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신실한 기독 신앙인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진출해 있는 한 건설 회사와 용역계약을 맺고 끝없는 모래사장이 펼쳐진 사우디아라비아를 찾아갔습니다.
섭씨 40도가 넘는 작열하는 뜨거운 햇볕 아래 일하였습니다. 그러다 같은 직장에 있는 이슬람교도 무슬림을 사귀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무슬림 교도가 자기가 믿는 교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으로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우리는 매일 같이 하루 다섯 번씩 기도한다. 엄한 규율대로 살아야 하고 반드시 메카를 순례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큰 자랑은 우리나라 메카에 있는 모하메드의 무덤이다.
기독교의 교주인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지만 우리 교주의 무덤은 웅장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모하메드의 이름다운 분묘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야. 이 말을 들은 크리스천이 대답합니다. 그래 그것이 바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차이점이지.
모하메드나 다른 종교의 교주는 모두 죽어 무덤에 묻혀 썩어 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지 사흘 만에 무덤을 깨뜨리고 부활하셨다.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증명할 필요가 있습니까?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이 인류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종교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외에 부활을 말하는 곳은 없습니다. 요즘은 불교가 산에서 도심으로 내려와 기독교를 모방합니다. 찬불가도 만들고, 심방도 하고, 불교 어린이 학교도 개설하고, 수련회도 하고 주일마다 정기 예불도 드립니다.
불교가 아무리 기독교를 모방한다 해도 한 가지 모방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부활입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 기독교 역시 존재의 가치가 없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심은 이 자리에 참여한 여러분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래서 오늘 말씀 제목을 「예수님께서 사망을 깨뜨렸습니다.」로 정했습니다. 예수님 부활이 나에게 어떠한 유익을 가져오는지를 생각해 보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1.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사망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
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일상생활 법칙을 따라 사는 사람은 누구나가 죽음을 맞이합니다. 인류의 첫 사람 아담도 죽었고, 새로운 조상 노아도 죽었고, 하나님과 직접 소통한 모세도 죽었습니다.
마음껏 부귀영화를 누렸던 솔로몬 왕도 죽음의 길을 갔습니다. 다윗왕이 노년에 인생을 정리할 때 솔로몬을 곁에 앉혀 놓고 나는 모든 사람의 가는 길을 간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왕상 02:02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중국의 신선(神仙)을 공부하던 노자(老子)도 죽었고, 권력을 놓지 않고 영원히 살기 위해 불로초(不老草)를 구하던 진나라 시황제도 한 줌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당시 알려진 세계를 거의 정복한 다음 더는 정복할 땅이 없다고 통곡한 알렉산더 대왕(Ἀλέξανδρος 3세 B.C. 356~323)도 서른세 살 나이로 생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영웅호걸인들 죽음을 피할 수 있습니까? 그 누가 죽음을 피할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55절은 부활하셔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신 주님의 능력을 사도 바울이 전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전능자이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요 11:25).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성도는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라고 외치면서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습니다.
사망을 정복하신 주님께서 히브리서 기자를 통해서 죽기를 무서워하여 일생 종노릇 하는 모든 자를 놓아주시겠다는 약속도 해 주셨습니다.
히 0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이것 하나 아셔야 합니다. 기독교 밖에는 어떤 종교에도 생명의 부활이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 이유는 모든 종교는 인간의 소원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와 타 종교의 대화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종교의 화합과 국론통일을 한답시고 전국 각 종교 대표자 모임도 하는데 그렇게 해보았자 모든 일이 허사입니다. 이념이 다르고 차원이 다른데 무엇을 어떻게 해본다는 말입니까? 공연한 삶의 에너지만 소모하는 것 아닐까요?
오직 기독교에만이 부활이 있습니다. 기독교만이 부활의 종교로 불리는 것은 예수님만이 죽음을 격파하셨고 예수님만이 소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가족 여러분,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엄습하는 절망이 사라졌음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 안에서만 진정한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기쁨과 소망 가운데서 날마다 주님을 섬기며 살 수 있는 은총만이 있습니다.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 1802.2.26.~1885.5.22.). 오늘의 목적은 싸우는 것이요, 내일의 목적은 이기는 것이요, 일생의 목적은 잘 죽는 것이다.
나폴레옹. 죽는 순간 가장 사랑한 세 가지를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내 조국 프랑스, 충성스러운 군인, 사랑하는 아내 조세핀. 일생의 아쉬움이 배어있는 말입니다.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2.17.~1827.3.26.). 죽음 앞에서 이렇게 읊조렸습니다. 친구여, 이제 희극은 모두 끝났네. 진한 허무와 체념이 묻어나는 말입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산 소망을 증명합니다. |
요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나무 중에는 천 년을 사는 수종(樹種)이 있고 동물 중에 거북이는 2백 년까지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고작해야 백 년 안쪽을 사는 정도입니다.
그렇게 사는 날도 슬프고 고통스럽고 근심 걱정하며 산 날을 제외해 보십시오. 제대로 행복하고 마음 편하게 산 날이 몇 날이나 됩니까?
만일 우리가 품은 삶의 가치와 소망이 세상 것뿐이라면 만물을 다스리는 사명을 받은 자로서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참 소망이 없습니다. 소망으로 여기든 사람도 떠나가고 물질도 없어지고 권세도 무너지고 인기도 저절로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솔로몬 왕은 그 누구보다 세상 부귀영화를 다 누려 보았지만, 말년에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전 01:03)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이 있음을 안내해 주십니다. 바로 부활의 소식 영원한 생명의 소식인 요 11:25 말씀입니다.
25절이야말로 우리에게 산 소망이 있음을 안내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정복하심으로 인해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영원히 쇠하지 않는 소망의 말씀입니다.
벧전 01:03….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사람은 희망을 먹고 사는 존재라는 말이지요. 어떤 환경을 만날지라도 다시 희망에 대해 도전하고 희망을 찾아 몸부림을 치는 존재입니다. 만일 사람이 내일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다면 그대로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인류에게 영원한 희망을 준 사건입니다. 만일 예수님 부활이 없었다면 인류는 희망을 상실하였을 것이고 어둠의 수렁에서 영원히 헤어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미국 16대 링컨 대통령(16대 Abraham Lincoln, 1809~1865)의 젊었을 때 이야기입니다. 그는 변호사 시절 주 의회 의원으로 출마했다가 낙방하고 하원의원으로 출마했다가 낙방을 한 일로 인해 처절하게 좌절과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주변 친구들은 저러다 혹 링컨이 자살하는 건 아니야 하며 목숨을 끊을까 염려하였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링컨은 친구들의 염려대로 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인생을 살고 있다. 어떠한 개선이나 향상을 기대할 수 없다. 나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있다고 자기의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이렇게 실의에 빠졌던 링컨이 재기하여 대통령까지 되었습니다.
후에 그가 어떻게 하여서 미국의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는지 말하기를, 나는 성경을 읽고 그 안에서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링컨에게 용기가 되고 희망을 회복하였습니다. 다시 공화당에 입당하여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아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절망이 절망으로 끝나면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절망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면 절망의 탈출구를 찾을 수 있는 은혜와 지혜를 받습니다.
전화위복이 되게 하십니다. 형통하게 역사하십니다. 오늘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서만 부활을 기념하지 마십시오. 성도 여러분의 삶 속에 항상 부활의 생명을 간직하십시오. 예수님 부활로 인해 생명의 에너지를 듬뿍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3.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의심이 사라지게 합니다. |
요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우리는 가끔 의심의 현장을 만나면 도마를 떠 올립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 현장에 없었습니다.
조금 지나서 도마가 마침 집안에 들어서자,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보았노라고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열 사람이 한마디씩 해도 열 마디 아닙니까? 도마가 말하기를,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그의 불신앙을 나타내었습니다(25절).
그날로부터 예수님께서 팔 일 만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26절). 그때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도마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주님께서 왜 이 말씀을 하십니까?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처음 찾아오셨을 때 그 자리에 도마가 없던 일로 인하여 내뱉은 말 때문입니다.
내 손으로 십자가에서 입은 그 상처를 눈으로, 손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도무지 못 믿겠다고 한 그 불신앙의 말을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곳에서도 행한 우리의 행동이나 말을 다 보고 듣고 계십니다. 범사에 하나님은 모든 언행을 다 보고 듣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민 14:27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사람은 각자 자기가 정한 나름의 가치 기준이 있습니다. 그 기준에 맞아떨어지면 긍정으로 생각하고 그렇지 못하면 부정으로 생각합니다.
도마도 자기가 정한 기준에 맞지지 않는다고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했습니다. 그 기준이 무엇인지를 요 20:25 말씀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요 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도마는 예수님 부활 소식을 듣는 것으로 믿지 못했습니다.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입은 그 못 자국에 자기가 손을 넣어 본 후에야 믿겠다는 자세입니다. 의심이 풀릴 때까지 검증하겠다는 사고입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앞뒤가 딱 맞아떨어지는 일이 얼마나 됩니까? 공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몇이나 됩니까?
계속 의심하며 갈등하는 분이 있습니까? 자기도 모르게 회의론에 끌려다니는 분이 있습니까? 도마처럼 예수님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도마의 고백을 보겠습니다.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가 주님으로부터 27절 말씀을 듣고 28절을 고백한 후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후일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용맹한 일꾼이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가운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회의론이 강한 사람일수록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불신앙의 자리를 정리하십시오. 그럴 때 우리에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의심이 사라집니다. 확신이 찾아들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예수님 부활 사건이야말로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기독교만의 독특한 진리입니다. 만약 부활의 사건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으면 이 세상 모든 교회가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일이 없다면 믿는 이들의 신앙이 필요 없습니다. 성도들의 헌신이나 경건의 생활도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지고 오신 분이 있습니까? 사방으로 우겨 싸이고 답답한 일을 만나고 거꾸러뜨림을 당한 분이 있습니까?
소망이 다 끊어져서 속히 천국 가는 것이 소망인 분이 있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부활의 능력 힘입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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