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열두 제자

➑주님의 말씀에 인생을 건 제자 마태(눅 05:27~32).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2. 11. 12. 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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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 1828.9.9.~1910.11.20.)가 한 날은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에게 적은 돈이라도 주고 싶어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으나 그날따라 돈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 구걸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여, 내가 오늘따라 돈 가진 것이 없소. 정말 미안하오. 그러자 걸인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합니다. 선생님 돈이 문제입니까? 저는 선생님으로부터 훨씬 더 값진 것을 받았습니다. 방금 저를 형제라고 불러 주셨지 않습니까?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는 동안 물질도 중요합니다만 더 귀한 것이 있습니다. 상대를 인정해 주면서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입니다. 사람은 상대에게 인정받을 때 가장 행복을 느낍니다.

행복은 물질의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행복은 자기 욕망을 내려놓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오늘 말씀은 물질의 여유를 가지고 사는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신령한 목마름을 채우지 못해 깊은 한숨을 계속 짓는 것 같습니다. 성경은 이 사람의 이름을 알패오의 아들(막 02:14) 레위라고 전합니다. 마 09:09은 레위라는 이름 대신 또 하나의 이름 마태라고 소개합니다.

 

정리하면 본명은 레위이나 예수님 부름을 받아 열두 제자의 반열에 참여하면서 마태(하나님의 선물)라는 이름으로 생활하였습니다. 대부분 성도가 세리 마태로 기억합니다. 저도 이 사람을 마태(Matthew)로 통칭하면서 「말씀에 인생을 건 제자 마태」라는 제목으로 강론하겠습니다.

 

 

1. 마태(Μαθθαῖος)의 기초이력서

 

27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Λευΐ́ς)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마 09:09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Μαθθαῖος)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주소. 예수님께서 가장 많이 활동하신 가버나움인 것 같습니다. 이곳에는 나사렛에서 선교 사역을 위하여 이사 나오신 예수님의 집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곳 가버나움은 복음을 가장 받아들이지 않는 완악한 지역 중의 하나입니다(마 11:23~24). 

 

마 11: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학력. 직업이 세리임을 볼 때 랍비 교육은 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저 기본 교육 정도는 받는 것으로 짐작됩니다. 전통 유대인의 회당교육 방법 때문입니다. 교육 외 레위는 순발력이 상당히 뛰어난 것 같습니다. 세리라는 직업이 상당한 언어 구사와 계산력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가족 관계.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자세히 소개되지 않습니다. 가족이 없어서가 아니라 성경은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구원사에 관한 일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위인전기처럼 인적 사항을 나열하는 책이 아니란 말입니다. 다만 부친의 이름이 나오는데 당시에 흔하게 불리던 알패오입니다(Ἀλφαῖος 막 02:14).

 

 

2. 레위의 이름에 얽힌 사연과 당시 세리의 형편

 

막 02: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레위는 유대식 이름입니다. 이 레위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서 새로운 이름을 받았습니다. 그 새 이름이 마태입니다(마 09:09). 여러분은 레위 하면 어떤 생각이 스쳐 갑니까?

야곱이 첫째 아내 레아를 통해 낳은 셋째 아들(창 29:34, 35:23)이 떠 오를 것입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레아가 이 아들로 말미암아 남편과 연합되기를 원하는 뜻이 담긴 이름입니다.

연합된 자 이런 뜻입니다. 이 사람의 이름을 보아 그의 부모가 아들 장차 성전에서 봉사의 일을 하며 공동체의 연합을 잘 이루는 역할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레위가 경건한 일을 하며 사는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동족의 피를 빨면서 사는 매국노와 같은 처지로 전락하였습니다. 좋은 이름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세리에 대해서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의 정치와 문화의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 당시 로마 제국에 예속된 식민지 신세였습니다.

자주권이 없이 로마에서 파송된 총독의 군령권 아래서 지냈습니다. 대신 로마 황제는 유대를 나라를 다스리는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헤롯 대왕의 죽음 이후 분봉왕 제도를 도입하였습니다. 자율권이 없는 이스라엘의 지역 왕입니다. 성경에 그 분봉왕이 나옵니다.

 

눅 03:01….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로마 정부는 유대인에게 인두세(마 22:15~22)와 토지세, 통행세 등과 같은 각종 세금을 거두기 위하여 감찰관을 파견하였습니다. 이 감찰관은 돈을 받고 위탁 형식으로 조세 징수권을 유대 고위 인사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러자 조세 징수권을 산 자들은 이스라엘 내의 가버나움과 가이사랴와 여리고에 세관 본청을 세우고 세관마다 세리장을 두었습니다. 유대인으로 세리장 자리에 오른 자들은 수하에 역시 유대인 중 다수의 세리를 고용하여 할당된 세금을 징수해 나갔습니다.

세리가 되려면 나름 장부 기재 능력과 계산력 외에도 당시 쉽게 사용하는 아람어,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 정도를 구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관이 국경 지역에 있다 보니 외국에서 들어오는 모든 물품에 관세를 부과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외국인과 언어소통이 우선입니다. 이렇게 3~4개 정도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저절로 나옵니까? 교육 수준과 활동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레위가 부모님의 바람을 따라 성전 봉사자가 되지 않고 그만 세리가 되었습니다.

 

 

3. 세리에 대한 사회의 불편한 시선

 

막 02: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세리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모든 사람에게 기피당하는 직업입니다. 특히 유대인에게는 더욱 미움을 당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 고위층은 로마로부터 세금 징수권을 획득한 후 이 일을 잘 수행하기 위해 두 부류의 세리를 배치하였습니다. ①세관에서 직접 근무하며 통관세와 간접세를 받는 세리와 ②집이나 사업장을 찾아다니면서 인두세 같은 것을 직접 징수하는 세리입니다.

 

세리는 이스라엘 전역의 징세권을 입찰받은 관리로부터 월급을 받았습니다. 자연히 친 로마 성향을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동시에 유대인으로부터는 매국노 취급받아야 했습니다.

레위의 근무지 가버나움은 다메섹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간선 도로변에 있는 국경도시입니다. 로마 군대가 상주할 정도로(눅 07:01~10) 중요한 지역입니다.

북으로는 수리아, 남으로는 유대와 애굽까지 나아갈 수 있는 길목에 위치하였습니다. 상인들은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지역입니다. 상인들은 당연히 가버나움 세관에 세금을 내어야 했고 그 지역 갈릴리 바다의 어부들도 고깃값의 일정 부분을 세금으로 내어야 했습니다.

 

초대교회가 전하는 문서를 보면 적어도 10~12%까지 물건에 기본세를 직접 징수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이는 대단히 과중한 세금입니다. 또 여러 명목의 간접세도 부과되었는데 그래서 각종 세금을 합치면 상당한 양의 세금이 부과되는 셈입니다. 이런 일 때문에 세리는 유대인 동족으로부터 미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마 18: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세금 부과하는 일을 놓고 세리가 왜 미움을 받아야 합니까? 한 나라의 국민이라면 세금을 내는 것이 기본 의무인데 말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세례요한의 메시지를 참조하면 됩니다. 요한이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 때 세리들이 자기에게 나오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눅 03:12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세리가 민중에게 미움을 산 이유는 정한 세보다 더 많이 징수하여 그 차액을 윗사람에게 상납하고 또 자기 재산으로 착복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활은 애국 단체인 열심당으로부터 테러 대상이 되었습니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세리는 로마를 위해 일하는 민족의 착취자로 인식되었습니다. 결국은 동족으로부터 미움과 멸시를 당하면서 죄인과 창기의 수준으로 전락하였습니다(마 21:31).

세리도 이런 동족 감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납도 해야 하고 먹고도 살아야 하니 어쩌겠습니까? 로마의 공권력을 배경으로 자기들 생각 따라 세금을 징수하였습니다. 

눈 감고 자기들 배 불리는 도둑질을 서슴없이 하였습니다. 그래서 세리는 부자라는 말을 꼬리표로 달고 다녔고 허가 낸 도둑이라는 별명도 붙어 있습니다.

심지어 세리가 지나가면 뒤에서 저기 세리가 지나간다. 하며 욕질하고 돌을 던지며 침을 뱉는 일도 했고 딸 가진 사람은 세리를 사위로 삼지 않는다는 설이 되었습니다.

 

 

4. 주님을 만나고 난 이후 마태의 모습

 

27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누가는 마태의 두 가지의 모습, 버려야 할 것을 과감하게 버리는 의지와 버린 이후에는 예수님을 담대하게 따라가는 모습을 소개합니다. 27절 보십시오.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 하셨는데 이에 마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릅니다. 얼마나 확고한 결단입니까? 마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선생님,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가족과 한번 상의해 보겠습니다. 하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르시는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마태의 이런 결단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당시 문화와 환경 여건을 보아 마태의 마음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신앙과 현실 간의 부조화로 인해 오랫동안 고민을 한 것 같습니다.

부모의 큰 기대는 아들이 장성하여 성전 봉사자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레위라는 이름까지 붙여주었고 어느 정도 교육도 뒷받침했습니다. 그런데 세리의 직업입니다.

이런 현실 앞에서 마태의 신앙 양심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세리가 되기 전에는 자기도 남들처럼 세리를 욕하며 손가락질까지 했는데 이제 자기가 그렇게 욕을 먹는 위치에 있습니다.

 

이쯤 되었으니 가까운 친구들도 떠났을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또 외로운 일입니까? 하루의 일과를 다 마치고 난 후의 마태의 일을 짐작해 볼까요? 평안한 마음으로 집에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윗사람 마음을 잘 맞추기 위해 상납 봉투도 만들었겠지요? 재산 증식을 위해 위조 장부도 하였을 것이고요. 세상 물질은 다소 축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더러운 놈, 민족의 착취자, 매국노 하면서 외치는 원성들이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생활이 과연 복된 삶입니까?

전혀 아니지요. 레위 지파 체면 이거 말이 아닙니다. 이런 갈등의 삶 속에서 마태는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예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대하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심지어는 소외된 세리와 죄인을 거리낌 없이 대하신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마태는 그분을 한 번 만나기를 원하는 마음이 간절하였습니다. 바로 그때 자기의 근무지 세관 앞을 예수님께서 지나십니다.

 

가만히 보니 예수님 곁에는 먼저 부름을 받은 제자 가운데 안면 있는 친구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관에서 일을 보고 있는 마태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주님의 그 음성에 마태는 즉시로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일어나서 따릅니다. 마태는 이 부름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알았습니다. 자기의 모든 갈등의 해결자로 이해하여 그 말씀에 인생을 걸고 나섰습니다.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큰 잔치는 새로운 생활로 나아가는 결단입니다. 마태가 예수님을 모시고 이렇게 큰 잔치를 연 것은 ①예수님을 접대하는 의미와 ②세상의 삶에 대한 송별이며 ③자기의 옛 동료들에게 예수님을 만날 기회를 만들고자 함입니다.

마태가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를 준비하고 초청했을 때 주님께서 그 잔치에 응하신 것은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는 분명 비난받을 일입니다.

그런데도 잔치에 참석하신 것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 것을 본으로 보여주신 상징입니다. 즉각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고 비방합니다.

 

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왜 마태가 베푼 식탁에 대해 비난합니까? 식탁에 참여하는 일은 그들 사회에서 서로를 받아들인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세리나 죄인들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비난과 항의에 대하여 조금도 개의치 않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주님을 만난 성도의 삶은 기쁨의 잔치로 시작됩니다. 먼저는 내 죄가 용서함을 받은 기쁨과 눈물의 잔치이며, 다음은 나에게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 충성을 다짐하는 잔치입니다.

 

 

5. 마태의 변화된 삶과 그 이후의 모습

 

눅 19:05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0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예수님의 부름에 응한 마태, 지금까지의 부끄러운 삶을 청산함과 동시에 자기 동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는 중간 역할을 하였습니다. 마태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의 심령에 평안을 찾고 인간 본연의 자세로 돌아왔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이렇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김해삼일교회 가족 여러분, 오늘 마태의 인생을 살펴보는 가운데 그가 주님의 나라를 위한 최대의 헌신과 열매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 일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자기의 이름을 딴 마태복음을 기록한 일입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성경을 기록한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베드로 요한 마태 세 사람입니다. 이 가운데 마태복음의 가치성이 대단히 우수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관하여 어느 복음서보다 정통으로 기술하고 있음은 대단한 가치를 지닙니다.

 

만일 마태복음이 없다면 예수님과 복음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난항이 따를 것입니다. 한때는 친 로마주의 성향을 띤 세리의 생활을 한 마태입니다. 이 사람이 받은 재능을 잘 살려 귀한 성경을 남겼으니 이제 이름값을 제대로 한 셈입니다. 열두 제자의 마지막 일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자기가 살아 있을 때 성경을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다만 전해오는 문서에 의하면 주로 유대 땅에서 전도하다가 말년에 에티오피아에 가서 많은 선교 활동을 하였다고 소개합니다.

어느 날 에티오피아에서 애굽을 향해 돌아오는 중에 복음을 박해하는 무리를 만나 창에 찔려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집니다. 마태는 자신이 그런 길을 걷게 되리라고 생각했겠습니까?

예수님을 만난 후의 일어난 변화의 삶은 마태에게는 최고의 삶입니다. 그가 배운 학문으로 유대 역사를 잘 분석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신 역사를 날카로운 필치로 기록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스라엘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말씀은 ①예수님이 내 인생의 문제에 대한 답이라는 확신이 있으면 담대히 따라가야 하는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만일 이런 확신이 없으면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직장과 물질과 세상에 속한 어느 것 하나라도 버리는 결단을 할 수가 없습니다.

 

②우리가 희생의 결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잃어버리는 것보다 얻는 것에 대해 소중함과 가치성을 알아야 합니다. 확신하는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잃는 것과 변하는 게 있게 마련입니다. 친구도 변하고, 시간 사용도 변하고, 기호도 변하고, 또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때도 있습니다.

 

③예수님 때문에 얻은 것이 잃는 것보다 더 소중하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날부터 우리도 마태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반대로 결국은 잃어버리고 말 것을 아까워하며 자꾸 쳐다보면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시선을 환경에 두지 말고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히 12:0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