허상(虛像)이 아니라 실상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막연한 예측이 아니라 확실한 증거입니다.
믿음이란 막연하게 바라는 희망 사항이 아닙니다. 이미 확증된 미래를 현실의 나의 것으로 가져와서 확인하며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믿음의 꿈을 현실에 적용하여 전혀 흔들림 없는 소망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장차 될 일을 현실에서 맞이하여야 합니다. 오늘 말씀 07절은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을 노아는 믿음으로 내다보고 방주를 예비한 노아를 소개합니다.
0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무엇이 꿈이 있는 믿음입니까?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그대로 믿고 맞이할 준비의 과정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구원받을 자와 보호받을 동물을 위하여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노아는 그 심판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전혀 예측도 안 되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주신 설계도(창 06:14~16)를 따라 방주 짓는 일만 계속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준비하는 기간이 긴긴 세월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멈추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가족 여러분,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노아에게 현실에서 일어났을 법한 일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노아는 어떤 사람으로 취급받았겠습니까?
미친 사람, 돈 사람, 정신 나간 사람이라는 조롱 받았을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그 간접 증거를 성경으로 확인해 보겠습니다(창 05:28~30).
창 05:28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30 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여러분은 노아의 아버지 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라멕입니다. 이 라멕이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살면서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그 자녀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릅니다.
그들이 번성하여 나갔을 것이니 생육하고 번성하던 시절에 많은 인원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노아의 여덟 가족 외에는 방주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조롱했다는 뜻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에 인생을 투자합니다. |
0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오늘 본문은 말씀에 인생을 건 아브라함을 소개합니다. 그 아브라함을 우리는 믿음의 모델로 받아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라고 안내합니다(롬 04:11).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그 말씀에 인생을 걸고 나섰습니다. 앞날이 전혀 예측되지 않고 나아갈 길도 상상되지 않는데도 나섰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행한 일입니다.
창 12:0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믿음의 긍지를 품은 여러분,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다는 말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행동의 절대 기준으로 삼았다는 뜻임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존중하여 잘 준행하였다는 의미로 받아야 합니다(창 22:01~12).
기독교는 떠남과 분리를 원칙으로 합니다. 여러분도 말씀이 떠나라고 할 때는 떠나야 합니다. 분리하라고 할 때는 분리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의 인도를 따르는 순례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명령에 아브라함은 떠남의 길을 택했습니다. 분리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 땅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그저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만 하셨는데도 그 말씀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갈등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니 그 명령에 순종하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에 자기의 인생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섰습니다.
사실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사람의 관점에서는 무척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믿음의 꿈을 간직하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점검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인생을 투자하게 된 배경이 무엇에 근거하고 있느냐입니다. 창세기를 이렇게 밝혀줍니다.
창 12:0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아브라함은 자기를 통해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프로그램을 믿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자기로 인해 복을 받게 된다는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너는 복이 될지라는 말씀을 잘 이해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사람에게 복의 원조가 되게 하리라는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중요한 사실 하나입니다. 원조가 되는 일은 내 몫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꿈을 품었기에 본토, 일가, 친척, 아버지의 집을 과감하게 떠났습니다. 믿음의 꿈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에게 믿음의 꿈을 보여 주십니다. 믿음의 꿈을 품기를 원하십니다. 떠남과 분리의 길을 가기를 원하십니다.
불신앙의 자리에서, 습관화된 죄(罪)의 자리에서, 탐심(貪心)의 자리에서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현실의 미련들을 놓기 아쉬워 계속 망설이고만 있습니다. 믿음의 꿈을 가진 사람은 떠날 자리를 구분하는 지혜가 있습니다. 말씀에 인생을 건 신앙인은 떠나는 용기가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헬라어에서 사람을 안드로포스(ἄνθρωπος)라고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위를 바라보는 동물이라는 뜻입니다. 위를 바라본다는 말은 꿈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현실의 좌절할 만한 환경을 보지 않고 위에 계신 하나님을 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그분을 의지하고 행동하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이며 이것이 바로 꿈을 가진 사람의 믿음입니다.
카터 대통령(Jimmy Carter 1924.10.1.~)이 쓴 그의 자서전 Why Not The Best? (왜 최선을 다하지 않는가?)에서 그는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수십 년 전 출석하던 교회 전도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1년에 약 14가정씩을 방문해서 10년 동안 약 140가정을 전도하여 그 가운데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도 있었다.
나는 10년 동안 140가정을 만나 전도하였다. 그런데 내가 1966년에 주지사에 출마했을 때는 3개월 동안에 30만 명이 넘는 사람을 만나고 악수하였다.
그래서 주지사에 당선이 되었는데 사실 이것은 내게 큰 부끄러움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위해서는 10년 동안 140가정을 방문했지만 나를 위해서는 3개월 동안 30만 명을 만났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런 가책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세상 목표를 위해서는 많은 정성을 쏟아 시간도 내고 돈도 쓰고 관심도 기울입니다.
이제부터 믿음의 꿈 아래 복음의 꿈을 품고 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충성할 때임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모두 미래가 잘 열리고 교회에서는 잘 쓰임 받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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