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고난주간 동안 베다니에서 숙박하셨습니다(마 21:17). 평소에도 예루살렘에 오시면 이곳에서 숙박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 시장하셨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른 아침 퇴실하셨다는 뜻입니다. 숙박하셨으면 아침 정도는 간단히라도 드시고 나와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현대 호텔 제도가 아니라 무조식(無朝食)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까지 약 3km를 걸어가시면서 시장기를 면하기 위해 길가의 한 무화과나무 곁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향해 영원히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고(14) 선언하셨습니다. 그 결과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었습니다.
이 선언은 심판을 비유한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의 이적 가운데 이해하기 힘든 이적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인격체가 아닌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격체가 아닌 나무가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열매가 없으면 과수원 지기를 책망해야지 굳이 나무를 저주해야 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열매를 기대했지만 없으면 할 수 없는 겁니다. 다소 섭섭하겠지만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나무를 저주해서야 됩니까? 이런 의문점을 안고 있는 본문을 대하면서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지 그 의미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열심을 조금 내는 사람이라도 자기 관리 잘못하면 믿음의 열매가 맺히지 못하는 일을 비유합니다.
비유이니 말씀의 의미를 잘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믿음의 열매를 잘 맺습니까?」라는 제목을 정했습니다. 함께 은혜의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1. 예수님은 반드시 열매를 찾으십니다. |
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많은 사람의 환영을 받으시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다음 날 월요일 아침에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시간별로 정리하면 유월절 기간 중 예수님께서 하루를 베다니에서 주무셨습니다. 이른 아침 예루살렘으로 오시면서 시장하여 무화과 열매 먹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율법 정신에 의하면 길가의 무화과나무 열매는 길가는 나그네나 여행객이 주인의 허락 없이도 마음대로 따먹을 수 있도록 지정해 놓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포도나무는 포도원을 만들고 특별히 관리하지만, 무화과나무는 길가나 집 앞뜰이나 곳곳에 심어 놓고 이웃과 공유하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그다지 큰 이익 목적이 아닙니다. 주인도 따 먹고 또 길을 가는 사람의 허기를 면하기 위하여 사랑의 배려를 위한 열매로 통용되었습니다.
특히 지중해 연안 국가에서는 이 무화과 열매를 가난한 자들의 양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좀 특이한 내용이 나옵니다. 무화과의 때가 아닌데 예수님께서 무화과 열매를 구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좀 모순된 말씀처럼 여겨집니다.
이럴 때는 무화과나무 열매가 열리는 원리를 살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무화과 열매를 일 년에 3~4회 정도 수확할 수 있습니다.
다른 나라들보다 일조량이 많기 때문입니다. 일 년에 몇 번씩 수확할 수 있는 무화과나무이므로 유월절을 전후로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잎사귀가 많음은 열매도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13절을 잘 보십시오.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매우 애매한 문구입니다. 무화과의 때가 아니라는 단서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의 때가 아닌데 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말라 죽게 하였느냐 말입니다.
대단히 모순된 사건처럼 보입니다. 이 내용을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이때는 니산월(4월) 중간인 유월절 절기 때입니다.
이스라엘 지역은 3월이면 무화과나무에 먹을 수 있는 작은 열매가 서서히 열립니다. 이어 4월이 되면 얼마든지 먹을 만큼의 열매로 자랍니다.
이때 일찍 열린 3월의 푸른 열매는 지방의 소작농을 위한 일반 식물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으신 열매는 3월부터 맺힌 작은 열매입니다.
4월 중순이 되면 잎사귀가 푸르고 무성합니다. 당연히 3월의 열매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 3월의 열매 후에 4월부터 맺히는 열매는 5, 6월경에 본격적으로 수확합니다. 따라서 13절에서 무화과 때가 아니라는 말은 두 번째 열매 즉 4월의 열매 때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찾으신 열매는 4월의 열매가 아니라 3월의 열매입니다. 이스라엘의 대표 종교인은 바리새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지나치게 종교 생활을 강조한 나머지 그만 위선자의 모습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위선자의 삶을 사는 바리새인들을 혹독하게 책망하셨으며 심지어 독사의 자식들(마 03:07)이라는 표현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열매 없는 나무를 저주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시 생명력을 잃은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을 경고하는 예표입니다.
무화과나무가 시들어 죽은 사건은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예고편으로 보여 준 상징입니다. 잎은 푸르고 무성하나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는 하나님의 은총과 그들의 종교에 대한 외적인 열성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영적인 황폐와 빈핍을 상징합니다.
2. 열매를 맺지 못하면 버림을 받습니다. |
14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무화과나무는 단순한 관상용 나무가 아닙니다. 또 재목으로 쓰기 위해서 키우는 나무도 아닙니다. 높이 크고, 옆으로도 번지기는 해도 꽃이 아름다워서 향기를 발하는 나무도 아닙니다. 오직 열매만을 얻기 위해서 심고 키우는 나무입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열매를 맺지 못하면 무화과나무로서 목적을 상실한 것과 같습니다. 이런 나무는 잘라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나무에 다가가셨습니다. 그 나무의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려 함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 열매를 구하기 위함입니다.
열매가 없다고 다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저주하는 장면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합당한 열매가 없음에 대한 책망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일상의 열매는 때가 되어야 맺힙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 생활하면서 맺는 열매는 예수님께서 요구하실 때 언제든지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좀 더 나아가 이 사건은 외식에 사로잡힌 유대인들과 능력은 없이 형식만 가지고 있는 우리를 경고하는 말씀으로 보아야 합니다. 아멘입니까?
멀리서 보니 잎사귀는 무성하고 그 나무에 열매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가까이 가서 보니 열매가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주님 보실 때 열매 없는 잎만 무성한 믿음은 아닙니까?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멀리서 보면 그럴듯한 신앙인 같습니까? 그런데 가까이 와서 보니 신앙과는 상관이 없는 불신자 같지는 않습니까?
믿음의 열매 없는 자가 혹 내가 아니냐 말입니다. 잎사귀는 무성한데 열매가 없던 무화과나무는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상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의 종교의식은 대단히 발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영적 생활과 영적 생명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당시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겠습니다.
15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 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꾼이 뇌물을 주고받으며, 돈을 바꾸고, 갖은 음모와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모습을 보시고 의분을 가지셨습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굴로 만드느냐고 꾸짖으셨습니다. 장사꾼들을 모두 내어 쫓으시는 성전 청결 작업을 하셨습니다.
15절은 영의 생명력 없이 종교의 행위를 가장하여 돈벌이에만 급급한 외식 주의자들의 모습을 공격하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생명이 없으면 허상에 불과한 죽음이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열정으로 주님의 일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까? 그런데도 신령한 생명이 없는 자리에 있다면 그 일은 하나님과 상관없습니다.
나와 하나님과 만남이 없으면 역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영의 생명은 시들어 죽은 것과 같습니다. 외식하는 믿음은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습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은 사람을 보십시오. 찬송도 잘하고, 기도도 그럴듯하게 하고, 각종 행사에 잘 참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관계가 없습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습니다.
3. 믿음의 열매가 없으면 생명도 없습니다. |
20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하루의 일정을 끝내고 제자들을 데리고 다시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하룻밤을 주무시고 어제처럼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곳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저주받은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까지 말라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주를 통해서 신령한 의미를 전하려면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등 교권자들을 저주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왜 인격체가 아닌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까? 이 부분을 잘 보셔야 합니다. 하나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죽어야 할 죄인은 사람인데 짐승이 대신 죽는 구약시대의 제사 원리와 같습니다. 죽어야 할 사람은 나지만 예수님께서 대신 죽은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감람산 벳바게 동네에서 나귀 새끼를 가져다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습니다(마 21:01~09). 낮에는 예루살렘에서 성전 청결 작업과 속죄의 사역을 하시고 저녁이면 베다니 마을로 가서 숙박하셨습니다(마 21:17).
이 동네는 나사로가 사는 동네입니다. 우리는 10분 거리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 두 동네 이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벳바게와 베다니 모두 무화과라는 동네인데 그 의미가 조금은 다릅니다. 원문으로 그 의미를 살펴보고 신령한 면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벳바게(Βηθφαγή 베드파게). 히브리어로 집(בַּיִת 바이트 창 02:17)과 무화과의 첫 열매(פַּג 파그 아 02:13) 두 단어가 합쳐진 말입니다. 그래서 벳바게를 파게의 마을이라 합니다.
베다니(Βηθανία 베다니아). 히브리어로 집(בַּיִת 바이트 창 02:17)과 잘 익은 무화과나무(תְּאֵן 테에나 아 02:13)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베다니는 테에나의 마을이라 합니다.
예수님께서 찾으신 열매가 유월절을 전후로 맺히는 첫 열매 파게(φαγη)입니다. 이후 순차적으로 열리는 열매는 테에나라고 합니다.
그러면 첫 열매와 잘 익은 열매의 차이가 있습니까? 맛은 당연히 잘 익은 테에나가 좋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에게는 파게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의 기후는 여름인 건기와 겨울인 우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건기는 보통 유월절부터 시작됩니다.
이때 테에나를 비롯한 다양한 과일이 풍성히 맺힙니다. 반면 우기 기간 6개월은 열매가 맺히지 않으므로 생과일을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러다 우기가 지나면서 처음 먹을 수 있는 생과일이 바로 무화과의 첫 열매 파게입니다. 이스라엘에는 다섯 가지의 여름 열매가 있습니다. 무화과, 포도, 석류, 올리브, 대추야자입니다. 이 열매들은 약간의 시차를 두고 맺힙니다.
이스라엘의 여름 8월에 포도, 9월에 석류, 10월에 올리브, 11월에 대추야자 열매입니다. 그 후 12월부터 파게가 맺히는 4월까지 5개월 정도는 가난한 소작인은 여름 과일을 먹지 못합니다.
물론 부자들은 대추야자나 무화과 열매를 말려서 저장했다가 먹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유월절이 시작되는 4월경에 나오는 파게를 애타게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제대로 읽지 않아 떫은맛이 느껴져도 애타게 기다립니다 당도도 테에나와 비교하면 현저히 떨어집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은 긴 우기 끝에 찾아온 이 맛없는 파게를 사모합니다. 마음씨 좋은 농장주는 나그네에게 무상으로 따먹게 해 줍니다.
다시 예수님의 행적을 보겠습니다. 첫 열매인 파게의 동네 벳바게에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셔서 성전 청결 작업과 치료사역을 하셨습니다. 그 후 달콤한 열매 테에나의 동네 베다니로 가셔서 숙박하심으로 공생애를 마무리하십니다.
그러므로 파게가 없는 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은 바로 우리를 향한 경고입니다. 아직도 믿음의 열매가 없느냐는 책망의 메시지입니다. 이 마지막 기회를 놓치면 죽음이 온다는 선언입니다.
마03:10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성경에는 여러 열매에 대한 교훈이 나옵니다. 그 모든 열매의 교훈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합당하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열매를 우리는 잘 맺어가고 있습니까? 항상 자기에게 묻고 자기가 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화과나무가 열매가 없어 예수님으로부터 저주받아 죽었습니다. 이는 당시 생명력 없는 죽은 종교와 죽은 예배를 비유합니다. 바로 유대 교권자들을 향한 심판의 경고입니다.
성경에서 열매를 말할 때 여러분이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열매는 어떤 열매입니까? 과일나무에 맺히는 열매하고는 다른 성령님의 아홉 가지 열매입니다(갈 05:22, 23).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시는 것은 내 믿음의 인생에 신령한 열매가 있느냐입니다. 내가 믿음의 열매 신령한 열매를 맺지 못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무화과나무 열매를 맺지 못한 한 농부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의 각오를 다시 다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눅 13:0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07 포도원 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08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09 이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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