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교회에 오셔서 예배를 드리시는 분 가운데 혹 교회에 올 마음이 별로 없었던 분은 안 계십니까? 가족이나 주위의 분들이 교회에 꼭 가야 한다고 조르니 그들의 체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와서 앉아 있는 분이 혹 있습니까?
어차피 주일날 한 시간 예배에 왔다 가야 마음이 편할 것 같은 분 말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어떤 마음을 가지고 오셨든지 간에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인 만큼 웃으면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기를 바랍니다. 은혜도 받기를 바랍니다.
가슴을 활짝 펴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귀한 은혜 받는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록은 대부분 30세 이후의 기록입니다. 복음서 가운데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기록한 곳은 누가복음뿐입니다.
그리고 오늘 제가 읽은 말씀은 예수님께서 열두 살 때의 기록입니다. 유대인 남자는 이스라엘 어느 곳에 살든지 간에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기 위해 일 년에 세 차례(유월절, 칠칠절, 초막절) 예루살렘에 가야만 했습니다(신 16:16).
이 가운데 유월절은 이스라엘에 가장 중요한 절기입니다. 이때는 대부분 유대인은 가족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경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이런 관례를 따라 요셉과 마리아도 소년 예수님을 데리고 유월절 행사를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절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예수님께서 부모님과 함께하지 않으므로 요셉과 마리아가 그만 예수님을 잃고 말았습니다. 중대한 일이 발생한 겁니다.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잃었습니까? 그러면 문제를 속히 수습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반드시 찾아야 합니다. 아니 어떻게 찾는다는 말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그 방법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서 말씀 제목을 「예수님을 잃어버린 예수님 꼭 찾아야 합니다.」로 정했습니다.
1.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
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 동행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무관심 때문에 잃어버렸습니다. 당시 유월절 절기에 참석하는 국내외 인원은 역사학자에 따르면, 최대로 2백만 명까지 모일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얼마나 분주하고 복잡하겠습니까? 여관이고 거리고 어디든지 북새통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돌아가는 길도 무척 복잡하였을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나이가 열두 살이니 알아서 따라오겠지? 하는 안일함으로 그만 예수님을 잃고 말았습니다.
당시 귀가를 하는 사람은 주로 무리를 지어 돌아갑니다. 같은 친척끼리, 같은 동네 사람끼리, 같은 또래 아이들끼리 어울려 돌아갔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매년 다닌 예루살렘 길이고 예수님도 열두 살이나 되었습니다. 이쯤 되면 설마 알아서 따라오겠지 하는 마음이 들만합니다. 그런 안일함이 결국 예수님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 안일함이 어쩌면 경제 문제일 것 같습니다. 경제 문제는 언제나 신앙을 위태롭게 하는 요소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경제가 어렵다 보니 앞으로 살아갈 일 등에 대하여 염려도 했을 것입니다. 경제 문제는 예수님을 소홀히 하는 요소입니다.
그 증거로서 당시 가장 빈촌으로 여겨지는 나사렛에 살고 있었고, 출산 후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가장 낮은 집비둘기 둘이나 산비둘기 한 쌍을 드리려 했기 때문입니다.
24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해산한 여자가 정결 예식으로 드리는 제사는 남자아이는 40일 후에 드리고, 여자아이는 80일 후에 드립니다. 제사도 두 종류로서 번제와 속죄제입니다.
번제는 출산에 대한 감사와 헌신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양을 한 마리 드립니다. 속죄제는 출산에 따른 부정(不淨)을 제거하는 의미로 비둘기 한 마리를 드립니다.
그러나 만일 드리는 자의 형편이 양 한 마리에 미치지 못할 때는 그 가격 십분의 일에 해당하는 비둘기 두 마리로 번제와 속죄제를 대체할 수 있습니다(레 12:01~08).
사람은 경제의 곤경에 봉착하면 아무래도 신앙생활을 등한하기가 쉽습니다. 또 교회를 무관심하게 여기기도 쉽습니다. 그럴수록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기도해야 하고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교회를 등지는 길로 계속 나아가면 결국 예수님은 잃어버리고 맙니다.
혼자 걸어가는 인생길은 성공 길이 아닙니다. 주님 없이 홀로 가는 인생길 어쩌면 인생의 막장이 될는지도 모릅니다. 성도 여러분 혹 경제 문제로 예수님을 등지고 사십니까?
그러면서도 나는 주님과 동행하고 있다고 믿습니까? 어리석은 우를 범하지 맙시다. 세상을 사랑하여 떠난 데마처럼 됩니다.
딤후 0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2. 잃어버린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았습니다. |
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44절에 의하면 예수님을 잃어버린 채 하룻길을 갔습니다. 유대인들이 절기를 마치고 한 팀을 이루어 가는 첫날 거리는 짧은 구간입니다.
귀갓길에 오른 무리는 여행 준비하고 이동하여 출발 장소로부터 약 4.8km~12.8km 정도의 지점에서 휴식하며 첫날밤을 보냅니다.
이런 관습이 정착된 이유는 만약 실수나 건망증으로 어떤 물건을 놓고 왔을 때 쉽게 돌아가서 찾아오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다음 날 출발하는 시간에 늦지 않게 합류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북부 쪽을 향해 돌아가는 일행이 첫날밤을 보내는 장소가 엘버치(elBirch)입니다. 그곳은 예루살렘에서 한 3시간 정도의 거리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첫날 저녁때 이곳에서 모여 가족관계를 확인하고 돌아갈 일정도 조정한 후 유숙합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일행 중에 있을 줄 믿고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녁 식사 때 혹은 잠자리에 들 때쯤 예수님이 없음을 알고 그때부터 아는 사람들 속에서 찾기 시작했습니다.
44 동행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 만나지 못하매
당연히 찾을 수 없습니다. 찾아야 할 곳에서 찾고 만나야 할 곳에서 만나야 합니다.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어떻게 찾습니까? 만날 수 없는 곳에서 어떻게 만납니까? 헛수고입니다. 우리 주변 분들 보십시오. 예수님을 만날 수 없는 곳에서 만나려 합니다.
매우 바쁘게 다닙니다. 이 얼마나 헛된 일입니까? 이단의 모임이나 사이비(似而非) 모임을 보십시오. 과연 저러고도 될 것 같은지 하는 의문점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도 많은 사람이 갑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잃고는 다른 곳으로 가서 찾으려고 애를 씁니다. 만일 내가 예수님을 잃었으면 어찌해야 합니까?
예사롭게 여기시겠습니까? 아니면 요셉과 마리아처럼 근심 중에 찾으시겠습니까? 잃은 예수님을 찾기 위하여 기도의 몸부림, 예배의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이것 하나 아셔야 합니다. 내가 찾는 그분은 거리에서도 찾지 못하고, 구경꾼 중에서도 찾지 못하고, 세상에서도 찾지 못하고, 복잡한 곳에서도 찾지 못합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 사흘 후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성전에서 율법 교사와 앉아서 대화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성전 안에는 율법 교사가 제자를 만나는 장소가 여러 곳 있었습니다.
예배나 제사가 끝나면 교사는 율법에 관계되는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함께 대화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런 관례를 따라 예수님은 율법 교사에게서 듣기도 하고 질문도 하는 은혜의 시간을 누렸습니다.
48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의 말을 받아서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49) 지금까지 근심하면서 잘못 찾은 일에 대한 헛수고를 지적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더러는 예수님께서 부모님을 근심하게 했고 부모님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라고 해서 예수님이 불효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불효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절기를 마친 후 집에 가지 않고 성전에서 율법 선생님들과 대화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일은 당시에 흔히 있는 일입니다. 오히려 요셉과 마리아가 이 일을 미리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잘못 판단하여 예수님을 잃어버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부모님이 내가 성전에 있는 줄로 알겠지? 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49절 말씀의 반문이 나온 것 아닙니까?
복을받는 교회 가족 여러분도, 사람들이 나의 소재가 잘 파악되지 않을 때 교회에 가면 만날 수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미국의 초대 대통령 워싱턴은 고된 일 속에서도 주일성수 하는 일에 빠짐없었고, 영국의 윌리엄 경은 그를 찾는 손님이 그의 집에서 만날 수 없을 때 교회로 가면 어김없이 만났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맺습니다. |
44 동행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교회 일에 무관심하면 떨어져 나가기 쉽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관심의 죄를 짓지 맙시다. 내가 없어도 학신회가 잘 되겠지? 내가 없어도 교회학교 잘되겠지? 내가 없어도 우리 전도회 잘 되겠지? 하는 무관심과 방관(傍觀)은 복에서 이탈하는 행위입니다.
주님을 잃어버리는 길입니다. 복을 받지 못하는 불행의 통로입니다. 정신없을 만큼 바쁩니까? 그러면 예수님을 잃어버린 삶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도 예수님과 동행하는 줄로 생각하고 사는 것은 않은지 돌아보십시오. 주님의 몸 된 교회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 복을 관리하는 지름길입니다. 분주 복잡하고 세상살이 재미가 많을수록 더욱더 교회를 가까이하여야 할 때임을 기억하십시오.
요셉과 마리아가 자기들끼리 걸어가면서 예수님이 따라오겠지 하는 생각이 큰 사고로 변했습니다. 항상 내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검증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 느낌으로만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주님과 함께하는 삶이 아닙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복 중의 복입니다. 이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잃어버린 예수님을 집에서 찾으려 합니까?
직장에서 아니면 학원에서 찾으려 합니까? 오락실에서 찾으려 한다고요?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 곳은 오히려 예수님을 잃는 곳입니다. 오직 성전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주변을 보십시오. 왜 많은 사람이 교회를 다니다 상처를 입고 낙심하는 일이 일어납니까? 다시는 교회에 오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생겨납니까?
무엇보다 우리가 예수님을 잃어버린 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웃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는 중매인입니다. 이 역할을 등한히 하면 예수님을 잃기 쉽습니다.
렘 29: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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