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24년 말씀

시기와 질투는 죽음입니다(창 04:01~15).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4. 8. 24. 20:28
728x90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하루는 사탄의 졸개들이 리비아 사막에 사는 한 성직자를 유혹하여 무너뜨리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그 성직자의 육신 정욕을 건드려 보고 의심과 두려움의 화살로 맹공을 가해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죄를 범하지 않은 채 요지부동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졸개들의 완패에 화가 치밀어 오른 사탄이 직접 나서서 말합니다. 너희들 전략은 너무 시대에 뒤떨어졌어. 내가 하는 것을 잘 보라고 하면서 직접 시범을 보입니다.

 

사탄은 그 성직자를 찾아가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입니다. 이봐, 당신 동생은 벌써 알렉산드리아의 주교(主敎)가 되었다고 아시겠나? 이 말은 들은 성직자의 얼굴이 금세 험악해지면서 먹구름 같은 시기심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사탄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졸개들에게 말합니다. 시기 바로 이거야. 거룩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이게 최후의 무기지 하면서 성직자를 무너뜨린 후에 어깨에 힘을 주었습니다. 신앙인은 세상에 머무는 동안 특별히 인간관계를 잘 맺어야 합니다.

 

인간관계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관계 결과에 따라 잘될 수도 있고 못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인간관계를 잘 맺지 못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와 질투를 적절히 조정하지 못하면 마지막에는 파멸을 맞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아주 잘 아는 가인과 아벨 형제의 제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제사에서 가인이 드린 제사는 하나님께 불합격되었습니다.

반면 아벨이 드린 제사는 하나님께 합격이 되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아우 아벨의 제사가 받아들여진 일을 시기하여 돌로 쳐 죽여 버리는 일을 저지릅니다(08).

저는 이 사건을 우리의 일상생활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신앙인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지를 진단하기 위해 불합격 후에 왜 계속 실패합니까?라는 제목을 정했습니다.

 

 

1. 가안은 제사에서 실팼했습니다.

 

0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0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제사는 인간에게만 주신 하나님의 특별 은총이요 특권입니다. 아담은 이 제사 원리를 가정에서 가인과 아벨에게 정성스레 가르쳤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가르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증거입니다.

0304절 잘 보십시오. 가인과 아벨도 때가 되어 제각기 가정을 이루어 스스로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가인과 아벨 형제는 각자 직업을 따라 제물을 준비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올렸습니다. 가인은 곡식으로 제물을 삼고 아벨은 양으로 제물을 삼았습니다. 그런데 가인과 아벨 형제가 드리는 제사의 결과가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가인의 제사는 불합격이고 아벨의 제사는 합격입니다.

 

04….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0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형제인데 형은 불합격이고 동생의 제사는 합격입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습니까? 혹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차별하셔서 이렇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사 차이는 학자들에 따라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피의 제물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때는 율법 시대가 아닙니다. 따라서 어떤 해석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는 기본 원칙이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드린 처음 제사를 믿음으로 드렸느냐 형식으로 드렸느냐? 입니다.

제물의 차이가 아닙니다. 재물이 많으냐 적으냐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드렸느냐? 아니면 형식으로 드렸느냐 차이입니다. 이 사실을 뒷받침하는 단서를 히브리서가 제공합니다.

 

히 11:0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현재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에 대하여 혹 실패하는 일은 없습니까?

남들은 한창 은혜를 받고 기뻐하는데 나보다 늦게 교회에 들어왔고, 직분도 늦게 받은 사람 아니냐? 그런데도 성도들로부터 더 인정받으니 질투하는 일 말입니다.

시기와 질투가 앞장서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언제나 실패합니다. 이런 분은 신령한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신앙 리듬이 무너져 굴절된 삶에 갇히기 때문입니다.

 

 

2. 가인은 제사 후 시기심과 질투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0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사람은 인간관계에서 자기 마음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먼저 얼굴빛부터 변합니다. 다음에는 분노가 따라옵니다. 그다음에는 시기와 질투로 넘어갑니다. 마지막에는 죽이고자 하는 무서운 마음까지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감정을 다시 잘 추스르면 큰 문제로 발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자기가 드린 제사와 예물이 하나님 앞에 불합격되자 그만 분노를 내뿜었습니다.

성경은 분노의 감정 그 자체를 꼭 죄라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화를 내는 것은 불완전한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04:26)고 하였습니다. 분 냄과 죄가 구별된다는 말씀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성격이 급한 사람이나 화를 잘 내는 사람도 함께 지내 않습니까? 그런데 일시로 윽박지르듯 화를 내는 사람은 그래도 괜찮은 경우입니다.

그러나 화를 내는 일이 오래 가서 그것이 마음에 분노로 자리 잡으면 곤란합니다. 분노의 감정을 해결하지 못하면 그 분노가 죄의 자리로 들어갑니다.

 

이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을 우리는 흔히 한() 맺힌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한 맺힌 사람에게는 자칫하면 악신(惡神)이 임하여서 죄의 자리에 들어가기 쉽습니다.

바로 이런 자리에 이르지 않도록 각자 마음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믿음의 가족 여러분 08절 말씀을 우리 함께 큰 소리로 읽어봅시다.

 

0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가인이 분노한 다음에 즉 심히 화가 난 다음에 어떻게 처신하였는지를 잘 나타내 주는 말씀입니다. 그는 분풀이를 아우에게 하였습니다.

흔히 말하는 분풀이입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이 분노(憤怒)가 심령으로 들어가서 소화가 안 되니 가인의 마음이 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결과는 살인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가 자기에게 있습니다. 그런데도 가인은 책임을 아우에게 돌렸습니다. 자기도 죽고 남도 죽이는 일을 벌였습니다.

가인은 믿음으로 제사를 올리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되었습니다(11:04). 실패했으면 제사를 재정비하고 믿음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그런데 감히 어디다 대고 막 분풀이합니까?

 

성도 여러분, 내가 화가 난다면 그것은 내 인격의 부족함 때문이지 다른 누구 때문도 아닙니다내 마음이 계속 불안한 것은 세상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블레셋의 골리앗 장군을 무너뜨리고 개선할 때 여자들이 부른 노래 가사를 보십시오.

 

삼상 180:07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08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다윗을 향한 사울 왕의 질투와 시기심은 결국 악신이 임하였습니다. 왕으로서의 체통과 상관없이 오직 다윗을 제거하겠다는 일념으로 삼천 명 특공대까지 조직하였습니다(삼상 24:02).

 

 

3. 가인은 하나님께로 돌아설 마지막 기회를 놓쳤습니다.

 

0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하나님의 물음에 가인이 어떻게 답을 합니까?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이는 분명히 하나님께 대한 불평과 항의와 원망의 소리입니다. 이 질투, 이 불평, 이 원망이 가인의 길을 더욱 불행으로 재촉하고 있습니다.

지키는 자니이까? 돌보는 자, 시중드는 자, 파수꾼 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가인은 형으로서 마땅히 아우 아벨을 돌아볼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가인은 아벨이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피를 나눈 형제간의 관계성을 단절하는 언행입니다. 책임감 없는 소리입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물으실 때 하나님께서 가인의 행한 일을 몰라서 물었습니까? 혹 여러분도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아닙니다. 가인이 자기 위치와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마지막 길을 열어주시려는 물음입니다. 가인을 향한 사랑의 물음입니다.

가인에게는 아우 아벨을 돌로 쳐 죽인 죄를 자백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는 대단히 큰 은혜의 기회로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가인은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내가 내 아우 아벨을 지키는 자입니까? 라는 불평을 내뱉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가인의 행동을 직접 터치하십니다.

 

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핏소리가 호소한다는 말은 사람 살려. 라는 비명입니다. 피가 하나님께 호소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무죄한 자의 피 흘림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37:12~15). 마침내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직접 물으십니다.

09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10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돌아설 기회를 넘긴 가인에게 피 소리의 결과를 엄중히 선고합니다.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밭을 갈아도 땅이 이전처럼 효력을 네게 주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토양의 생산력을 제어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는 농경사회에서 심판 중의 심판입니다.

가인에게 정당한 노동의 소출을 허락지 않는(11:17)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고대인들 사상으로 볼 때 처참한 저주입니다. 땅과의 단절은 저주 중의 저주입니다.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자연계로부터 내어 침을 당한 가인이 이제는 인간관계도 배척당한다는 선언입니다.

이런 선고를 받는 자체가 자업자득입니다. 인간관계를 가인 스스로 파괴하였기 때문에 맞이하는 결과입니다. 일평생 죄의식에 사로잡혀 쫓기는 생활 할 것을 암시하는 심판입니다.

 

1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너무 무거우니이다. 받아들이다, 감당하다 에 대한 역부족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부과된 형벌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항거입니다. 죄를 짓고도 하나님께(09) 반문한 가인의 뻔뻔스러움을 회상시켜 주는 구절입니다.

믿음의 가족 여러분, 죄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에게 미칠 형벌을 면하려고 변명하지 않아야 합니다. 마땅히 자기의 죄에 대해 애통하며 괴로워해야 합니다(06:05; 23:41).

 

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사람은 자기의 죄 문제를 처리하지 못하고 죄책감을 해결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등지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멀리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없는 곳으로 가기 마련입니다.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성경의 난해한 절 중 하나입니다. 이유는 당시 아담과 하와 외에 가인에게 복수할 또 다른 사람의 존재 여부 때문입니다.
01장부터 본 장까지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 이 네 인물만이 등장합니다. 다른 사람은 한 사람도 행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해석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담과 하와는 자녀를 계속 낳았습니다. 가인과 아벨 외에 또 다른 형제들이 곳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다만 이들은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에 필요한 인물이 아닙니다. 구속사에 필요한 사람을 기록하는 성경의 특성상 특별히 언급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가인을 낯선 고장으로 유랑하게 하시면서 이마에 표적을 주셨습니다. 이 표적이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형벌이나 심판의 표시입니까?

가인이 받은 표는 사랑의 표시이고 은혜의 표시입니다. 그가 죄를 지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형벌을 받은 것도 틀림없습니다.
그런데도 가인에게 특별한 표를 주어서 아무도 그를 해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직도 가인을 향한 하나님의 애정과 보호가 따르는 은혜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들과의 대인 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거창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소한 감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질투심을 잘 극복한 훌륭한 신앙인도 있습니다.

 

F. B 마이어(Frederick Brotherton Meyer 1847~1929). 미국에서 한동안 목회를 하다 고향인 런던으로 돌아와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목회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런던에는 유명한 설교가 찰스 스펄젼(Spurgeon 1834.6.19.~1892.1.31) 목사가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또 훌륭한 목사 캠벨 몰간(Campbell Morgan, 1863.12.9.~1945.5.16.)이 미국에서 오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이어는 자기 마음에 스펄젼이나 캠벨 몰간에 대한 질투가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기도 가운데 성령님의 감동을 입은 마이어는 고향으로 돌아오는 캠벨 몰간의 환영식을 자기 교회에서 성대하게 치러주었습니다.

그리고 캠벨 몰간이 섬기는 교회를 찾아가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 이 설교가 저에게 은혜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마이어의 전기(傳記)에는 이런 기도 내용도 있습니다. 하나님, 친구인 몰간과 스펄젼의 교회를 놀랍게 복을 내리어 주시옵소서. 그 교회에 차고 넘쳐 교인이 남으면 우리 교회로 보내 주십시오. 이런 중심으로 목회하다 보니 마이어 목사는 두 동료 목사와 함께 성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