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열두 제자

⓫열심당 제자 시몬(눅 06:12~16).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2. 11. 12. 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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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지명을 소재로 한 유명한 영화가 있습니다. 마사다(사해 바다의 서남쪽 높은 언덕 위에 있음)라는 제목의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예수님 이후의 시기를 내용으로 설정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서 압제를 받다 결국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많은 유대인이 로마로 잡혀갑니다.

이스라엘은 국가의 존망 앞에서 세력 없음을 한탄합니다 그러다 마지막까지 로마의 군병과 싸우겠다고 결심하고 아직은 조금 남아있는 셀롯인 즉 열심당원은 마사다라는 높은 산까지 올라갑니다.

그곳에는 헤롯이 사용하던 별장 일부 시설이 남아 있고 당분간은 피난처로도 가능합니다. 또 비가 오면 빗물을 저장할 수 있는 암반 시설의 못도 있습니다.

메마른 사막의 산 위에 오른 이들은 로마에 항복하기를 거부하고 최후까지 싸우기로 결의합니다. 결과는 패배라는 기정사실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싸우려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호와를 믿는 선민의 자존심 때문입니다. 마사다에 모인 열심당원이 마지막까지 항쟁을 하나 더는 버틸 수 없는 처지에 이릅니다.

 

그러자 천여 명쯤 되는 열심당원이 결단을 내립니다. 로마 군병들이 마사다로 올라오기 전 치욕의 굴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여기고 집단 자결하였습니다.

로마에 끝까지 굽힐 수가 없다는 자존심의 절개를 고백한 셈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징집이 되면 군인이 되는 서약을 이곳 마사다에서 합니다. 마사다에는 관광용품 파는 곳이 있습니다. 그 물품 어느 것이든지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결코 마사다는 다시 함락되지 않을 것이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제자 시몬에 대한 수식어가 셀롯인(눅 06:15, 행 01:13)입니다. 이스라엘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열심당이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독립을 열망하는 제자 시몬의 이야기입니다. 그 누구보다 조국의 독립을 원했던 이 시몬이 누구입니까? 성경은 셀롯을 열심당으로 번역하여 소개합니다.

그래서 열두 제자 가운데 열한 번째 제자 시몬에 대하여 제목을 「열심당 제자 시몬」으로 정하고 말씀을 강론하겠습니다.

 

 

1. 시몬(Σίμων)이 소속하였던 셀롯의 성격

 

15 마태와 도마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셀롯이라 하는 시몬과

 

셀롯(Ζηλωτής)이라 하는 시몬과. 누가는 셀롯 시몬으로 기록한 데 비해 마태와 마가는 가나안인(Κανανίτης) 시몬으로 기록합니다(마 10:04, 막 03:18).

시몬은 구약시대 야곱의 둘째 아들 시므온의 단축형으로(창 29:33) 그 의미가 듣는다. 입니다. 여기 제자 시몬에게 붙는 셀롯과 가나안 두 용어는 어떤 뜻입니까?

그 뜻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열심당에 대해 살펴보려면 이스라엘 사회의 구약과 신약 사이의 약 400년 기간을 간단하게라도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으로 보면 한 장만 넘기면 되지만 이 기간은 매우 중요합니다. 세계사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기간에 형성된 문화가 있습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B.C. 356~B.C.323)으로 인해 일어난 오리엔트 문화와 당시 그리스 문화가 합쳐지면서 생겨난 헬라 문화 즉 헬레니즘입니다. 이런 문화 아래서 이스라엘에 새롭게 생성된 몇 분파가 있습니다.

 

첫째는 사두개파(Σαδδουκαῖος)입니다. 소위 의로움을 추구하는 지도계층 제사장들과 세습 귀족들 신흥 부자들이 주축이 된 일부의 권력층 통칭 용어입니다.

사두개파의 유래는 다윗 왕 때의 대제사장 사독에서 유래한 것으로 봅니다(왕상 02:35). 다윗은 사독을 제사장으로 임명하며 성전 관리하는 일은 그 후손이 맡았습니다. 이후 하스몬 왕가의 맛다디아 유다 요나단 및 시므온(B.C.168~134)이 사두개파 원조입니다.

 

이를 근거로 B.C. 160년경 일부 제사장이 사독의 후손임을 자처하며 당파를 만들었는데 바로 사두개파입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공회 산헤드린을 장악하였으며 공회 의장인 대제사장은 율법에 관한 자치권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사두개인은 육신의 부활과 사후 심판,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리스도(메시아)의 오심에 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기록된 성경만 인정했으며 모세오경 외의 글이나 구전을 통해 내려오던 장로들 율법을 거부하였습니다.

자연스레 초자연 이적을 부인하는 종교 합리주의를 지향하였습니다. 이들의 관심은 그들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자기들 권력에 혹 도전이 된다면 그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또한 현실 정치에 집중하다 보니 자연스레 그리스 문화인 헬레니즘과 타협하였고 정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헤롯 왕궁이나 로마에서 파견된 집정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둘째는 바리새파(Φαρισαῖος)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연구하는 서기관들, 예루살렘 성전 제사에 소외된 하급 제사장들, 율법에 따라 살기를 다짐하는 중산층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주로 예루살렘 성전보다 회당을 중심지로 삼았습니다. 이 회당에서 공부와 기도 율법을 읽고 토론하며 해석하는 일을 종교의식으로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또한 사두개인들 정신과 헬레니즘과 로마 문화가 융합된 이방 문화와 분리되어 살기를 고수하였습니다. 고유의 전통과 여호와 신앙을 고수하겠다는 일념입니다.

 

B.C. 165~160년경 등장한 바리새파 인원이 약 6천 명 정도 되었습니다. 이들은 당시의 헬레니즘 문화를 배격하고 모세 율법과 구전 율법을 인정하였습니다.

B.C. 135년경 마카비 전쟁 이후로 유대교에서 가장 강력한 당파로 발전하였습니다. 이들이 반드시 지킨 율법 조항이 613개입니다. 248개는 하라는 긍정(肯定) 조항이며 365개는 하지 말라는 부정(否定) 조항입니다. 이런 것에 첨가되어 많은 율법적 명령이 추가되었는데 이러한 원칙은 아무도 깨뜨릴 수 없는 조항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안식일에 관련된 조항만 해도 39개나 됩니다. 비록 사두개인들이 로마의 권력 비호 아래 정치권력을 유지하였지만, 일반 백성들 사이에선 그다지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를 실제 지배한 것은 엄격한 금욕주의를 지향한 바리새파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절기에 성전 예법이나 정결법 등과 같은 율법해석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의견이 다를 때 바리새인의 관점을 따랐습니다.

 

셋째는 에세네파(Ἐσσηνοί)입니다. 이 명칭은 경건과 거룩함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특별히 거룩하다고 여기지 않았지만 대신 메시아가 이스라엘에 오실 때 우리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신비한 진리의 수호자다. 라고 불렀습니다.

1세기 무렵에 사해(死海) 주변에 종교 공동체를 이루었는데 이들은 B.C. 103년부터 A.D. 70년경까지 광야에서 고립되어 생활하였습니다.

스스로 구별된 자로 자처한 바리새인들이 율법에 대해 철저하지 못함을 비판하였습니다. 그리고 에세네파들은 광야로 은둔생활을 하면서 사실상 세상으로부터 도피한 종파였습니다.

 

1896년경 카이로 회당에서 발견된 메시아의 길을 예비할 선과 악 사이의 최후 싸움을 묘사하고 있는 사독 문서가 발견되었습니다. 대부분 학자가 이 문서를 에세네파의 기록물로 봅니다. 이들은 이런 유형의 정보를 적절한 시기까지 서로 비밀로 간직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지혜로운 사람 혹은 다니엘서에 기록된 것처럼 혼란기에 유대인을 인도할 자들로 믿는 자부심을 품었습니다. 

에세네파 사람들은 광야 지역 쿰란에서 공동체(Qumran community)를 이루어 살았습니다. 세속과 철저한 단절 속에서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또 다른 에세네파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에서도 살았습니다. 이들 공동체는 구약성경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자 했지만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에서 드려지는 희생 제사는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고유한 정결 의식을 행하였으며 태양력을 사용하는 절기를 제정하기도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에세네파 중의 한 사람으로 추정됩니다.

 

넷째는 셀롯 열심당(Ζηλωτής)입니다. 이 열심당의 기원은 신구약 중간 시대에 해당하는 B.C. 167년경 구국운동을 하는 마카비 형제를 중심으로 뭉쳐진 단체에서부터 유래합니다.

헬라어 용어인 셀롯인은 열광하다, 열심을 내다 뜻의 아람어 가나안(Κανανίτης)에서 유래한 형용사 용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나안을 거의 지명으로 오해하였습니다.

마태와 마가가 기록한 가나안인 시몬을 한글로만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지방 출신의 시몬 이런 식이지요. 셀롯과  가나안은 같은 단체 이름입니다. 시몬에 셀롯이나, 가나안 이런 수식어를 붙인 것은 극단주의 집단 열심당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이 열심당은 이스라엘을 무력으로 침략하는 국가의 주요 요인을 암살하며 또 이스라엘의 독립이나 자주성을 방해하는 사람 제거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런 극단주의의 노선은 같은 민족이라도 로마에 친숙한 경향을 보이면 과감하게 제거하였는데 주된 표적이 헤롯 당원이었습니다. 당파라기보다는 테러 단체 수준입니다.

그러나 이 단체가 당과 같은 완전 모임으로 등장한 시기는 가다라 출신 유다(행 05:37)가 구레뇨 총독의 국세 조사에 저항하기(A.D. 6) 위해 조직한 때부터입니다.

B.C. 63년 로마의 폼페이 장군이 팔레스타인 지방을 침공함으로써 유대인의 소원이던 이스라엘 회복의 소망을 여지없이 파괴하였습니다.

이때 어떤 집단이 유대인은 로마군을 대항하여 침략군을 격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일어난 열심당은 로마에 대항하는 선동대가 되었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열심당 지도자는 갈릴리 사람 유다입니다(행 05:37).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내린 칙령을 따라 모든 유대인에게 호적을 명하였습니다

이때 갈릴리 사람 유다가 로마에 반항하여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그의 추종자들은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의 세력에 의해 지배당한다는 사실에 격분하였기 때문입니다.

A.D. 1세기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것이 로마 제국에 대한 투쟁의 시작으로 보았습니다. 이런 유의 항쟁은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더불어 종식되었습니다.

 

벨릭스가 유대 총독으로 재임하는 동안(A.D. 52~60) 열심당은 단검을 가진 시카리우스(Ἰσκαριώτης) 라는 단체로 급진 진보주의 집단을 형성하였습니다.

시카리우스는 축제 동안에 군중 틈에 섞여 있다가 그들의 품속에 숨긴 단검으로 로마를 지지하는 사람을 유대인의 반역자라 간주하여 암살하는 일을 벌였습니다.

이들은 죽음을 가볍게 여겼고, 친척이나 친구를 죽이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순교의 현장에서도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주님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섬겼으며 우상의 요소들은 전혀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열심당에 가입하려면 불타는 격정과 절대 헌신의 결단이 있어야 하며 이런 결단에 조금이라도 모자라면 가입이 거부됩니다.

 

왜냐하면, 이 단체는 비밀 결사대로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것을 목표로 투철한 헌신과 열정을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몬이 열심당의 일원이라는 사실은 그의 배경과 성격과 기질이 어느 정도인지 다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들 단체는 배교자가 나오면 날카로운 검으로 죽였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에도 특별한 열심을 가졌습니다. 이들은 십계명 중 제1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고집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뿐만 아니라 동족끼리도 율법을 훼방하거나건 계명을 범하는 자를 만나면 율법 수호 차원에서 공격하였습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그 어떤 신도 섬길 수 없고 그 어떤 외부인도 이스라엘을 통치할 수 없다는 믿음의 소신이 과격단체로 만들었습니다.

특히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일은 로마의 통치를 인정하는 일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께 대한 배신과 우상숭배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열심당은 이교도와 유대 범법자들 그리고 세리들을 처단하는 일에는 폭력과 무력을 서슴없이 사용하였는데 이런 일을 애국이라고 여겼습니다.

 

 

2. 제자로 부름을 받은 후 시몬의 모습

 

행 01:0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사도로 부름을 받은 제자 다수가 삼 년 동안에 주님과 나눈 대화들이 복음서에 소개됩니다. 그런데 셀롯 시몬에 대해서는 공개된 기록이 없습니다.

셀롯이라는 출신 성분으로 보아 최소한 제자들끼리 다투었다는 기록이라도 나올 법합니다. 그런데 그런 말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야고보와 요한, 가룟 유다 등이 제각기 시기하고 다투었으며 재정 문제로 논란했다는 말은 몇 차례 나옵니다.

 

시몬이 성경에 전혀 나오지 않고 있음을 놓고 성경학자들이 시몬에 대하여 이런 별명을 붙였습니다. 성경에 한 번도 안 나타나는 제자. 주님 앞에서 조용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열심당 출신인 만큼 다른 제자와 관계에서 충분히 격한 감정으로 다투었을 법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입이 매우 무거운 사람인 것 같습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까?

성경은 침묵하지만 그래도 시몬이 어느 부분에서 한 번쯤은 한 말이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의 행한 일이 있는지를 한번 추적해 보겠습니다.

 

복음서 외 제자들 행적은 주로 사도행전 전반부(01~12장)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특히 01장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01장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까지 예수님의 행적에 대한 여러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제자들 행적에 대해 이름을 소상히 밝힙니다. 그런데 행 01:06에서 예수님께 이스라엘의 독립에 관한 질문을 한 제자 이름은 무명으로 처리해 놓았습니다. 

 

행 01:0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니.


매우 감각 있는 질문자가 누구인지 무척 궁금합니다. 일단 여기에서 제자들의 전직과 심리상태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합법으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열심당 계열 출신이 4명이나 됩니다.

작은 야고보, 유다 다대오, 시몬, 가롯 유다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못다 이룬 민족 해방의 꿈을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줄 믿고 제자단에 가입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정치 메시아 왕국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이때 그들의 심정이 얼마나 허탈했겠습니까?

이에 실망한 제자들 모두 무너진 허탈감으로 옛 직업을 따라 흩어졌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에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모였습니다.

 

신앙의 전열을 가다듬으며 이제는 주님께서 정치 메시아로서 곧 이스라엘을 해방하는 극적인 선포를 기대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모였을 때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01:04). 그때 제자 가운데 하나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까?

 

여기서 사도행전에 기록된 제자들의 명단을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 빌립, 도마, 바돌로매,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등 열한 명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습니다(행 01:13).

이 모임에 다른 제자들은 몰라도 열심당 출신 시몬이 참여한 것은 의외의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세상의 모든 꿈이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다시 옛 가나안인 생활로 돌아가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집중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시몬이 이 자리에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옛꿈을 다시 실현하기 위한 기회로 알고 참여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 사도행전 01:04의 주님 말씀에 대한 06절의 질문자는 아무래도 출신 성분과 성격상 시몬 외에 다른 사람이 있겠습니까?

만일 시몬이 아닌 다른 제자가 이런 질문을 했다면 사도행전 저자 누가가 굳이 무명으로 처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06절 질문자가 시몬이기에 생각이 깊은 누가는 열심당 출신 시몬의 활동과 혹 있을지도 모를 앞날의 신변 보호를 위해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근거로는 사도행전을 받는 수신자가 데오빌로라는 로마에서도 유력한 신분을 지닌 인사입니다(눅 01:03, 행 01:01). 이 사도행전이 이방인 데오빌로에게 보내어졌는데 만일 신앙인이 아닌 로마인에게 읽힌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그래서 누가는 가나안인 시몬의 신변에 아무래도 위협이 따를 가능성이 있으므로 무명으로 처리한 것 같은 뉘앙스를 받게 됩니다.

 

3. 예수님을 만난 이후 시몬의 생애

 

ἰχθύς. Ἰησοῦς Χριστὸς Θεοῦ Υἱὸς Σωτήρ

 

셀롯인 시몬, 가나안인 시몬 그가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성경은 일절 침묵합니다. 공적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주후 1세기 이후에 열두 제자들의 행적이 전해지는 문서에 의하면 아주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제자들마다 특성을 따른 그림입니다.

특별히 가나안인 시몬에 대해서는 성경 위에 물고기를 그려 놓고 그 옆에 시몬이 서 있는 모습으로 묘사합니다. 물고기는 초대교회의 시절 그리스도인임을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오순절 성령님 강림 사건 이후 어떤 제자보다도 이 시몬이 복음 전하는 일에 그의 생애를 열정으로 바쳤다는 증거를 이 그림으로 확인합니다.

오늘날에도 복음을 전하는 일을 묘사할 때 이 물고기를 상징으로 표현하는 경우를 볼 수 있으며 자동차에도 이 물고기(ἰχθύς. Ἰησοῦς Χριστὸς Θεοῦ Υἱὸς Σωτήρ)를 붙이고 다닙니다.


셀롯인 시몬, 그가 주님의 부름을 받기 전에는 자신의 열정으로 이스라엘이 독립되기를 원했지만, 오순절 날 성령강림 사건 이후부터 세상을 살아가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은혜를 받으니 달라지더라 이 말입니다. 자기가 꿈꾸며 쟁취하려던 이스라엘의 독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 즉 영혼 구원을 위한 생각이 더 중요함을 깨달았습니다.
자기 가슴에 품은 뜻보다 주님께서 자기를 통하여 이루어 나가는 일이야말로 주님의 가장 기뻐하시는 뜻임을 알고 삶의 축을 복음의 나라로 옮겼습니다.

세상을 복음의 눈으로 보니 이전에 알지 못했던 사랑의 마음이 싹텄습니다. 그 예를 제자 중 마태와 관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세리 마태와 셀롯 시몬, 이들 두 사람이 정말 공존할 수 있는 관계입니까? 전혀 아닙니다.

 

마태는 세리로 로마 제국에 팔린 사람이고 시몬은 로마를 증오하는 사람이며, 시몬은 열렬한 애국자임에 비해 마태는 로마주의의 매국노입니다.
이 두 제자는 서로 다른 여건에서 만났기 때문에 분명히 마태는 시몬이 속해 있는 셀롯인의 암살대상자 명단 즉 블랙리스트 상위에 자리 잡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건설을 위해 두 사람은 자신의 모든 문제를 내려놓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 뜻을 함께 모았습니다. 주님의 복음은 깊은 불화를 치유할 능력이며 시몬과 마태의 회복된 관계를 통해서 그 복음의 화해 능력이 증명되었습니다.
가나안인 시몬이 한 때는 민족에 대한 대단한 열정이 끓어오르는 삶을 살았지만, 예수님을 메시아로 깨닫고 난 후에는 그 끓어오르는 열정을 하나님의 나라 건설에 바쳤습니다.


계속 전해오는 문서에 의하면 시몬은 소아시아에서 전도하였고, 그 후에 북아프리카의 이집트에서 전도를 많이 하였고, 그다음에는 흑해 지역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였고, 나중에는 영국의 런던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고 합니다. 역사상 지난 세기 세계로 복음이 전파되는 일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나라가 어느 나라입니까?

영국입니다. 바로 이 영국인의 가슴에 복음의 불을 붙였던 자가 시몬입니다. 그 후 시몬은 영국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발걸음을 페르시아의 수아닐로 옮겨 복음을 전하다 폭도들의 습격을 받고 잡혀서 마침내 톱으로 켜는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셀롯인 혹 가나안인 이 단어 속에서 조국의 독립을 열심히 부르짖던 열광의 시몬이 떠오릅니까? 이스라엘 민족의 전통과 종교를 강력히 지지하던 국수주의(國粹主義) 정치 단체인 셀롯 소속의 시몬, 그는 자기의 야망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켰습니다.

우리에게도 시몬과 같은 변화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열심당 시몬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 그리고 제자로 삼아라.

생각이 다르고 이데올로기가 달라도 사랑하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자입니다. 그분의 인도를 따라 복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