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열두 제자

⓬비극으로 막을 내린 제자 가룟 유다(마 26:14~25).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2. 11. 12.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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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한 철도 사업가가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종업원을 거느린 거대한 철도 왕국을 이룩했고 수천만 달러의 돈을 번 사람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눈앞에 둔 이 사업가가 아들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아, 너는 세상에서 가장 실패한 자의 손을 붙잡고 있구나. 그때 아들이 대답합니다.

아버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아버지가 실패자라니요. 아버지는 위대한 철도 왕국을 건설하셨고, 수많은 사람을 고용했으며, 수천만 달러를 벌었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실패자라니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자 사업가가 아들아. 절대 그렇지 않다. 이런 일을 하는 동안에 나는 예수님을 멀리 떠났다.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은 자는 모두 실패자야.

 

그의 말은 옳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인생을 산다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어리석은 자여 너는 실패한 자로라고 말씀하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2008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송년 주일입니다. 오늘은 열두 제자 중 마지막 제자 가룟유다를 강론하는 시간입니다.

그는 예수님 제자로 부름을 받아 삼 년 동안 화려한 믿음의 울타리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은(銀) 삼십에 팔고 자기의 곳으로 갔습니다(행 01:25). 출발은 좋았으나 마지막 그 삶이 불행 중 불행으로 끝났습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의 삶을 이렇게 평가하셨습니다.

 

24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마지막 삶을 마치는 그날 주님께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 라는 평가이겠습니까? 아니면 이 악하고 게으른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는(마 25:30) 평가이겠습니까?

우리 모두 마지막 그날을 내다보며 가룟유다와 같은 삶이 되지 않도록 자기 믿음을 다시 점검하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제목을 「불행으로 막을 내린 제자 가룟유다」로 정했습니다.

 

 

1. 가룟유다(Ἰσκαριώτης Ἰούδας)의 기초 이력서

 

요 06: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가룟유다에 대해 그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하여 제자가 되었는지 그 행적이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공관복음(共觀福音) 열두 제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나옵니다.

또 요한복음 12:06에 돈궤를 맡은 자로 나옵니다. 이런 내용을 근거로 신뢰받는 위치에 있던 자가 아니었겠는가? 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가장 큰 의문점을 지닌 사람으로 회자합니다왜 그렇습니까? 삼 년이나 따르며 섬기던 예수님을 노예 한 사람 가치(출 21:32)에 해당하는 은 삼십에 팔아넘겼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판 이 가룟유다의 명칭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유다는 매우 흔한 이름입니다.단순히 유다라고만 하면 어느 유다를 가르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출신 지명을 붙이기도 하고 아니면 아버지 이름을 붙이기도 합니다.

누구의 아들 이런 식으로 구분하는 셈이죠. 특히 아버지의 이름을 밝힘으로써 당사자에게는 칭송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참담한 모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유다 이름 앞에 가룟을 붙인 이유는 다른 선량한 유다와 구별하기 위함입니다.

 

➊가룟은(Ἰσκαριώτης) 이쉬+그리욧의 합성어로 로마의 관리들이나 로마에 협력한 유대인들을 암살하는 유대 혁명가 조직의 명칭입니다. 열심당원과 유사한 운동 단체로서 라틴어인 시카리우스의 음역(音譯)으로 봅니다.

➋가룟은 그리욧의 헬라어 형태로서 헤브론에서 수 마일 내려간 남방의 한 지명입니다. 수 15:24에 보면 유다 지파가 점령한 남방 지역 중 하나가 그리욧(가룟)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유다(Ἰούδας)는 그리욧 사람이란 뜻입니다.

➌가룟은 여리고의 사람(man of Jericho)을 뜻한다는 설입니다. 이런 설명은 헬라어와 와전(訛傳)을 근거로 한 설명입니다.

 

가룟유다(Ιούδας ο Ισκαριώτης). 유다의 아버지는 가룟 시몬입니다(요 06:71, 13:26). 유다는 찬양이란 의미로서 야곱의 넷째 아들입니다(창 29:35).안타까운 일은 이 좋은 이름을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판 이후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사회에서 짓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한 사람의 자취가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더러는 가룟유다에 대하여 믿다가 타락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믿다가 타락한 사람이 맞느냐? 말입니다. 사실 가룟유다는 잘 믿다가 타락한 사람이 아니라 처음부터 믿음의 자리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 증거를 보겠습니다.

 

요 06: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70 …한 사람은 마귀니라).

 

비록 삼 년 동안 주님의 지도를 받으며 또 제자들과 함께 어울리는 생활을 했지만, 그는 실제 종교의 환경에 동참했던 것뿐입니다.

겉보기에는 주위의 시선을 받을 만한 유력한 인물처럼 보였지만 그 내면의 세계에는 주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앙의 모습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요 12:06 절에 의하면 가룟유다가 돈궤를 맡은 자라고 소개합니다. 이는 그만큼 계산력과 상황 판단력이 뛰어났다는 말입니다.

가룟유다는 외적으로는 모두에게 신임받은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요 13:21, 22) 하셨을 때 제자들은 다 자기를 점검하였지, 가룟유다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겉 다르고 속 다른 위선자임을 알았다면 누가 감히 돈궤를 맡겼겠습니까? 우리는 가룟유다의 삶에 대한 결말을 알고 난 후에 그가 악한 자임을 압니다.

당시 상황에서는 간교함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신뢰받았습니다. 훗날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가룟유다에 대하여 그 정체를 알고는 도둑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2:06).

 

 

2. 가룟유다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

 

마 26: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가끔은 주변 사람 가운데 가룟유다에 대한 예찬론을 펴기도 합니다. 정말 인정할 만한 인물인지 마 26:24절 말씀으로 진단하겠습니다.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나님의 예정 된 일에 쓰였다고 인간의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예정된 대로 십자가의 죽음을 맞습니다

그러나 자유 의지를 따라 예수님을 판 자의 죄는 결코 면제될 수 없습니다. 가룟유다는 자기가 지은 죄로 인해 심판받았습니다.

그의 형벌은 예수님 말씀처럼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았을 뻔한 정도의 벌입니다. 가룟유다의 배신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모두 관계가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화가(οὐαι 우아이́) 있으리로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뻔한 정도의 화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 화는 영원한 멸망의 화, 지옥의 화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구원의 효력을 발생시키고 구속사가 성취되도록 합니다. 반면 인간의 책임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잘못에 대하여 자기가 책임져야 합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가룟유다의 불행한 앞날을 보시고 그 영혼을 안타깝게 여겨서 하신 말씀입니다. 배신자의 자리 보다 차라리 세상 빛을 보지 않는 것이 더 좋다는 뜻입니다.

 

이런 불행한 선언을 듣는 열한 제자가 얼마나 충격이 되었겠습니까? 그런데도 가룟유다는 자기의 마음에 들어 있는 배신을 실천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습니다(요 13:30).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가룟유다의 흔적을 거울삼고 나도 혹 그렇게 되어 가는 것은 아닌지 자기를 잘 살펴봅시다. 사람은 삶의 흔적을 남긴 후에 그 후속 결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김해삼일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에 대하여 때가 되면 다 알아서 평가해줍니다. 그리고 그 삶의 평가는 길이길이 전하여집니다.

사람의 평가보다 예수님의 평가가 중요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삶을 조심스럽게 관리하십시오. 많은 사람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잘 살아야 합니다.

 

 

3. 가룟유다가 왜 예수님을 팔았습니까?

 

요 12:0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먼저 가룟유다가 제자단에 선택된 이유부터 살펴보겠습니다. 24절에(막 14:21) 의하면 예수님은 이미 가룟유다가 자기를 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런데도 밤새워 기도하신 후(눅 06:12) 제자로 선택하셨습니다. 지상 교회에는 영원히 가룟유다와 같은 인물이 존재함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통해 자기 뜻을 이루어 가시되 악한 요소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심을 보여 주십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당시의 여러 상황을 토대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이유만으로 결론 내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①돈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가룟유다에 대하여 여러 성경 말씀을 대조해 보면 분명히 물질에 대한 탐욕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물질에 대하여 어떤 기준이 있습니까?

일상생활의 필요 수단으로 인정합니다. 그것이 사람에게 있어야 하되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인정합니다. 이럴 때 쓰는 문구가 다다익선(多多益善)입니다.

그러나 필요 수단이 목적 수단으로 바뀌면 그때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물질로 인해 믿음의 금이 갈 수 있고 낙심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딤전 0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가룟유다는 요 12:06에 의하면 돈궤를 맡은 자로서 언제부터인가 그 마음에 물욕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회계의 일을 맡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견물생심(見物生心)입니다.

외적으로는 의심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받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룟유다는 서서히 두 얼굴의 사람으로 변하여 갔습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두 얼굴을 가진 사람으로 변질해 갔습니다.

마음이 여기까지에 이르면 어떻게 됩니까? 사람이 물욕에 눈이 어두워지고 돈궤를 맡으면 거기 있는 것을 빼내어 가는 일을 하게 됩니다.

장부상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도록 만들어 놓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작은 욕심을 통제하지 못하면 그 삶이 예수님을 파는 자리에 이르고 맙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 가룟유다도 작은 탐욕이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파는 큰 탐욕으로 바뀌었습니다. 겉으로는 선행의 말을 하면서 말입니다.

 

요 12:0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유다가 말하되 0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도둑 심보를 감추려고 쓴 가면은 사람을 속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아주 길게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을 감동하여 기록하기를 가룟유다야말로 물욕에 빠져 돈을 사랑하는 자라고 밝힙니다. 가룟유다를 잘 보십시오.

처음부터 예수님을 팔거나 배반할 생각을 가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돈궤를 맡아서 관리하다 보니 작은 욕심이 학장 되어 결국 사망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약 0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②지방색의 갈등에서 오는 소외감 때문일 것입니다.

이 부분은 성경이 전하는 확실한 근거는 아닙니다. 다만 당시의 정치와 지연 학연 상황을 추측해 볼 때 그럴 수도 있다는 가상입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일곱 명 정도가 갈릴리 어부파이며 그들이 우세한 세력권을 형성하였습니다. 서열 4위까지를 봐도 짐작됩니다. 이 가운데 가룟유다는 남방 출신입니다.

갈릴리 출신은 자연스럽게 동질 의식이 형성되었습니다. 거기다 극성맞은 세베대의 아내 살로메는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까지 했습니다(마 20:20).

 

이런 일들은 서로 간에도 경쟁 심리를 가져왔고 이에 따라 가룟유다는 점점 열두 제자 중에서 소외되기 시작하였다고 봅니다. 사람은 소외되기 시작하면 전혀 예상치 않은 일을 벌이기 쉽습니다.

가룟유다 역시 이런 지방색에서 오는 소외감으로 인해 주님을 파는 일에 일정 부분 역할을 한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신앙인의 모임에는 지방색 운운하지 않아야 합니다. 혹 이런 일로 마음 상하는 일 생길까 염려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한 형제이기 때문입니다(복창).

 

1. 사랑하는 주님 앞에 형제자매 한자리에 크신 은혜 생각하여 즐거운 찬송 부르네. 내주 예수 본을 받아 모든 사람 내 몸같이 환난 근심 위로하고 진심으로 사랑하세.
2. 사랑하는 주님 앞에 온갖 충성 다 바쳐서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님만 힘써 섬기네. 우리 주님 거룩한 손 제자들의 발을 씻어 남 섬기는 종의 도를 몸소 행해 보이셨네.
3. 사랑하는 주님 예수 같은 주로 섬기나니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여 친구들이여 한 몸같이 친밀하고 마음조차 하나 되어 우리 주님 크신 뜻을 지성으로 준행하세.

 

③마음을 잘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요 13:0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가룟유다가 세상 생각에 사로잡혀 갈등할 때 마귀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접근하였습니다. 예수님을 팔아 버리는 것이 어떤가? 라는 제안입니다.

가룟유다가 가만히 있는데 마귀가 찾아왔습니까? 마귀가 들어와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가룟유다가 마음의 창을 열어놓음으로 마귀가 찾아왔습니다.

마귀가 좋아하는 마음을 혹 품었을지라도 이내 마음을 잘 정돈하면 됩니다. 그런데 가룟유다는 마귀가 주는 생각을 물리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배반해 버릴까? 팔아 버릴까? 하는 마음을 계속 유지하였습니다. 씨앗은 뿌려만 지면 싹이 나고 자라게 마련입니다. 이미 가룟유다의 마음에 뿌려진 생각의 씨앗은 죄의 열매를 서서히 맺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가룟유다는 그런 불행의 생각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어디 가룟유다뿐입니까? 우리도 믿음 생활하는 동안 부정의 생각이 우리의 마음을 수없이 드나들면서 불신앙의 함정을 계속 파 놓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를 파괴하는 생각을 저항하지 않고 버려둔 채 마음의 문을 열어놓으면 결국은 마귀가 온전히 자리를 잡습니다.

파멸의 길로 이끌어갑니다. 이 사실 꼭 기억하십시오. 요한복음 13장 02절 이후를 읽으면서 02절과 27절을 비교해 보면 아주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요 13:0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갔다는 말씀에서 조각은 만찬 석상에서 예수님이 이 떡을 받는 자가 나를 팔 것이라고 하실 때의 조각입니다.

이 떡 조각을 받은 순간은 가룟유다가 예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이때 가룟유다가 선생님, 제가 선생님을 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천하의 죄인입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고백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떡 조각을 받은 가룟유다의 마음은 오히려 강퍅하여 배신하려는 마음을 더욱 굳게 합니다.

 

마귀가 처음에는 가룟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면 어떨까? 라는 생각 정도의 씨앗만 뿌렸습니다. 그러자 가룟유다가 이 생각을 비우지 않고 간직하였습니다. 마침내 그 생각이 예수님을 파는 쪽으로 완전히 기울자 사탄이 그 마음을 점령해 버렸습니다. 

결국 마음이 마귀의 지배 아래서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진작 보셨기 때문에 가룟유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06: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자기의 생각을 어떻게 관리합니까? 내 생각은 얼마나 건강합니까? 내 마음에 뿌려지는 마귀의 생각을 제거하는 일에 실패합니까?

그러면 사탄에게 내 존재를 다 내어주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을 향해서는 마음 문을 굳게 닫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언제나 열린 창을 가지고 기도와 말씀으로 더불어 살아갑시다.

 

④예수님을 정치 메시아로 이해함으로써 오는 실망감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속량물로 주려 함이라(막 10:45)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으로서 이 떡을 먹는 자만이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이 말씀은 정말 어렵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며 무지함을 드러내었습니다(요 06:58~60). 그런데도 여러 부류 사람이 예수님께 모여들었습니다.

이유는 예수님께서 로마의 포악한 압제 아래서 이스라엘을 독립하고 배고픈 민중에게 굶주림을 해결해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정치(政治) 메시아로 활동을 기대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와 요한도 어머니를 통해 주님의 나라가 열릴 때 예수님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는 청탁이 있었습니다.

가룟유다 역시 주님 제자로 부름을 받기 전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독립시키기 위한 열심당 같은 계열에 속하였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을 정치 메시아로 알고 따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치 메시아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를 두 번이나 무산시켰습니다.

 

①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군중이 예수님을 옹위하여 왕으로 세우려는 중요한 기회에서 예수님은 혼자 산으로 피신하신(요 06:09) 일이 있습니다.

②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혁명가의 지지를 받아 용맹한 왕으로 부상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대로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가룟유다는 자신이 믿고 따랐던 예수님으로부터 더 이상의 정치 야망을 기대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 기대했던 그 마음이 미움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기대하고 따를 수 있는 분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결국, 가룟유다의 비극은 예수님을 그리스도가 아닌 세상의 어떤 목적을 위해 메시아가 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배신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세상 요소만 보고 주님을 따른 가룟유다는 한 번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호칭하고 고백한 적이 없습니다. 항상 예수님을 랍비로만 이해하였습니다.

 

가룟유다는 신령한 일에 눈이 감겨 있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도 내 마음에 품고 있는 세상 방법으로 예수님을 믿으려 하면 가룟유다의 길을 갈지 모릅니다.

가룟유다가 십자가 없는 영광의 예수님만 바라보았듯이 우리에게도 그런 신앙의 오류가 있습니다. 그럴 때 진리를 위해서 잘 수정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 세상의 것을 기대하고, 십자가 지는 것을 싫어한다면 가룟유다의 허물이 바로 나의 허물로 자리 잡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 생활에 익숙해지고 주님을 가까이하게 될수록 주님의 뜻을 잘 분별하여야 합니다. 그런 삶을 살지 못하면 예배당을 수없이 출입한다 해도 생명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은혜의 자리에 참여하고도 마지막에 제 갈 길로 떠나간 가룟유다, 그는 사람의 관점으로 볼 때는 영특하였습니다. 본이 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사도의 자리에 부름을 받고, 주님의 권능을 힘입어 병을 고치는 은사와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도 행하였습니다.

삼 년이나 주님과 동고동락하면서 거룩한 성찬에도 참여하였습니다. 그런데 천국을 향한 모든 좋은 자리 앞에까지 왔다가 그 자리를 박차고 떠났습니다. 우리 주변에 많은 사람이 충성의 현장에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상급을 차곡차곡 잘 쌓아 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도 자기의 뜻대로 잘되지 않는다고 교회 문을 박차고 나가는 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선 줄로 생각하거든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하였습니다. 주님을 떠나간 가룟유다의 길이 어찌 되었습니까?

화려한 삶을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은을 성소에 던져 놓고 물러가 스스로 목을 매었습니다(마 27:05).

이후 목을 맨 끈이 떨어져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나왔다고(행 01:18) 전합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결원된 제자 한 명을 선출하기 위하여 공동의회를 열면서 한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기억하고 계십니까? 이 가룟유다의 삶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행 01:25….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무슨 뜻입니까? 믿음의 자리에 들어오지 않고 자살을 택한 가룟유다는 지옥에 갔다는 말입니다. 그 외에 더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가룟유다가 택한 그 길이 처음에는 득의 하는 길처럼 보였으나 결국은 파멸의 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자기를 잘 돌아보고 믿음을 잘 세우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