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24년 말씀

[종려주일] 가상칠언의 의미를 아십니까? (성경 눅 23:32~49)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4. 4. 6. 04:56
728x90

한국전쟁 참전 16개국의 일원으로 6천여 명의 군대를 우리나라에 파견한 에티오피아(Ethiopia)라는 아주 고마운 나라가 있습니다.

이 나라는 아프리카 동부 중심에 위치하며 현재는 세계 최빈국(最貧國)의 하나입니다. 주 후 3세기부터 기독교를 신봉하는 나라로 지금도 전 인구의 약 3분의 2가 기독교인이며 매년 세례식 때면 공동으로 세례를 받는다고 합니다.

이 나라에는 최고 명절로 마스칼이란 절기가 있습니다. 이 마스칼은 에티오피아 말로 십자가의 재발견이란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의미를 발견한 날이라 해서 명절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주변을 보십시오. 기독교를 상징하는 십자가가 많이 세워져 있습니다. 또 우리 교회가 있는 지역만 하더라도 십자가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 많은 십자가를 긍정의 사고로 보면 좋은 현상입니다. 반면 십자가가 난무하는 현장이 불신자의 눈에는 달갑지 않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정신과 의미를 알고 사회에서 그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가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와 그 위에서 외치신 일곱 말씀의 의미를 바로 알고 전하는 교회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저는 오늘 종려주일을 맞아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의미를 우리 모두 잘 깨닫기를 원합니다. 동시에 주님의 고난에 믿음으로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가상칠언(架上七言)의 의미를 아십니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강론하겠습니다.

 

 

1 말씀. 아버지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23:34 용서의 종교]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옛날 왕정시대(王政時代)는 돈이 많은 사람이나 세도(勢道)가 당당한 사람이 잘못하였을 때 자기가 맞을 매를 종이나 매 품팔이하는 사람이 삯을 받고 대신 맞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주로 먹을 것이 없는 가난한 선비가 매 품팔이하였습니다.

당시 죗값은 주로 곤장입니다. 죄는 자기가 짓고 곤장(棍杖)은 종이나 가난하고 낮은 백성들로 맞게 하였습니다. 살려고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나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이와는 반대로 죄는 우리가 지었지만, 그 죗값을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림으로 우리의 죗값을 치러 주셨으니 얼마나 놀랍고 큰 사랑입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외치신 첫 말씀 의미를 보겠습니다.

 

①원수까지도 용서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1 말씀을 보십시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는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용서해 주십시오.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라고, 외치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아래에는 군병들이 예수님께서 입으신 옷을 벗기고는 누가 그 옷을 가질 것인가에 대해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군병 하나가 속옷은 통으로 된 것이니 나누지 말고 제비를 뽑아 갖자고 제안하여 제비 뽑는 일을 벌입니다(19:24).

얼마나 비정한 자들입니까? 그러므로 이 용서의 말씀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는 판결을 한 빌라도와 허물과 죄로 얼룩진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와 은 30에 스승을 판 가룟 유다의 죄까지도 용서하는 외침입니다.

빌라도와 종교 지도자들의 죄를 용서하셨고(19:06~23),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의 죄를 용서하셨고(23:34),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26:15~69).

 

②우리도 서로 허물을 용서하며 지내라는 말씀입니다.

한 번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선생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면 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을 때 주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18:21, 22). 사도 바울은 이렇게 전합니다.

 

골 03: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주님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고 가르쳤고(03:13),

주기도문에서 명령하셨고(06:12),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18:21, 22).

우리는 제1 말씀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용서의 종교임을 알고 용서하는 일에 더욱 폭넓은 마음도 가져야 합니다.

 

 

2 말씀.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23:43 구원의 종교]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좌편과 우편에 각각 강도가 달렸습니다. 그들은 큰 죄를 범하여 당시의 최고형인 십자가형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때 달린 행악자 중 하나가 예수님을 비방하여 말하기를,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냐? 당신이 정말 그 구원자라면 당신과 우리를 이 자리에서 구원해 보라(23:39)고 빈정거렸습니다. 그때 한편 강도가 그 사람을 꾸짖으며 말합니다.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 않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당연한 값을 치르지만, 이분이 행하시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있느냐? 라고 말한 후 예수님께 간구합니다.

 

예수님이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해 주십시오. 예수님은 이 말을 받아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2 말씀) 말씀은 어떤 의미가 들어있습니까?

 

①예수님은 낙원의 주인이심을 안내해 줍니다.

요 14:02.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0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전하는 말씀입니다. 낙원의 의미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만드신 에덴동산을 말합니까? 바로 그 낙원에 예수님의 좌우 십자가 중 한 편의 회개한 강도가 들어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가 비록 흉악한 죄 때문에 십자가형을 받았지만, 마지막에 예수님을 구원의 주님으로 알아보고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낙원에 들어가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0:13 절처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죄에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지난날 어떤 죄와 허물이 있을지라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 죄를 회개하면 죄 사함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받습니다.

 

요 0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②장차 우리가 가게 될 낙원을 안내해 줍니다.

22:0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예수님을 구원의 주님으로 믿는 성도는 거기서 세세토록 왕 노릇을 하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됩니다. 우리 모두 이 천국에 이르는 믿음의 승리자가 되를 바랍니다.

 

 

3 말씀. 여자여(γυνή 귀네)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19:26, 27. 효도의 종교]


요 19: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 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예수님을 따라온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백성과 큰 무리와 슬피 우는 여자들입니다(23:27).

여기서 백성은 구경하려고 온 자들입니다. 그중에 언덕을 오르는 특별한 여자 몇이 있습니다. 이들은 갈릴리에서부터 가슴을 치며 온 자들입니다.

군병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는 일을 마쳤을 때는 대부분 무리는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돌아가지 않고 남아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친 마리아, 이모(세베대의 아내 살로메),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등 4명의 여자입니다(19:25).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그 옆에 서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모친과 사랑하는 제자들이 곁에 선 것을 보시고 모친께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입니다.

그러고는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시니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왜 여자여하며 존칭어를 쓰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여자여 하고 부르는 말이 비하(卑下)의 호칭 같지만, 헬라어에서는 비하의 의미가 아닙니다.

 

①슬픔을 위로해 주시는 주님입니다.

그러면 어머니, 하고 부르면 될 것을 여자여 하셨습니까? 아마 예수님께서 슬픔에 가득 찬 모친 마리아에게 어머니! 하고 부르셨다면 그의 마음을 더 격동시켰을 것입니다마리아의 마음을 바라보시는 주님 또한 아픔이 더욱 솟아났을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있던 나다나엘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자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어느 물고기 배 속에 돈이 들어있는지를 아시는 주님, 가룟 유다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주님은 모친 마리아에게 여자여, 라고 부르심으로 자기가 주님 되심을 상기시키시고 어머니의 슬픔을 위로하며 자제시키시는 배려의 모습이 보입니다.

 

②기독교는 효도의 종교임을 일러주십니다.

기독교는 효도의 종교입니다. 세상 사람은 간혹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제사 지내지 않는 불효막심한 자라고 비난합니다. 실제는 기독교인의 가치를 모르는 말입니다. 돌아가신 분에게 진수성찬 차려 제사 지내는 일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 아닙니까?

살아 계실 때 잘 공경해야 합니다. 기독교처럼 효도를 강조하는 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십계명 중 인간에게 주신 가장 첫 번째 계명도 부모 공경입니다(20:12). 예수님도 친히 효의 계명을 실천하셨으며 성경 곳곳에서 우리에게 산 교훈을 줍니다.

 

 

4 말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27:46. 고난의 종교]

 

마 27:46 제 구시 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육시 곧 우리의 시간으로 정오가 될 때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구 시쯤(오후 3) 예수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면 이 네 번째 말씀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①죄의 삯(값)은 사망임을 알려 주십니다.

극심한 고통의 상황에서 예수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절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얼굴을 돌이키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돌아보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짊어지신 속량의 제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죄의 대가를 속죄의 제물 되신 예수님께 철저히 물으셨습니다. 완전하게 그 죄의 대가를 내어야만 하셨습니다(06:23).

이런 속량의 원리를 따라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가 당해야 할 죄와 사망 그리고 질고와 슬픔, 허물과 죄악, 병과 상함까지 다 담당하셨습니다.

 

②죄악의 담을 허무는 순간입니다.

이 순간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은 죄의 담을 허무는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운명하시는 순간 성소의 휘장(揮帳)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27:51). 성소의 휘장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으로서 성소 안의 지성소는 일 년에 단 한 번 대제사장만이 민족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임하시는 거룩한 장소로 대제사장 외에 누구든지 들어가면 죽습니다. 설령 대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지성소에서 잘못된 의식을 행하거나 부정하면 죽임을 당합니다.

이 휘장은 얼마나 튼튼한지 두꺼운 가죽으로 되어있어서 양쪽에서 소가 끌어당긴다 해도 찢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 휘장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순간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찢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이는 곧 막혔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완전히 허물어 버린 놀라운 역사의 한 상징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지성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고 누구든지 지성소에 들어가도 됩니다.

아무도 죽임을 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활짝 열렸음을 의미합니다. 제사장을 통해 속죄받는 구약시대는 지나가고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시대가 임했습니다. 막힌 담이 무너져서 누구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엡 0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 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③끝까지 순종하시는 모습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섭리와 프로그램에 끝까지 순종하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십니다(삼상 02:06).

예수님은 전부를 하나님께 맡기십니다. 우리도 무슨 일을 당하든지 하나님께 전부를 맡기는 신뢰와 신앙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지신 예수님, 아픔을 알고 고통을 알고, 저주와 모욕을 아시는 주님의 모습이야말로 속량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사 53:0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는 이 순간은, 버림받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십자가 최고의 순간입니다(딤전 02:04).

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는 산 교훈입니다(21:08). 예수님이 인간 대신 버림을 받으시는 순간입니다(53:04~06). 기독교야말로 고난의 종교임을 다시 깨닫게 해 주십니다.

 

 

5 말씀. 내가 목마르다. [19:28 생수의 종교]

 

요 19:28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내가 목마르다(19:20). 이 말씀은 목마른 인생을 위해 주님께서 대신 목말라해 주심을 알 수 있는 상징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모두가 목마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마다 갈증을 해결하려는 샘을 파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돈의 샘을 파고, 어떤 이는 권력의 샘을 파고, 어떤 이는 지식과 명예의 샘을 파고, 어떤 이는 쾌락의 샘을 파지만 그 물들이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04:13).

 

솔로몬 왕도 세상의 모든 물을 다 맛보고 난 후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01:02). 하면서 인생의 목마름을 단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도 하나님을 대신하여 내 백성이 두 가지를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이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팠으나 그것은 물을 저축하지 못할 터진 웅덩이라(02:13) 하였습니다. 인생의 갈증을 우회로 표현한 셈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것이 바로 갈증의 원인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갈증을 느끼는 자에게 예수님께서 대신 목마르다 하고 외치셨습니다.

 

내가 목마르다. 이 순간은 참 생명의 물줄기를 터뜨리시는 은혜의 현장입니다. 자기의 몸을 터뜨려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명의 물줄기를 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찾아오는 자에게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며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04:14) 하셨습니다.

 

①목마른 인생은 예수님께로 나아와야 합니다.

예수님께 나와야만 살 수 있으며 반대로 주님을 떠난 인생은 어느 곳을 갈지라도 목마른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 가나안을 향하여 나갔지만, 도중에 광야에서 처음으로 맞은 어려움이 물이 없어 목이 마르는 고통이었습니다.

갈증을 참지 못한 그들은 살인자의 모습으로 돌변하여 돌을 들어 모세를 치려 하였습니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함으로 갈증을 해결하였습니다.

갈증에 시달리던 저들이 마음껏 물을 마셨습니다. 그러나 몇 날이 못 되어 다시 목마름의 갈증에 시달리고 말았습니다. 누가 이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습니까? 주님밖에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여전히 의식주에 목마르고, 물질과 명예에 목마르고, 자유에 목마르고, 사랑과 애정에 목마릅니다. 그보다 더 강한 목마름은 영의 목마름입니다. 이에 아모스 선지자는,

 

암 08:11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 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그러므로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하는 방법은 생수의 말씀을 베푸시는 하나님께로 나와야 합니다.

 

사 55:01.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성도 여러분, 갈증이 난 인생을 위해 주님께서 친히 목마름의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이는 우리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하여서 다시는 목마르지 않도록 위함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와 복이 여기에 함께하신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도 성도 여러분은 계속 목말라합니까? 혹 애정이 목마릅니까? 아니면 경제면으로 목마릅니까? 목마름을 해갈해 주시는 주님께로 나아오십시오.

 

요 07: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6 말씀. 다 이루었다. [19:30 완성의 종교]

 

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예수님께서 극심한 고통으로 목말라하실 때 사람들은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면(海綿)을 우슬초에 매어 주님의 입을 적시게 했습니다. 이 현장을 복음서 기자들은 조금씩 달리합니다.

 

마 27: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막 15:23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요 19: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이상 말씀을 종합해 보면 주님은 심히 목마르신 가운데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주었지만 마시기를 거절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의 포도주는 쓸개와 몰약을 탄 포도주로서 당시에 고통을 잊게 하는 일종의 마취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신 포도주 같은 일종의 마취제로 십자가의 고통이 경감됨을 거부하셨습니다. 타는 갈증과 목마름이 극에 달하였음에도 세상 것으로 위로받기를 거부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신 말씀은 어떤 뜻을 가집니까?

 

①예수님은 구원 사역의 완성자이심을 나타내십니다.

우리기 백 년을 산다고 해도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완성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삼 년의 공생애를 사시면서도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여 구원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확증하는 사랑의 완성자이셨습니다.

 

요일 0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②우리는 다 이루신 주님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합니다. 다 이루고 갈 수가 없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 그 누구도 자기의 계획을 다 이루고 가지 못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120년까지는 거뜬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예 그렇게 살면 좋지요. 그러나 그렇게 무난하게 산다고 해도 우리의 일을 다 이루고 가지 못합니다.

명예와 권세를 가진 자도, 부귀영화를 누리는 자도, 자신의 꿈을 다 이루고 가는 이가 없으며 자녀나 부부가 가진 꿈을 다 이루고 가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일에 힘을 실어주시면 우리는 얼마든지 이룰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완성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어도 주님 안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이룰 수 있는 완성의 종교가 바로 기독교입니다.

 

요일 05:0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나는 할 수 없고, 나는 다 이룰 수 없어도, 주님의 은혜 안에서는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음을 믿고 살아갑시다.

가난한 자에게는 부함을 채워주시고, 병든 자에게는 건강으로 채워주시고, 실패한 자에게는 성공으로 채워주시고, 절망한 자에게는 소망으로 채워주시는 주님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막 0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7 말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23:46 소망의 종교]

 

눅 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 지시니라.

 

마지막으로 제7 말씀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23:46). 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돌아가셨습니다.

당시 사형 집행관 백부장은 그 상황을 보고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하였고(27:54) 구경하러 온 사람들도 그 현장을 보고 가슴을 치며 갔습니다(23:48).

 

그리고 가상칠언 중 세 마디가 기도로 되어있습니다. 그 가운데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 라는 제7 말씀은 온전한 신뢰와 사랑의 기도문입니다.

우리는 가상칠언의 마지막 말씀에서 기독교는 소망의 종교임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바로 우리의 현실이 닫히게 되면 다음 세상으로 연결되는 소망의 세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①우리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습니다.

다른 피조물들과 구분되는 내용으로서 인간만이 영혼이 있다는 말입니다. 영혼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 그 속에 부어 주신 생기입니다. 영혼이 있으므로 인간이 하나님께 연결될 수가 있습니다(02:07, 12:07).

 

②내 영혼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영혼은 하나님에게서 왔고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심을 알아야 합니다. 내 영혼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눅 12장의 어리석은 부자의 사건에서 알 수 있습니다.

 

눅 12:18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③사람이 죽으면 영과 육이 분리되어 제 곳으로 감을 확인하게 됩니다.

주님도 복음은 제자들에게 맡기시고, 옷은 군사들에게 맡기시고, 모친은 요한에게, 육신은 아리마대 요셉에게 그리고 영혼은 하나님 아버지께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지 못한 사람은 부탁할 대상을 찾지 못하여 금이나 은이 또는 돌에다가 정성을 기울이며 부귀영화를 빕니다.

말도 하지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그 우상을 향하여 사람들은 자녀의 장래를 부탁하고, 사업을 부탁하고, 미래를 부탁하고, 자신의 사후 장래까지도 부탁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바로 복 중의 복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 우리의 가정을 부탁하고, 우리의 사업이나 장래를 부탁하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부탁합시다. 능히 해결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④우리의 최종 목적은 아버지께로 가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할 것이며,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을 바꾸겠냐(16:26) 하셨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것이 자기 생명이요 영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사람은 그 영혼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감을 알고 있습니다.

14:06 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아무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성도 여러분 모두 낙오됨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표현하는 십자가를 떠올립니다. 십자가 하면 기독교를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이 십자가를 자랑스럽게 여겨 목걸이로 착용합니다.

우리나라는 하나님 은혜로 교회가 많은 나라입니다. 도시마다 거리마다 십자가 탑이 높이 서 있어도 제한받지 않는 자유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본래 사형 도구의 하나로 로마에서는 주로 탈주한 노예, 내란 선동자, 살인자, 반역자 등 중죄인을 고통스럽게 죽이기 위한 형틀입니다. 사형수는 나무 형틀 위에서 갖은 고통을 당하며 때로는 며칠씩 신음한 끝에 메말라 죽게 됩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십자가형이 정치 폭도의 소요 억제책으로 집행되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예수님 당시에는 유대인의 잦은 반란과 항거가 일어나 소요를 일으킨 수천 명 유대인이 십자가형에 처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반역죄로 기소가 된 예수님은 십자가형에 처했으나 그러한 십자가가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기독교의 상징물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