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23년 말씀

사울에게 안수한 아나니아(행 09:10~19)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3. 8. 19.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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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다 보면 가끔은 동명이인(同名異人)으로 인해 혼동이 올 때가 있습니다. 어떤 혼동되는 인물이 떠오릅니까? 우선 야고보로서 열두 제자 가운데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그리고 예수님 형제 야고보입니다. 혼동을 주는 인물입니다(01:13).

또 유다도 야고보의 아들 유다(다대오)와 가룟유다와(06:14~16). 예수님의 동생 유다가 있습니다. 성경 기자는 혼선을 피하려고 지명이나 아버지를 붙여 구분합니다.

 

사도행전을 읽으면 혼선을 주는 세 사람이 나옵니다. 아나니아라는 인물입니다. 성경 지식이 좀 깊은 분은 잘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과 좀 거리를 두고 지내는 분은 아나니아라는 인물을 보면 혼동이 올 것입니다. 알듯 말듯 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그들의 행적을 확연히 구분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깊이 새기지 않는 이상, 이 사람인가 저 사람인가를 놓고 아리송할 때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세 사람 아나니아는 그 행적이 확연히 구분됩니다. 첫째 인물은 헌금 문제로 저주의 죽음을 맞은 삽비라의 남편 아나니아(05:01~05)입니다. 둘째 인물은 사울이 변화되는 과정에서 안내자 역할을 한 아나니아입니다.

셋째 인물은 대제사장 아나니아로서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한 사람입니다(23:02). 오늘 살펴볼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안수기도한 둘째 인물입니다.

아나니아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믿음의 행적을 남겼는지 그 삶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서 말씀 제목을 사울에게 안수한 아나니아로 정했습니다.

 

 

1. 다메섹 사람 아나니아를 만나보겠습니다.

 

10 그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때(δέ 데)에. 사울과 아나니아의 만남을 연결하는 접속사입니다. 사울의 변화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아나니아를 등장시키는 단어입니다. 10절을 보시면 아나니아를 소개하는 문구가 다메섹과 제자라는 두 단어입니다.

 

다메섹(Δαμασκός). 예루살렘에서 동북쪽 약 230km쯤에 있는 도시입니다. 삼 면이 산악으로 둘러싸인 해발 671m 고원 지대에 세워진 도시입니다.

이곳은 아브라함 때부터(14:15, 15:02) 다윗 시대(삼하 8:6)와 솔로몬 시대(왕상 11:24)까지 계속 43번이나 언급된 도시입니다(09:01). 다메섹은 오늘날 시리아의 수도로서 현존하는 도시 중 역사가 가장 오래된 도시로 일컬음을 받습니다.

 

제자(μαθητής 마데테스). 사도행전 09:02을 보면 이곳에 여러 회당이 나옵니다. 이는 유대인이 많이 거주한다는 증거입니다. A.D. 66년 로마 황제 네로의 박해 때 약 10,500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다고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37/38~100년경)는 말합니다.

 

이곳에 언제부터 기독교인이 있었습니까?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및 가이사랴 빌립보 지경에 다니시며 전도하실 때(15:21, 16:13) 믿은 사람이 다메섹으로 이주하였을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 때 예루살렘에서 믿고 고향 다메섹으로 돌아간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박해 때(08:01~03) 예루살렘으로부터 피신해온 기독교인과 그들에 의해 개종한 유대교 기독교인으로 추정됩니다.

 

제자(μαθητής 마데테스)가 있더니. 아나니아도 세 부류 중 한 기독교인으로 짐작됩니다. 본문의 정황을 보아 아나니아는 이미 믿는 자가 되어 있습니다. 제자란 열두 제자가 아닌 기독교인을 나타내는 여러 표현 중 하나입니다.

누가는 기독교인에 대하여 그 도를 따르는 사람(02), 제자(10), 성도(13),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14), 형제(17)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기독교인을 잡으러 올 때 다메섹에 살고 있던 제자입니다일부 성경학자는 아나니아를 예수님을 직접 따르던 열두 제자 외에 칠십 명 제자 중 한 사람으로 봅니다. 정황상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아나니아가 사울과 관계에서 보면 대단한 인물입니다. 놀라운 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기독교 역사에서 이 아나니아를 비중 있는 자리에 올려놓지 않았습니다. 초기 기독교 역사를 아름답게 수()놓은 사람인데도 파묻혀 있습니다

매우 가려진 일꾼입니다. 이 아나니아가 초대 기독교 시절 사울을 복음 전파의 선두에 내세우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알고 보면 아나니아는 잊혀진 영웅입니다. 훗날 바울은 자기의 복음 전파에 이바지한 여러 사람을 일일이 거론하며 알아주라고 권했습니다(16).

그러나 로마에 거하는 기독교인을 상대로 기록하였기에 아나니아와의 관계를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아나니아의 행적이 담긴 곳이 어디입니까?

 

사도행전입니다. 저자가 누구입니까? 누가입니다. 누가가 잊혀진 영웅을 기독교 역사 차원에서 더 깊게 터치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해 봅니다. 이 잊혀진 영웅을 오늘 말씀으로 만나 봅시다.

 

 

2. 아나니아는 주님 명령을 따라 사울에게 안수하였습니다.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예수님께서 아나니아에게 특별 명령을 하십니다. 사울에게 안수하라는 명령입니다(12). 아나니아와 사울과 사이가 안수기도해 줄 만큼 가까운 사이입니까? 아닙니다. 아나니아와 사울은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生面不知) 사이입니다.

한 가지 아는 것이 있다면, 아나니아가 사울에 대하여 들은 소문 정도입니다. 어떤 소문입니까? 기독교를 박해하고 믿는 성도를 체포하여 죽이려 한다는 소문입니다(13, 14).

 

아나니아는 그런 권한을 가진 악한 사람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그런데도 예수님께서 환상을 통해 아나니아에게 사울을 찾아가라 하십니다(15). 사울은 새롭게 태어난 복음의 일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한 부분을 보셔야 합니다.

 

주께서 환상(ὅραμα 호라마) 중에(10) 아나니아를 부르신 일입니다. 이 환상은 비전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환상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시의 한 방편입니다. 특정인이 환상을 볼 때는 세상일에 잠겨 있을 때가 아니라 깨어 있는 때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기도의 문이 열려 있을 때 경험하는 일입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시면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가 오후 3시 기도 시간에 환상을 봅니다.

 

욥바의 시몬의 집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라는 환상입니다. 베드로도 기도하는 가운데 고넬료를 만날 환상을 보고 고넬료의 가정에 복음을 전하러 갑니다.

아나니아는 주님께서 환상 중에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고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라고 화답합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만이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라고 화답할 수 있습니다.

 

창 22:01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삼상 03:0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심령이 무딘 사람,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비전이 보이지 않습니다. 환상이 임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악한 사람 사울을 양육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시키는 대로 찾아가서 안수만 하라는 명령입니다.

이미 사울도 변화되어 기도로 준비하고 있으니 주소대로 찾아가서 안수하면 된다는 명령입니다(11). 이 안수는 기도를 의미합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을 만나서 안수하며 말합니다. 그 첫 마디가 형제(ἀδελφός 아델포스) 사울아 입니다이 호칭을 통해 변화되기 전의 사울을 믿음의 가족으로 품는다는 뜻입니다. 내 마음으로는 품을 수 없지만, 주님께서 변화시켜 놓았으니 품는다는 뜻입니다.

 

가장 친근한 형제라는 이 호칭 속에는 사울의 모든 허물을 용서하고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는 선언입니다.

아나니아가 곁들여 말합니다. 형제 사울아 네가 다메섹으로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님께서 나를 너에게 보내어 지금 안수한다.

 

성령님으로 충만할지어다. 라는 선언입니다. 이 순간 사울이 과연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되었는지 누가는 직접 기록을 남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눈이 치료되고 세례받은 사실과 이후의 행적을 볼 때 성령님의 충만을 받은 것으로 봅니다.

주님의 말씀 앞에 순종이 중요합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가서 만나라고 하시니 찾아가서 만납니다.

 

사실 이 일이 매우 어렵습니다. 자기가 들은 사울에 대한 나쁜 소문과 선입관을 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결국 아나니아가 내려놓으니 모든 문제가 잘 풀리고 해결되었습니다. 그 증거가 행 09:20부터 사울의 변화된 역사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3. 아나니아는 이름처럼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행 22:12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아나니아가 기독교인 되기 전 정통 유대교에서 인정받으며 살았습니다. 율법의 기준을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인정은 유대인에게 받은 인정입니다.

경건한 사람이라는 말은 유대교의 정통신앙을 잘 지키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아나니아가 예수님을 만난 후 율법 정신을 믿음 정신으로 승화하였습니다.

 

따라서 아나니아는 사울이 다메섹에 온 이상 체포 1순위입니다. 그 증거가 아나니아가 주님과 기도의 창문을 통해서 사울의 속셈을 고한 일을 들 수 있습니다.

주님, 그 사람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에게 들은 바 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사는 주님의 성도들에게 많은 해를 끼쳤다고 합니다. 더구나 그는 대제사장에게서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갈 권한을 받아가지고 여기 와 있습니다(13, 14 공동번역).

 

아나니아는 예수님을 믿는 자를 잡으려고 온 사울의 속셈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런 사울이 변화되어 바울이 되었습니다(13:09).

1~3차 선교 여행을 마친 후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었을 때 일입니다. 바울은 과거 유대교를 특심으로 믿다가 기독교로 전향한 자기 모습을 간증합니다(22:01~16). 이 간증에서 바울은 자기가 기독교로 전향하기까지 핵심 역할을 한 아나니아를 소개합니다.

 

율법으로 말하면 이분은 경건한 사람입니다. 주위 모든 유대인에게 칭찬과 인정을 받는 사람입니다. 나는 이분에게 안수받았습니다. 라는 간증입니다.

바울의 회심에 핵심 역할을 한 아나니아를 보십시오. 유대교에서 경건하게 지킨 율법 정신을 따라 하나님과 소통하는 기도의 창문이 잘 열려 있는 사람입니다.

 

아나니아(Ἀνανίας).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 이런 의미입니다. 유대인 가정에 아이가 태어나면 특별한 사람(나실인) 아니면 부모님은 하나님의 감동과 당시 사회 환경을 따라 이름을 짓습니다. 이왕이면 좋은 이름을 지어줍니다.

아나니아를 낳은 부모님도 출생과정에서 하나님 은혜를 입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들이 영원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자라라는 마음으로 아나니아라 지은 것 같습니다. 부모님의 기대대로 아나니아는 은혜롭게 살았습니다.

 

언제 아나니아가 예수님을 만났는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기도의 창문이 열려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믿음의 내공이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 아나니아를 자기의 회심과 연결하여 소개합니다.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라는 뜻입니다.

 

아나니아는 믿음의 영향을 주위에 끼친 사람입니다. 다메섹 하면 아나니아를 생각할 정도로 믿음의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인물입니다.

이런 영향력은 깨어 있을 때 가능합니다. 믿음의 감각이 없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악한 영향력, 불신앙의 영향력을 끼칩니다. 성경에서 믿음의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 많이 나옵니다. 반면 아나니아는 행한 일에 비해 잊혀진 영웅으로 전해집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사람에게 잘 알려지지 않아도 주님의 일을 하는 데는 그다지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은 기도의 창문이 열려 있는 사람은 언제든지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는 주님께서 기도의 창문을 통해서 부르실 때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09:10).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자기 생각을 일절 내려놓았습니다다메섹 모든 유대인에게 인정과 칭찬을 받는 사람답게 주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내가 아무리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해도 주위 사람에게 칭찬과 인정받아야 합니다. 주위 사람의 인정과 칭찬이 없으면 그 믿음은 별 효과가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요즘은 백()세 인생이라는 말이 회자합니다. 그러나 이 백세를 채우지 못하고 떠나는 자가 더 많습니다. 젊은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떠나는 일도 있습니다. 나에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 것 같습니까? 잘 모릅니다. 언제 죽을지 역시 모릅니다.

죽음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내가 세상을 예고도 없이 갑자기 떠나게 되었을 때 가족이나 나를 아는 사람이 내 삶을 평가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 때가 되면 세상을 떠납니다. 여러분은 이대로 살다가 떠나도 미련이 없겠습니까?

떠나기 전 삶을 믿음으로 잘 정리해야 합니다. 후세의 사람이 나를 믿음으로 좋게 평가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후회 없는 삶이 되게 해야 합니다.

 

내가 삶을 마치고 떠났을 때 사울에게 안수하고 그 삶을 인도한 아나니아처럼 믿음의 평가 칭찬받을 수 있는 자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삶에서 끔찍한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무엇입니까? 첫째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입니다. 흉가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혼이 떠난 몸입니다. 싸늘한 시체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성령님이 떠난 그리스도인입니다. 신령한 능력과 은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자기의 모습을 돌아봅시다. 믿음으로 자기를 단장합시다. 비록 잊혀진 영웅이어도 좋습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으로 사람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오래도록 믿음으로 기억에 남는 사람은 아주 잘난 사람도 아닙니다. 멋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오직 믿음의 감동이 있는 사람입니다.

감동이 있는 사람은 작은 것 하나라도 이웃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베푸는 사람입니다. 내가 거하는 삶의 터전에서 아나니아처럼 예수님 사랑으로 행적을 남기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