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23년 말씀

교회 마당만 밟고 돌아갑니까? (사 01:10~17)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3. 8. 12.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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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생을 살 기회가 한 번 밖에 없습니다. 한 번 지나온 삶은 되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함께 예배 드리는 오늘 이 시간도 한 번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시간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사람마다 나름의 기준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지난날의 잘못을 돌아보고 고치는 일입니다. 그러나 과거로 돌아가서 바로 잡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고칠 수 있는 기회는 현재입니다. 깊은 반성과 사과와 회개는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과거에 얽매인 후회의 삶에서 벗어날 수는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귀한 일이 무엇일 것 같습니까? 각자의 판단에 따라 달라집니다. 개인의 관점과 가치 판단에 따라 다양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알고,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인생 최고의 가치관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우리의 가장 귀한 가치관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는 일이어야 합니다. 이 가치관은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라는 94장 찬양을 기쁨으로 부르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신 일은 복 중의 복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로 나아가는 일이 진정한 삶의 가치관입니다.

 

오늘 설교의 본문 가운데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는 12절을 잘 보십시오.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처하는 자들이 헛된 제사 헛된 예배를 드린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겠습니다. 따라서 교회 마당만 밟고 돌아갑니까?라는 물음으로 강론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자기의 예배관을 돌아보는 은혜의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교하십니다.

 

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이사야는 어떤 사람이며 어떤 일을 한 사람입니까?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라는 뜻을 가진 이사야(ספר ישעיה 예사 야후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구약성경 23번째 책 이사야의 저자입니다. 약 25세에 남 왕국 유다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아 일했습니다(06:01~08)..

신분은 왕족이거나 아니면 혹 귀족 출신으로 보입니다. 근거로는 아하스 왕과 히스기야 왕을 쉽게 만날 수 있었고 제사장과도 친분을 나누었고(07:03, 08:02, 38:01) 또 서민 출신으로서는 알 수 없는 국내외 정세의 고급 정보를 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웃시야(10), 요담(11) 아하스(12), 히스기야(13) 왕 등 4대에 걸쳐 약 60(B.C. 739~680)간 예루살렘 중심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동시대 선지자로 아모스, 호세아, 미가(01:01, 01:01)가 있습니다. 이사야가 활동하던 당시 중동지역의 강력한 패권 국가는 앗수르입니다.

 

앗수르는 B.C. 745년경 디글랏 빌레셀[Tiglath-pileser III]이 권좌에 오른 후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주변 여러 약소국을 정복해 나갔습니다.

이사야가 활동하던 기간은 평화와 전쟁이 교차하는 정치 격변기입니다. 웃시야(10)와 요담(11) 정권 때 유다는 번영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나 평화와 번영은 종교의 외식과 도덕의 부패를 낳고 그 부패는 전쟁을 불러왔습니다.

 

아하스(12) 때는 아람 왕과 북 왕국 이스라엘이 연합하여(왕하 16:05) 쳐들어왔습니다. 히스기야(13) 때는 앗수르 왕 산헤립의 침략에 생명을 걸고 맞서야 했습니다(왕하 18:13, 36:01). 이 모든 일은 유다가 우상에 기울어 하나님을 떠난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떠났으니 당연히 심판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는 선민이라 자처하는 유다 왕국을 무엇에 비교합니까? 10절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소돔과 고모라는 이스라엘 사해 남단 근처 지역입니다. 아브라함 때인 B.C. 1900년경 롯이 육신의 눈이 어두워 이곳에 잠시 머물렀습니다.

그러다 죄악으로 이 두 성이 유황 불비로 멸망 당하고 말았습니다(19:01~25). 그 옛날이나 지금도 통상 죄악을 표현할 때 소돔 고모라를 소환합니다.

 

이에 따라 소돔과 고모라 두 도시를 함께 싸잡아 소돔과 고모라라는 관용구가 나왔습니다. 도덕이 사라지고 부패한 막장 행각이 펼쳐지는 환경을 비유하는 용어입니다.

여호와의 선민으로 자부하는 유다 백성을 소돔과 고모라로 비유하였으니 유다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얼마나 충격 되는 일입니까?

 

이런 형편에 처했으면 심판 외 달리 뭐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유다 백성은 깨닫지 못합니다. 외식 가득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제사에 참여합니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나 외식에 빠진 자들의 재물은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구약시대 말라기 선지자의 메시지에도 안 받는다는 말이 나옵니다. 결국 마당만 밟고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말 01:10….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2.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마당만 밟는다고 책망하십니다.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성도가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입니다. 성경공부, 전도, 봉사, 기도 모두 다 중요합니다그러나 이런 귀한 일도 찬양과 경배가 들어 있는 예배보다 앞서갈 수는 없습니다. 예배는 이벤트 행사가 아닙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드릴 핵심 가치입니다. 예배는 성도의 영적 생명을 유지하는 양식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삶이 최고의 가치관입니다. 연중 절기 및 특별 행사를 따라 5대 제사 원리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5대 제사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입니다. 목적에 따라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를 드리고 제물에 따라 번제 소제 전제를 드리고 방법에 따라 화제 거제 요제를 드립니다.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이 말은 하나님께 제사를 올리려고 나오기는 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불신앙의 제사는 그저 눈도장만 찍는 것과 같습니다. 그저 헛수고만 하는 슬픈 제사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불신앙의 생활 방식은 어떤 제물을 드려도 마당만 밟고 돌아가는 헛된 제사와 같습니다. 이스라엘 건국 초기 사울 왕이 사무엘 선지자의 말을 어기자 사무엘이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사무엘 선지자 이후부터 하나님을 향해서 드리는 합당한 제사의 기본 원칙이 되었습니다. 시편 기자(50:08~15), 이사야(01:11~17), 예레미야(06:20), 호세아(06:06), 미가(06:06~08), 예수님에 의해 계속 강조되었습니다(09:13, 12:07).

오고 가는 세대에게 외형의 의식(儀式)보다 내부의 순종 자세가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메시지입니다. 제사의 형식 보다는 마음 자세가 중요합니다(05:01, 06:06~08).

 

따라서 구약시대의 희생 제사 행위는 짐승을 잡아 피를 뿌리고 그 제물을 제단 위에서 태우는 그 자체가 핵심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 제사는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으로 인해 예배로 전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제사를 성전에서만 아니라 어디서든지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장소에 구애받지 않게 하셨습니다. 희생의 제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04:20~21).

 

롬 12:0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제사는 기본으로 죄 사함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짐승의 피로 드리는 구약시대의 제사는 완전한 속죄에는 이르게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모든 제사를 단번에 완성하는 속죄 제물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더 이상 복잡하게 제사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육신은 영혼을 담는 귀한 그릇입니다. 사람은 누구나가 가치 있는 일을 이루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이루고 싶다면 예배의 가치관을 잘 살리면 됩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다시 정리합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모이는 성도들의 모임터입니다. 고유의 목적은 예배입니다.

예배가 목적이 아닌 분은 교회에 나오는 목적이 세상 가치관울 구하려 함 아닐까요? 이런 분은 예배가 별 관심이 없습니다. 예배 시간이 지루해서 유체이탈(遺體離脫) 현상 일어납니다.

 

결과는 예배당 마당만 밟는 것과 같습니다. 구두만 닿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예배를 마치고 문을 나설 때 하나님께서 나로 인해 기뻐하셨는가? 나는 오늘 은혜를 받았는가를 돌아보십시오. 심령이 죽었으면 신령한 감각이 없어서 마당만 밟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3.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의 기도를 받지 않습니다.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성도 여러분 예배가 최고 목적입니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불쾌한 예배와 받으시는 산 제사의 예배를 구분합시다. 하나님께서 거부하시는 예배는 형식만 남아 있는 예배입니다.

형식만 있다면 죽은 예배 아닙니까? , 삶의 실천이 따르지 않는 죽은 예배 맞습니다. 이런 곳에 머무는 사람은 예배당에는 왔지만, 마음은 딴 곳에 가 있습니다. 마당만 밟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분은 신령한 복을 받는 일에는 탈락자입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이것 하나 잘 구분하십시오. 내가 예배드리는 현장에 있다고 꼭 합당한 예배를 드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이 그저 체면상 몸만 교회에 왔으면 진정한 예배자가 아닙니다. 예배당 바닥만 밟고 있을 뿐입니다. 13절 보겠습니다.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3절이 잘 이해됩니까? 무슨 뜻입니까? 좀 설명이 필요한 구절입니다.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를 놓고 생각해 봅시다. 기도의 가치는 응답에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이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하는 기도이었습니다.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손에 피가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손에 가득한 피는 살인의 피, 미움의 피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살인입니다(요일 03:15). 그런데 그들에게 살인이 가득한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겠습니까? 13절 때문에 기도 응답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유다 왕국 백성은 하나님께 제사와 예배를 드릴 때 향을 피웠습니다. 이 분향은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유다 왕국 백성이 회개하지 않고 중언부언하는 기도,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기도로 변질하였습니다. 어떤 모습인지 보겠습니다.

 

월삭(月朔 28:11) 즉 그달 초하루 예배와 안식일을 꼬박꼬박 지켰습니다. 매년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등의 굵직굵직한 절기도 잘 지켰습니다.

예배드리는 일에 열정으로 임했습니다. 이들을 외형으로만 보고 판단한다면 세상에서 예배를 제일 잘 드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의 제사를 놓고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제사에 바치는 분향을 가증히 여기신다고 하십니다(13). 거기다 14절을 보십시오.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유다 백성이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채 허공에 지르는 소리와 같은 기도만 드리니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13, 14절을 자세히 해석한 곳이 16, 17절입니다. 유다 백성이 제사와 예배는 열심히 드렸지만, 그 삶이 전혀 변화되지 않았음을 밝힙니다. 마음부터 먼저 바꾸는 회개가 선행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지난 주일에 교회에 왔고, 오늘도 왔고, 다음 주일에도 교회에 와야 합니다. 그런데 예배가 형식으로 굳어져 심령이 메마르지 않았습니까? 오늘 예배 마지막 축도를 받기까지 굳은 심령이 풀리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예배에 있습니다. 우리의 목적도 예배이어야 합니다. 예배는 삶의 일 순위입니다. 이후 순위는 잘 조정해서 다양한 삶을 가꾸십시오.

 

여러분은 오늘 교회에 왜 오셨습니까? 다른 목적이 있습니까? 그러면 오늘 예배에 참여하신 것은 구걸이나 다름없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받기 위해서 입니까? 그대로 되기를 축원합니다.

 

요즘 환경을 초특급 스피드 시대라고 합니다. 요즘 모든 것이 빨라지고 있습니다. 업무는 속전속결로 해야 합니다. 사람과의 만남도 빨라졌습니다.

그래서 잠깐 만나고 오는 것을 번개 미팅이라고 합니다. 밥 먹는 시간을 아끼려고 일회용 그릇에 담긴 냉동식품과 도시락을 편의점에서 먹습니다.

직장인 10명 중 8명은 항상 시간에 쫓기는 듯한 느낌의 시간 병 증세가 있다고 합니다.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에 계속 가속 페달을 밟습니다.

 

이런 모습이 교회 예배에도 적용합니다. 빨리 마쳐 달라는 무언의 요구를 보냅니다. 성도 여러분, 예배의 중심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우리는 예배를 구경하기 위해 온 관객이 아닙니다. 마당만 밟으려고 온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왔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삶의 가치관을 찾고 누리며 사는 것이 복입니다. 이제 마당만 밟고 갈 때가 아닙니다.

예배당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충성하며 삽시다. 공 예배는 예배의 한 부분이고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이 예배화 되는 일입니다. 함께 이런 삶을 찾아 누리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