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 1828.9.9.~1910.11.20.)가 한 날은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에게 적은 돈이라도 주고 싶어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으나 그날따라 돈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 걸인(乞人)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여, 내가 오늘따라 가진 돈이 없소. 정말 미안하오. 그러자 걸인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합니다. 선생님 돈이 문제입니까? 저는 선생님으로부터 훨씬 더 값진 것을 받았습니다. 방금 저를 형제라고 불러 주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는 동안 물질도 중요합니다만 더 귀한 것이 있습니다. 상대를 인정해 주면서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입니다.
사람은 상대에게 인정받을 때 가장 행복을 느낍니다. 행복은 물질의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자기 욕망을 내려놓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오늘 말씀은 물질의 여유를 가지고 사는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은 신령한 목마름을 채우지 못해 깊은 한숨을 계속 짓는 것 같습니다. 성경은 이 사람의 이름을 알패오의 아들(막 02:14) 레위로(눅 05:27) 소개합니다. 다만 본서의 저자는 레위라는 이름 대신 예수님께서 새롭게 주신 마태로 소개합니다.
본명은 레위(Levi)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열두 제자의 반열에 참여하면서 마태(하나님의 선물)라는 이름으로 생활하였습니다.
대부분 성도가 세리 마태, 이렇게 기억합니다. 저는 이 사람을 설교 편의상 마태(Matthew)로 통칭하면서 「말씀에 인생을 건 세리 마태」라는 제목으로 강론하겠습니다.
1. 마태(Μαθθαῖος)의 기초 이력서 |
09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Μαθθαῖος)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눅 05:27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Λευΐ́ς)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주소. 예수님께서 가장 많이 활동하신 가버나움인 것 같습니다. 이곳에는 나사렛에서 선교 사역을 위하여 오신 예수님의 집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곳 가버나움은 복음을 가장 받아들이지 않는 완악한 지역 중의 하나입니다(마 11:23~24).
마 11: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학력. 직업이 세리입니다. 직업을 보아 레위도 랍비 교육을 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저 기본 교육 정도는 받는 것으로 짐작됩니다.
전통 유대인의 회당교육 방법 때문입니다. 교육 외 레위는 순발력이 매우 뛰어나 보입니다. 세리라는 직업이 상당한 언어 구사와 계산력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가족 관계.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자세히 소개되지 않습니다. 가족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성경은 속량(贖良)에 관한 일을 중심으로 다루기 때문입니다.
위인전기처럼 인적 사항을 나열하는 책이 아니란 뜻입니다. 다만 부친의 이름이 나옵니다. 당시에 흔하게 불리던 알패오입니다(Ἀλφαῖος 막 02:14).
레위는 유대식 이름입니다. 이 레위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 후 새로운 이름을 받았습니다. 그 새 이름이 마태입니다(마 09:09).
여러분은 레위 하면 어떤 생각이 스쳐 갑니까? 야곱이 첫째 아내 레아를 통해 낳은 셋째 아들(창 29:34, 35:23)이 떠 오를 것입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레아가 이 아들로 말미암아 남편과 연합되기를 원하는 뜻이 담긴 이름입니다.
연합된 자 이런 뜻입니다. 이 사람의 이름을 보아 아들에 대한 부모의 기대감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기대는 성전에서 봉사의 일을 하면서 경건하게 사는 삶입니다. 레위라는 이름까지 지어 주면서 기대한 이름입니다.
그런데 레위가 그만 세리 직업을 택했습니다. 신앙 양심을 억누르면서 말입니다. 세리가 되기 전에는 레위도 남들처럼 세리를 손가락질까지 했지만, 이제는 자기가 그렇게 욕을 먹는 위치입니다. 이쯤 되면 가까운 친구들도 멀어졌겠지요? 동족의 피를 빠는 매국노 처지가 되었습니다.
2. 마태는 주님의 부름에 즉각 응합니다. |
09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눅 05:28).
레위 마태는 이름과 달리 세리로 가버나움 세관에서 근무할 때입니다. 마침 예수님께서 그 세관 앞을 지나시다 레위를 보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을 들은 레위가 즉각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과거 생활과 단절하는 행동입니다. 현재 생활과도 단절입니다.
새롭게 펼쳐질 미래는 예수님과 함께하겠다는 결단입니다. 세관에서의 부정부패보다 영광스러운 천국 일꾼의 자리가 귀한 줄 알았습니다. 마태는 탁월한 선택을 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마태가 선생님, 말씀은 잘 알겠지만, 제게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가족과 한번 상의해 보겠습니다. 하고 말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복된 열두 제자의 자리에 이르지 못했겠지요? 마태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르시는 복된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오지 않을 줄을 알았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이 최고인 줄 알았습니다(눅 05:28). 주님께서 부르시는 말씀이 최고인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이 믿어졌습니다. 자기의 모든 갈등을 능히 해결하실 분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말씀에 자기 인생을 투자하였습니다.
그러면 마태가 어떻게 이런 결단을 할 수 있습니까? 이미 오래전부터 신앙과 현실 간의 부조화로 인해 고민한 것 같습니다.
세리에 대해서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 정치와 문화의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 당시 로마 제국에 예속된 식민지 신세였습니다. 자주권이 없이 로마에서 파송된 총독의 군령권 아래서 지냈습니다.
로마 황제는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효율성을 위해 헤롯 대왕의 죽음 이후 분봉(τετράρχης) 왕 제도를 도입하였습니다. 원문의 뜻은 1/4을 통치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로마 황제의 임명을 받아 이스라엘의 한 부분을 다스리는 괴뢰(傀儡) 정부 지도자를 말합니다.
눅 03:01….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로마 정부는 유대인에게 인두세(마 22:15~22)와 토지세, 통행세 등과 같은 각종 세금을 거두기 위하여 감찰관을 파견하였습니다. 이 감찰관은 돈을 받고 위탁 형식으로 조세 징수권을 유대 고위 인사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조세 징수권을 산 자들은 이스라엘 내의 가버나움 가이사랴 여리고에 세관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세관마다 세리장을 두었습니다.
유대인으로 세리장 자리에 오른 자들은 수하에 다수의 세리를 채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 세리는 할당된 세금을 넘어서 징수하였습니다.
세리가 되려면 나름 장부 기재 능력과 계산력이 있어야 합니다. 당시 쉽게 사용하는 아람어,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 정도를 구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관은 국경 지역에 있기 마련입니다. 외국에서 들어오는 여러 물품에 관세를 부과하려면 무엇보다 외국인과 언어소통이 우선입니다. 교육 수준과 활동력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합니다.
3. 마태는 자기 옛 동료들을 주님께 연결합니다. |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막 02:16)
마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의 삶을 즐겁게 지냈습니다. 하루는 자기 집에서 소외된 자들과 동료 세리들을 예수님께 소개하기 위한 식사 자리를 준비하였습니다. 누가복음은 이 모임을 큰 잔치를 베풀었다고 소개합니다(눅 05:29).
세리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모두가 싫어하는 직업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사람을 더욱 미워하였습니다.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고위층은 로마로부터 세금 징수권을 획득한 후에 이 일을 잘 수행하기 위해 두 부류의 세리를 배치하였습니다.
①세관에서 직접 근무하며 통관세를 받는 세리와 ②집이나 사업장을 찾아다니며 인두세(人頭稅) 같은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입니다.
세리가 민중에게 미움을 산 이유는 정한 세금보다 더 많이 징수하여 차액을 윗사람에게 상납하고 자기도 착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세리들은 애국(愛國) 단체인 열심당에게(마 10:04, 가나안인(Κανανίτης), 눅 06:15 셀롯(Ζηλωτής) 테러당하기 일쑤였습니다. 민족 착취자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동족으로부터 미움과 멸시의 대상이었습니다. 결국 죄인과 창녀의 수준으로 전락하였고(마 21:31) 세리도 이런 동족 감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납도 해야 하고 먹고살아야 하니 어쩌겠습니까? 로마의 공권력을 배경으로 자기들 생각 따라 무리한 세금을 징수하였습니다.
눈 감고 자기들 배 불리는 도둑질을 서슴없이 하였습니다. 그래서 세리는 부자라는 말을 꼬리표로 달고 다녔습니다. 심지어는 허가 낸 도둑이라는 별명도 붙었습니다.
세리가 지나가면 뒤에서 저기 세리가 간다. 하며 욕질하고 돌을 던지며 침을 뱉는 일도 하였습니다. 딸 가진 사람은 세리를 사위로 삼지 않는다는 말도 나왔습니다.
마 18: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마태의 근무지 가버나움은 다메섹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간선 도로변에 있는 국경도시입니다. 로마 군대가 상주할 정도입니다(눅 07:01~10).
북으로는 수리아, 남으로는 유대와 애굽까지 나아갈 수 있는 길목에 있습니다. 상인들은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중요 지역입니다.
상인들은 당연히 가버나움 세관에 세금을 내어야 했습니다. 그 지역 갈릴리 바다의 어부들도 고깃값의 일정 부분을 세금으로 내어야 했습니다.
초대교회가 전하는 문서를 보면 물건에는 10~12%까지 기본세를 직접 징수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이는 대단히 과중한 세금입니다.
또 여러 명목의 간접세도 부과되었습니다. 따라서 각종 세금을 합하면 상당한 양의 세금이 부과되는 셈입니다. 이런 일 때문에 세리는 동족으로부터 미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태는 한 때는 동료였던 친구들을 예수님께 소개하는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주님을 만난 성도의 삶은 기쁨의 잔치로 시작됩니다.
먼저는 내 죄가 용서함을 받은 기쁨과 눈물의 잔치입니다. 다음은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 내가 믿음으로 충성을 다짐하는 잔치입니다.
마태가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를 열고 초청했을 때 주님께서 그 잔치에 응하셨습니다. 이 일로 이스라엘 사회는 논란거리로 삼았습니다(마 18:17).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가신 것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 것을 보여 주신 상징입니다. 이스라엘 사회의 고정관념으로 보면 놀라운 일이지만 이 역시 주님 사랑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믿음의 가족 여러분, 오늘 마태의 인생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마태가 주님의 나라를 위한 최고의 헌신과 열매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 일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자기의 이름을 딴 마태복음을 기록한 일입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성경을 기록한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베드로 요한 마태 세 사람입니다. 이 가운데 마태복음의 가치성이 대단히 우수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관하여 어느 복음서보다 정통으로 기술하고 있음은 대단한 가치를 지닙니다.
만일 마태복음이 없다면 예수님과 복음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난항이 따를 것입니다. 한때는 친 로마주의 성향을 띤 세리의 생활을 한 마태입니다. 이 사람이 받은 재능을 잘 살려 귀한 성경을 남겼으니 이제 이름값을 제대로 한 셈입니다.
열두 제자의 마지막 일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자기가 살아서 활동할 때 성경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전해오는 문서에 의하면 마태는 주로 유대 땅에서 전도하다가 말년에 에티오피아에 가서 많은 선교 활동을 하였다고 소개합니다.
어느 날 에티오피아에서 애굽을 향해 돌아오는 중에 복음을 박해하는 무리를 만나 창에 찔려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집니다.
세리 생활을 하던 마태가 이런 길을 걷게 될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따라서 예수님을 만난 후의 일어난 변화는 마태에게 최고의 삶입니다.
그가 배운 학문으로 유대 역사를 잘 분석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신 역사를 날카로운 필치로 기록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스라엘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①예수님이 내 인생의 문제에 대한 답이라는 확신이 오면 담대히 따라가야 하는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만일 이런 확신이 없으면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직장과 물질과 세상에 속한 어느 것 하나라도 버리는 결단을 할 수가 없습니다.
②우리가 희생의 결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잃는 것보다 얻는 것에 대한 소중함과 가치성을 알아야 합니다. 확신하는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잃는 것과 변하는 게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친구도 변하고, 시간 사용도 변하고, 기호도 변하고, 여러 가지를 잃는 때도 있습니다.
③예수님 때문에 얻는 것이, 잃는 것보다 더 소중하다는 확신이 들면 그날부터 우리도 마태처럼 내려놓고 주님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반대로 결국은 잃어버리고 말 것을 아까워하며 자꾸 쳐다보면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시선을 환경에 두지 말고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히 12:0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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