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을 마주한 중국 국경지대를 다녀보면 재미있는 글자를 보게 됩니다. 곳곳에 설치돼 있는 선전 구호판 글자를 보면 웃음과 안타까움이 같이 나옵니다.
제일 처음에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 만세, 다음으로 21세기의 태양 김정일 장군 만세, 김정은 때 와서는 선군 조선의 태양 김정은 장군 만세입니다. 제가 중국 선교를 위하여 다닌 지 21년 정도 되었으니 김정일 때부터 설치된 글을 본 셈입니다.
현재 설치된 글자 규격은 하나의 크기가 가로 12~15m, 세로 17~20m 정도 됩니다. 느낌표를 포함하여 560여m에 달하는 초대형 선전 문구입니다.
김정은을 선군 조선의 태양으로 선전하는 것은 외국인에게 우리는 김정은 장군을 이렇게 찬양하며 그 지도력을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과연 김정은을 찬양한다고 그 사상을 닮게 될 것 같습니까?
아무리 폐쇄된 사회라 해도 그렇게 믿고 따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은 사람이나 물건을 찬양하는 그런 어리석은 생활을 하지는 않습니다.
대부분 사람은 인생 목적을 세상에 둡니다. 잠깐 지나는 세상을 아주 멋지게 아주 재미있게 아주 화려하게 살아보자는 마음에 둡니다.
그러나 우리 복을받는교회 가족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최고의 목적으로 설정하여야 합니다. 그런 삶이 복 중의 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일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그 가운데 중요한 일 하나가 하나님을 향한 찬양 생활입니다.
사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통해 찬양받으시기를 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마귀가 우리 마음에 우선으로 심어주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께 찬양하는 일을 훼방하는 일입니다.
찬양과 감사를 하지 못하도록 끝없이 탐욕스러운 마음을 심어줍니다. 우리의 마음과 입술이 열리지 않게 합니다. 찬양하는 것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은 찬양과 기도 생활을 교회 생활의 중심으로 삼았습니다. 오늘 말씀 주제도 찬양에 관한 일입니다. 따라서 말씀 제목을 「이제부터 열심히 찬양합시다.」로 정했습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의 무디어진 심령이 잘 열리기를 바랍니다.
1. 성령님의 감동이 있어야 즐거운 찬양이 나옵니다. |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명령 다음에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이는 성령님 충만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 충만한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찬양을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18절에서 성령님의 충만을 논하기 전 01장부터 계속 강조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고 진정한 구속을 체험하는 일입니다.
찬양할 수 있는 자격이 목소리가 좋아야 하고 노래를 잘해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여야 진정한 찬양이 나옵니다.
1세기의 성도들은 성도의 교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요소가 찬양이었습니다. 성경에 처음 나타난 찬양은 출애굽기 15장에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다 하나님의 은혜로 광야로 나와 마침내 홍해를 건넜습니다.
극적인 순간에 애굽의 군대를 따돌리고 비로소 참 자유인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은 감격의 찬양을 올렸습니다.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올렸습니다. 너무 감격해서 부르는 노래가 찬양입니다. 이 찬양은 세상뿐 아니라 천국에서도 계속될 노래입니다.
출 15:02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모두가 이제부터 뜨겁게 찬양하는 일을 우선으로 삼읍시다. 아름답게 찬양하는 일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목소리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사랑해서 부르는 모습이 좋습니다. 제가 삶을 마치고 천국에 들어가면 그때는 설교할 일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설교를 들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에만 구원받은 자들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할 일은 오직 찬양입니다.
계 14:03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그러나 세상을 사는 동안 성도가 성령님의 지배를 거절하여 그 은혜를 상실하면 마음속에서 찬양이 지워집니다. 입술에서 찬양도 끊어집니다.
찬양이 끊어지면 불행합니다. 성도가 죄를 지으면 구원을 상실합니까?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예정론에서 볼 때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범죄 할 때 잃는 것 중의 하나가 찬양의 즐거움입니다. 그런데 이 즐거움이 전혀 없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증거가 없는 것으로 보아도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죄를 지은 후 먼저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후 자기의 입술로 하나님을 다시 찬양할 수 있도록 입술을 열어 달라고 간구합니다.
시 51:15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성령님으로 충만하지 못하면 무엇을 잃어버립니까? 찬양을 잃어버립니다. 성령님께서 내 안에 내주하는 결과가 찬양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서 얼마나 찬양이 우러나는지 돌아보십시오.
2. 찬양을 어떤 형태로 할 수 있습니까? |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①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 시(ψαλμοις 프살모이스)는 구약성경의 시편뿐만 아니라 시편이 가지고 있던 정신과 그 형태를 간직한 일반 노래를 말합니다.
찬송(υμνοις 휨노이스)은 신이나 영웅을 찬양할 때 부르던 노래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당시 작성되기 시작한 삼위 하나님에 대한 영광송(doxology)을 말합니다(막 14:26).
신령한 노래들(ωδαις πνευματικαις 오다이스 프뉴마티카이스)은 세속의 노래와는 달리 성령님의 영감을 입고 부르는 찬송을 말합니다.
바울은 앞서 언급한 찬양을 세 개의 분사(分詞. 형용사의 기능을 가지는 동사의 不定形)를 사용하여 찬양하라고 권합니다. 세 가지 형태의 찬양입니다.
➀서로 화답하며(λαλέω 랄레오). 화답이란 성령님의 충만을 받은 신자가 서로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찬양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②마음으로(καρδία 카르디아). 소리를 내지 않더라도 마음으로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여 주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 19: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 되기를 원하나이다.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 되기를 원하네. ①생명(②소망)이 되신 주 ①반석(②능력)이 되신 주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 되기를 원하네.
③찬송하며(ψάλλω 프살로). 19절 마지막에 찬송하며 라는 문구는 making melody로서 헬라어에서 악기를 동반한 찬송을 말합니다.
우리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여러 악기를 사용하여 찬양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찬양을 맡은 자는 많은 시간과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시 150:03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04 소고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05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그 외의 형태로 춤을 들 수 있습니다. 춤은 주로 시편에 나타난 찬양 형태입니다. 다윗이 소고를 치며 춤도 추라고 명하였습니다(시 150:04).
당시의 제사 의식에서 춤이 순서의 한 부분을 차지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좋은 일이 있으면 상황에 따라 춤을 추었습니다.
그 예로 하나님의 법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서 석 달을 머물다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 일입니다.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고 심중에 다윗을 업신여긴 일이 있습니다(삼하 06:11~20).
삼하 06:20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사울의 딸 미갈은 신령한 감각이 없으므로 다윗을 함부로 평가하였습니다. 불신자 수준이었기에 왕이요 남편인 다윗의 마음을 비난하였습니다.
미갈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법궤에 대하여 무지하였습니다. 자기의 입술을 가볍게 놀렸습니다. 그 결과 자식을 두지 못한 삶으로 끝났습니다(삼하 06:23).
춤을 너무 세속의 관점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시편은 춤을 몸의 모든 부분을 사용하는 찬양의 도구로 소개하고 그대로 사용하라고 권합니다,
그 외에도 온몸으로 손바닥 치며 찬양하며, 무릎을 꿇고 찬양하며, 서서 찬양하며, 두 손 들고 찬양합니다. 반면 신령한 감각이 없는 춤은 경건을 해칠 수 있습니다. 이 사실 기억하여야 합니다.
3. 기도와 함께하는 찬양은 능력이 임합니다. |
행 16: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6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2023년 복을받는교회 표어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하는 교회입니다. 이 초청을 잘 감당하는 일은 먼저 우리의 입술에 불평은 잠그고 찬양을 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기 위해서입니다(엡 01:06).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양할 때 옥문이 열리고 심령의 문도 열렸습니다. 찬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응답이 임합니다(행 16:25~30).
26절에서 중요한 것은 「다」라고 하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오는 일입니다. 지금 이들을 막고 있던 모든 문이 열렸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감옥은 죄수의 탈출을 막기 위해 이중삼중 겹겹이 문을 달았습니다. 그런데 모든 문이 동시에 열렸습니다. 문만 열린 것이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들을 옭아매고 있던 모든 수갑과 차꼬도 풀렸습니다.
조니 에릭슨 타다(Joni Eareckson Tada 1949.10.15.)라는 믿음의 여신자가 한 분 있습니다. 미국 동부 볼티모어 근교 시골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17살 때인 1967년 어느 날 언니와 함께 승마를 마치고 메릴랜드의 체스피크 베이강(Chesapeake Bay Bridge)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만 조니(Joni)의 머리가 바위에 부딪혀 목이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전신마비 신세가 되었습니다. 조니는 시련을 감당할만한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지냈습니다.
한날은 갑자기 기도할 마음이 생겼습니다. 하나님, 내가 이런 몸이라도 쓰임 받을 수만 있으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찬양하며 살겠습니다.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다행히도 입술은 움직일 수 있게 되자 입술에 연필을 물고 그림 그리기를 훈련하였습니다. 오랜 시간 끝에 구족화가(口足畫家)로 인정받았고 그림도 알려졌습니다.
유명한 볼펜회사에서 조니에게 광고 모델을 제의해 왔습니다. 조니는 자기가 나오는 모든 광고 아래에 영어로 PTL이란 글자를 삽입하는 조건으로 출연했습니다.
PTL은 Praise the Lord 즉 주님을 찬양하라는 이니셜입니다. 조니는 복음 전도자로 장애인을 위한 인권운동가로 미국 사회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다른 종교와 확연히 다른 것은 하나님 영광을 높이는 찬양에 있습니다. 찬양은 모든 고난을 이겨내는 힘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괴로워할 때 찬양 대신 원망하게 하고 불평하게 하고 이간질하게 하고 탄식하게 합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어둠의 세력을 이기는 힘은 오직 찬양에서 나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실 때 찬양하며 가셨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기독교인은 찬양과 더불어 살아왔습니다. 핍박당하거나 순교할 때도 찬양합니다. 괴롭고 고통스러울 때도 찬양합니다.
기쁘고 형통한 날에도 찬양합니다. 찬양이 없는 기독교는 의미가 없습니다. 찬양으로 우리의 생활을 인도받고 나아가야 합니다.
구약시대도 신약시대도 찬양을 통해 하나님께서 크게 역사하신 일이 많이 나옵니다. 찬양으로 모든 문제를 풀어 갈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예시입니다.
여러분은 이것 하나는 기억하십시오. 찬양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산 자가 찬양하지 죽은 자는 찬양하지 못합니다. 거리가 멉니다. 여러분은 입술에 찬양이 붙어 있는지 돌아보십시오.
시 115:17 죽은 자들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로 내려가는 자들은 아무도 찬양하지 못하리로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오늘날 그리스도인과 1세기 초대교회 때 그리스도인을 비교하면 큰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 차이가 있는데 그중에 오늘 우리에게는 초대교회 때 그리스도인이 가졌던 구원의 은혜와 감격하는 찬양의 열정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만일 찬양에 대한 열정이 없다면 세상의 생명 없는 노래를 부르는 것과 무슨 차이점이 있겠습니까? 유행가는 부르면 부를수록 마음이 과거지향의 한숨으로 채워지기 쉽습니다. 그 노래대로 삶이 결정되는 때가 많습니다.
노랫말의 암시 효과에 의한 뇌파가 삶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낙엽따라 가버린 사람을 부른 차중락(1969) 가수는 그해 가을 낙엽 따라 떠나고 말았습니다.
돌아가는 삼각지를 부른 배호(1942~1971) 가수도 그 노래대로 돌아가 버렸고, 하얀 나비를 부른 김정호(1952~1985) 가수도 나비처럼 이승을 떠나버렸습니다.
찬양은 아무나 부르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찬송을 별 의미 없이 부르면 그냥 소리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찬양은 예수님 말씀이 내주한 결과에 따라 불려야 합니다. 말씀의 내주가 없으면 가르침도 권면도 찬양도 능력으로 나타나지 못합니다.
신자가 신령한 노래를 부르는 목적은 사람을 기쁘게 함이 아닙니다. 교회가 혹은 개인이 받은 은혜를 감사하여 하나님 앞에서 나타내 보이는 표현입니다. 이 찬양과 더불어 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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