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열두 제자

➒낙타의 무릎을 가진 제자 야고보(눅 06:12~16).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2. 11. 12. 04:13
728x90

9.9라는 별명과 10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의 관계에 있어서 9.9는 항상 10에 의해 무시당하면서 지냅니다. 사실 양자 간의 차이는 0.1이라는 아주 보잘것없는 수치입니다. 그러나 이 수치는 평생을 지내도 극복하지 못하는 수치입니다.

그래서 9.9는 날마다 속상해하며 기가 죽어지내다 어느 날부터 10에게 큰소리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야, 10 너 이제 나한테 죽었다 하면서 말입니다.

큰소리치는 9.9가 아무래도 뭔가 믿는 데가 있어서 그러는가 싶어 10이 물었습니다. 네가 나한테 큰소리치는 까닭이 뭐야 하니 9.9가 하는 말이 나 이제 점(.) 뺐다 하더랍니다. 이때부터 이 사람은 점뺀 사람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좋은 별명은 만들어 가는 겁니다. 좋은 별명 때문에 좋은 인생을 살 수도 있고 안 좋은 별명 때문에 불편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별명이란 그 사람의 인격과 삶을 나타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실 신앙인은 의미가 좋은 품격 있는 별명이 붙어야만 합니다. 

좋은 별명은 다른 사람이 내놓고 말하지만 안 좋은 별명은 주로 수군거릴 때 말합니다. 여러분은 상대방이 나의 별명을 어떻게 짓고 어떻게 평가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역사학자 유세비우스는(Eusebius)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小)에게 낙타의 무릎을 가진 사람이라고 별명을 붙였습니다. 늘 기도하면서 무릎을 꿇고 있다 보니 무릎이 낙타 모양처럼 되었기 때문입니다. 매우 품격 있는 별명입니다. 

야고보는 다른 제자들이 떠들며 아우성치고 있을 때 기도를 앞세우며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낙타의 무릎을 가진 야고보」라는 제목으로 강론하겠습니다.

 

 

1. 야고보(Ἰάκωβον)의 기초이력서

 

15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헬롯이라는 시몬과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름은 같으면서도 다른 사람이 여러 명 등장하기 때문에 이따금 혼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행 12:01에 주님의 제자 야고보가 죽었는데 행 15장에 보면 또 야고보가 등장하여 예루살렘 총회를 이끌어 가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실제는 이름만 같을 뿐 다른 사람입니다. 야고보라는 인물이 열두 제자 중에도 두 명이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이해를 돕고자 성경에 등장하는 세 야고보를 구분해 드리겠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열두 제자 가운데 예수님과 더불어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한 삼인방 중의 한 사람입니다. 헤롯 왕이 교회를 박해하면서 사도들을 제거하려 할 때 제일 먼저 죽은 열두 제자 중 최초의 순교자입니다(행 12:01).

 

②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예수님 당시는 믿지 않았으나 예수님의 부활 후 신앙의 세계에 들어온 사람입니다. 비로 늦게 믿었지만, 초대교회 시절 맹 비중 있는 일꾼으로 쓰임 받았습니다.

행 15장에 보면 율법에 관한 일, 즉 할례 문제로 논쟁하다 결론을 내리기 위하여 예루살렘 총회가 모였습니다. 이때 할례 문제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 위해 베드로가 발언하고 이어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의장 자격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행 15:13~21).

 

③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두 제자 중 일명 작은 야고보로 불립니다(막 15:40). 제자 서열로 보면 9번입니다(마 10:03). 제자 간에도 서열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앞서 열두 제자 설교하면서 제가 서열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마태복음 중심으로 서열 7번에 도마 서열 8번에 마태로 말씀드렸습니다. 반면 누가복음 06:15에는 제자 서열 7번에 마태 8번에 도마로 나옵니다. 마태가 자기를 낮춘 것 같습니다.

오늘 살펴보는 제자 서열 9위 야고보의 가족 관계는 어머니 마리아가 성모 마리아와 다른 동명이인(同名異人)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막 15:40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마 27:56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에게 별명이 하나 더 있다고 말씀드렸지요. 작은 야고보입니다. 아마 이런 별명을 붙인 것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보다 나이나 적거나 아니면 키가 작았기 때문 아니겠는가? 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야 성경에 굳이 작은 야고보라는 수식어를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다른 의도가 있어 작은 야고보라 불렀다면 이는 서로가 높고 낮음을 구별하는 행위입니다. 주님 뜻과는 상반됩니다. 그리고 야고보의 아버지 알패오는 글로바와 동일인입니다(요 19:25).

 

요 19: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마 27:56 그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정리하면 십자가 아래는 성모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작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글로바의 아내 요 19:25), 살로메(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마 27:56)가 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에게 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그 이름은 요세(요셉) 입니다(마 27:56). 이름은 나오나 그의 행적은 어떠한지 성경은 침묵합니다. 

이상 지금까지 살펴본 야고보는 키(나이)가 작은(?) 사람이며, 그의 어머니 이름은 마리아, 아버지는 글로바라고 하는 알패오이며 그의 형제는 요세라고 함을 알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을 만나기 전 야고보의 삶

 

막 03:18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작은 야고보는 그의 인적 사항을 볼 때 성경에서는 그다지 내세울 만한 행적이 없습니다. 유명한 말을 남기지도 않은 그저 평범한 사도단의 한 일원입니다. 그렇다고 실패한 경험이 있다거나 도마처럼 의심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무명의 인물처럼 조용하게 등장합니다.

또 어떤 특별 질문을 하였다거나 주님을 위해 어떤 용기 있는 일을 하였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러나 작은 야고보에 관해 초대교회 시절 여러 문서를 살펴보면 열심당원 중의 한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열심당(셀롯)은 제자 시몬에(눅 06:15) 관해 연구할 때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깊이 있게 다루지 않겠습니다. 열심당원은 로마의 지배 아래 있는 조국 이스라엘을 해방하기 위하여 민족 해방 운동을 하는 일종의 독립투사입니다.

 

이 열심당 출신으로 열두 제자 가운데 유다 다대오와 열심당 시몬과 가룟 유다가 있습니다. 이들은 독립운동을 하다 열두 제자단에 들어왔습니다.

열두 제자 명단을 보면 과거에 비슷한 일을 한 경력으로 인해 서로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다만 야고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후 열심당 사역을 포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사도단의 일원 중 시몬은 계속 셀롯인(눅 06:15, 행 01:13) 이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이는 자기 생각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당원으로서 끈을 유지하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작은 야고보 이 사람도 한때는 독립운동에 투신하며 살았습니다. 다만 열두 제자단에 들어온 후부터 자기 열망을 신앙 열망으로 바꾸었습니다.

야고보가 제자로 부름을 받은 후에는 시끄럽게 활동하지 않고 조용히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민족을 위해 일할 수 있다면 이 일도 매우 귀한 일입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민족을 위한 일에 관심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종종 기독교인이 애국심을 가질 때 빠지기 쉬운 오류가 하나 있습니다. 애국심이 곧 신앙이라고 착각하는 일입니다.

 

한 가지 우리가 구분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훌륭한 사람이 애국자가 되는 것과 그것이 반드시 기독교인이라는 동의어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기독교인은 애국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애국이라는 열심 때문에 성경이 가르치는 올바르고 순수한 신앙을 이탈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정치인 가운데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로 신앙이 변질해 가면서도 자기는 훌륭한 기독교인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주로 여의도에 사는 사람이 그렇습니다.

그들 가운데 교회에서 목사 장로 집사 직분을 가진 분도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정치 사안을 놓고 당에 예속하여 믿음 저버리는 행동을 보면 마음이 무겁습니다.

 

당의 명령을 관철한답시고 육탄 공격도 과감히 하고, 삭발도 더러 하며 심지어는 표 달라고 석탄일에는 조계사에 가서 합장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고도 애국심으로 행한다며 아름다운 신앙인으로 미화합니다. 그것은 정말 아니지요. 한 참 잘못된 일입니다.

그런 행동을 신앙으로 미화시켜 정당화하고 당사자는 믿음으로 행했다고 자부한다면 이 일이야말로 믿음에서 이탈한 불신앙의 일입니다.
애국이 무엇이며 믿음이 무엇이며 주님의 원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소리 없는 질서입니다. 구호만 시끄럽게 외치는 거리 주의자가 아닙니다.

 

고요한 혁명 이루는 것이 진정한 애국이요 신앙입니다. 작은 야고보도 한때는 과격주의자로 행동했습니다만 이제는 뒤에서 조용하게 주님의 뜻을 실천해 나가는 일꾼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은 조용한 변화가 필요합니다.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무엇보다 내 소리를 줄여야 합니다. 이런 일은 자기를 주님께 쳐서 복종시킬 때만이 가능합니다(고전 09:27).

 

 

3. 야고보의 죽음과 그의 생애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야고보는 순교하였습니다.

 

유세비우스는 계속 말하기를, 제자 중 예수님을 닮은 제자가 작은 야고보였으며 제일 미남이었다고 전합니다. 야고보는 시리아에 가서 전도하였고 다시금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전도하였습니다. 

이를 본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쳤습니다. 그래도 그의 목숨이 쉽게 끊어지지 않자 톱으로 켜서 죽였다고 합니다. 이때 야고보의 시신은 예루살렘에 묻혔다가 그 후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고 A, D 572년에는 로마로 옮겨졌습니다.

 

후일 기독교인은 야고보를 묘사할 때 그의 인생을 상징하기 위해 톱 그림을 그려 톱에 켜서 죽은 사람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김해삼일교회 가족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에는 여러 분야에서 일하여야 합니다. 큰 일꾼도 필요하지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일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그런 뜻에서 작은 야고보 이 사람은 말을 아꼈던 사람임에는 분명합니다. 만일 나서기를 좋아했다면 적어도 삼 년 동안에 기념될 만한 말을 제법 남겼을 것인데도 야고보의 기사 가운데는 그런 말이 한마디도 없습니다.

 

참견도 안 하고 떠들지도 않고 또 다른 제자들이 시끌벅적하게 떠들 때 계속 침묵만 하고 있었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의 눈에는 잘 안 보이는 일이지만, 교회에서 예배가 끝난 후 의자를 바르게 정돈하는 일부터 휴지 조각 하나라도 줍는 일, 껌 찌꺼기를 제거하는 일 등에 관심을 두십시오.
야고보에 대해 후세 사람은 훌륭한 애국자였으나 매우 훌륭한 기독교인이 되었고 자기 수양에 누구보다도 힘썼던 제자로서 열두 제자 중 기도를 가장 많이 한 제자였다고 전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지구상에서 사실은 별로 많은 것을 두고 있지 못한 작은 나라로서 제일 큰 것을 좋아하는 민족이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이름부터가 얼마나 거창합니까?

대한민국(大韓民國) 얼마나 크기에 붙여진 이름일까요? 또 미국이나 중국이라는 대국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한국은 얼마나 좁은 나라입니까? 대한민국은 어쩌면 너무나 작은 나라라는 열등감으로 인해 생각이라도 크게 해 보려고 해서 붙인 이름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또 기독교인처럼 大를 좋아하는 곳은 별로 없습니다. 대를 좋아하는 정서를 몇 가지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집회할 때 심령 대 부흥회, 허름한 작은 건물 3층의 임대교회에서 집회할 때도 전도 대 부흥회라는 현수막이 붙습니다. 예배 역시도 주일 오전 예배를 주일 대 예배로 칭합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 요소요소에 크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축소 지향의 일본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어령의 저술로서 일본이 어떻게 해서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는가 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 책의 내용은 작은 것의 힘으로 성취된 기적을 기록하였습니다. 작은 자동차, 작은 라디오, 작은 T. V, 작은 시계, 초미니 계산기 등 작은 것으로 세계 경제를 장악한 내용입니다.

 

작은 야고보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과 도전에 관한 메시지를 남깁니까? 그것은 우리도 조용하고 작은 사람이 되는 훈련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눈에 작게 보이는 것의 가치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겨자씨 비유를 보면 확연히 주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막 4:30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31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32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일한다는 말을 더러 합니다. 진정 주님을 위한 일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소리 없는 일, 작은 일입니다. 이런 일에 믿음의 에너지를 기울이며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