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열두 제자

➐의심 많은 제자 도마(요 20:24~29).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2. 11. 12. 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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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강점기 시절 대한민국 독립을 추진하면서 군자금도 모금하고 또 만주 일대를 다니면서 교회를 순회하며 전도하던 채필근(1885.9.16.~1973.3.16.) 목사님 일화입니다.
한 번은 캐나다 선교부의 돈으로 각 교회에 나누어주는 일을 했는데 돈을 많이 넣고 순회하는 도중 외진 곳 객주(客酒)에 들게 되었습니다. 그 객주에 손님이 많아서 독방이 없습니다. 할 수 없어 낯선 사람과 함께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잠자리에 누워도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상대방이 잠을 자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 저 사람이 내가 잠든 사이에 돈을 도둑질해 가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두 사람은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난 다음 날 아침 주인이 차려다 준 상에서 둘은 할 수 없이 서로 마주 앉아 식사하게 되었습니다. 채필근 목사님이 식사를 위해 잠시 묵상 기도를 하고 나니 마주 앉은 사람이 선생님은 예수님을 믿는 분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채필근 목사님이 예, 저는 채필근 목사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상대방이 깜짝 놀라면서 저는 모 교회 장로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상대방에 대한 불신이나 의심은 이처럼 마음의 문을 닫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처음 제자들에게 찾아오셨을 때 제자 중 한 명인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때 동료들이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하자 이렇게 반응합니다.

 

25….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내가 직접 보지 못했어도 동료들이 보았다면 내가 본 것과 같지 않습니까? 그렇게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도마는 그런 신뢰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도마의 삶을 여러분과 함께 「의심 많은 제자 도마」로 정하고 살펴보겠습니다.

 

 

1. 도마(Θωμᾶς Δίδυμος)의 기초 이력서

 

요 11:16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도마의 인물 됨됨이와 그 성격에 대해서는 공관복음(마 10:03, 막 03:08, 눅 06:15)에 그저 열두 제자 명단에 이름만 들어있습니다. 별다른 내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의하면 도마가 사적으로 무슨 이야기나 행동을 한 일에 대한 기록이 조금 나옵니다.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과 도마가 잘 아는 사이였기에 중요한 행적을 그나마 남겼습니다.

 

도마(Θωμᾶς Δίδυμος). 이름의 의미를 잘 보아야 합니다. 도마(히브리)에게 또 다른 이름이 있습니다. 도마의 헬라식 표현인 디두모입니다(요 11:16, 요 20:24, 요 21:02).

도마나 디두모 두 이름이 다 쌍둥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름의 의미만을 놓고 보면 그의 부모가 왜 쌍둥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그 이름을 짓게 된 배경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디두모라는 헬라 이름을 계속 사용하는 것을 보아 쌍둥이로 태어났기에 지었으리라 추측은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야 쌍둥이라는 이름을 지을 필요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다른 한 명도 장성하여 인근에서 생활하고 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다만 성경이 아닌 문서에 의하면 열두 제자 가운데 유다(다대오)와 쌍둥이가 아니겠는가? 라는 질문을 합니다.

 

이 역시 정확히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도마가 쌍둥이로 태어났다는 가정 아래 그의 삶을 조명하면 “의심이 많은 제자 도마”라는 부분이 어느 정도 짐작이 갑니다. 쌍둥이는 성장 과정에서 심리학 차원으로 보면 서로 시기하고 다툴 가능성이 일반 아이들보다 많습니다.

가령 부모님이 옷을 입힐 때도 같은 옷을 입혀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형(동생)에 비하여 차별받는다는 의심을 합니다. 부모님은 그렇게 대우하지 않지만, 당사자는 그렇게 민감하게 느낍니다. 그래서 의심만 쌓여 갑니다. 이런 논리로 쌍둥이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이 도마를 의심의 사람으로 만든 것 같습니다.

 

 

2. 도마는 신령한 면에서 우둔합니다.

 

요 14:0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요한복음 11:16 전후와 요한복음 14:05 이하에 나오는 내용을 근거로 도마의 사람됨과 그 성격과 영성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①믿음보다는 사람의 생각이 돋보입니다(요 11장 16절 전후로). 요한복음 11장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던 나사로가 죽었다가 나흘 만에 살아난 사건이 나옵니다.

이때의 일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오라버니의 병든 소식을 전하면서 고쳐 달라고 요청합니다.

 

01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0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이 요청을 받은 예수님은 이틀이 지난 후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간다라고 말씀하십니다(11).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이해한 제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잠들었으면 낫겠습니다. 하고 거듭니다(12).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나사로가 몸이 너무 아프다 보니 지쳐서 잠들었다고 이해하였습니다.

주님과 제자들 간의 대화를 볼 때 아무래도 의사소통이 잘 안 됩니다. 주님께서 이해력이 부족한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죽었다고(14) 하시자 도마가 갑자기 이렇게 말합니다.

 

요 11:16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도마는 제자 서열 약 7위 정도 됩니다. 이 도마가 나사로는 죽고 예수님의 가는 길에 위험이 있을 것을 예견하였다면 대단히 용기 있는 발언입니다.

선생님만 위험한 곳에 갈 수 없으니 우리도 같이 가서 죽자는 생각, 얼마나 의리와 용기가 있습니까? 도마는 평소에 예수님께 어떤 재난이 닥치지 않을까? 늘 두려워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용기 있게 한번 말했습니다.

 

②아직도 신령한 진리에 대하여 어두운 모습입니다(요 14장 05절을 전후로).

요 14:0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어라.

 

요한복음 14장에서 도마는 진리에 대해서 주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소개됩니다. 01절에 우리가 아주 잘 아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말씀을 하셨으며, 그 배경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3:31~16장(혹 14~16장)을 우리는 일명 다락방 강화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직전 십자가 죽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열두 제자가 죽음이란 말이 나오자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시고 장차 천국에서 살게 될 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0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0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이 말씀을 통해서 내가 가는 것은 그냥 무의미하게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다.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0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0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성도 여러분, 도마가 어떤 사람으로 인식됩니까? 요 11장의 예수님 공생애 중간기쯤 나사로 깨우러 간다고 하셨을 때 제자들 모두가 그 뜻을 이해 못했습니다. 그 후 약 일 년 정도 지난 시점 예수님께서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말씀하셨을 때도 역시 전과 같이 이해를 잘하지 못했습니다(요 14장).

이로 보아 도마는 신령한 진리에 관하여는 여전히 우둔한 자리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의심이 많은 사람은 진리를 깨닫기가 힘이 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좋은 장소를 준비하러 가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도마는 그 장소가 하늘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바깥 어느 비밀스러운 곳에 자기들을 위해 저택을 준비해 놓으신 줄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도마가 주님,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데 어딘 줄 알고 따라갑니까? 하고 퉁명스러운 반응을 보입니다. 이런 도마의 질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0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둔하여 퉁명스러운 도마의 질문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인 대부분이 암송하는 이 유명한 대답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께 기도를 통해 많이 물어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질문을 하면서 삶이 시작되고 질문을 많이 할수록 똑똑해집니다. 사람이 실패에 이르는 원인 중 하나가 잘 안다는 착각 때문입니다. 지나친 자신감이 자기 능력을 과신하면서 오만의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3. 마침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고백하는 도마의 모습

 

요 20: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는 말을 한 도마에게(요 20:25),

예수님은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도마는 손으로 직접 예수님의 손이나 옆구리를 만졌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추측을 할 수 있습니까? 즉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높이 들고 선생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도마는 한순간에는 이성의 사고를 지닌 실증주의자였습니다. 철저하고 확실한 증거를 충분히 제시하면 믿겠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의 심리를 대변하는 말씀으로 보아도 되겠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기 손으로 만져보고 난 뒤에야 믿겠다고 말한 도마 아닙니까?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는 순간 신령한 눈이 확 열렸습니다. 이제는 더는 만져 볼 필요가 없어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지금까지의 도마의 신앙은 예수님을 인성으로만 알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난 후에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합니다.

도마는 하필이면 자기가 제자의 대열에서 잠깐 이탈되어 있을 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 결과 자기의 어리석은 믿음을 동료들에게 노출하고 말았습니다.

의심 많은 제자로 낙인이 찍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도마가 왜 사도 단에서 이탈하였습니까? 혹 글로바와 그의 친구가 실망하여 엠마오를 향하여 내려가던 것 같은 마음( 24:13~23) 때문입니까? 아마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 모든 것은 끝났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소식이 들려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공동체를 찾아주셨다는 소식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만나 보았다는 소식입니다. 도마도 열두 제자 공동체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셨음을 자기의 눈과 손으로 직접 체험해 보아야지 확실히 믿겠다는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열두 제자 공동체 현장에 돌아온 도마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마침내 좋은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26절 말씀에 도마도 함께 있고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만일 이번에도 그 현장에 도마가 없었다면 어찌 되었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 공동체를 찾아주신 후 팔일의 시간이 지난 시점에 도마는 제자들과 함께 있습니다.

공동체에 들어옴으로 인해 예수님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개인에게도 함께 하시지만 공동체 가운데 더욱 역사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마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16세기 후반 영국 성공회의 종교개혁을 실천하려 했던 경건한 청교도들은 신앙인의 모임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묻습니다. 당신들은 왜 그렇게 모임에 한 번도 빠지지 않습니까?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우리에게 놀랍게 역사하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김해삼일교회 가족 여러분, 혹 의심과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있습니까?

그래도 공 예배 빠지지 마십시오. 어느 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깨달아지는 날이 옵니다. 도마는 큰 교훈을 배웠을 것입니다. 제자들과의 교제에서 이탈하는 것이 대단한 불행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행 01장은 예수님의 재림 예언과 승천의 모습이 기록된 장입니다.

 

행 01: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이 성령님 강림 약속을 기다리며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행 01:12). 중요한 사실은 바로 그곳에 도마가 함께 있습니다. 13절에 열두 제자 명단에 도마가 나옵니다. 더는 제자들 모임에 빠지지 않고 공동체 생활을 잘한다는 증거입니다.

 

 

도마의 남은 시간

 

성경에 기록된 일은 이제 우리에게 도마에 관한 소식을 전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과 역사는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성경 바깥의 여러 문서에 의하면 도마에 관한 책이 6권이 발견되었습니다. 경주자 도마서, 도마 복음서, 도마의 유아복음서, 도마묵시록, 도마행전, 람반의 찬송 등입니다.

그 후에 페르시아로 가서 복음을 전했고 점점 동편으로 옮겨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신라 시대 때 복음을 전하고 갔는데 경교가 그 흔적이라고도 합니다.

 

계속 도마는 복음을 전하다 에뎃사(튀르키예 우르파)에서 한 원주민의 창에 찔려 순교하였습니다. 그때 마지막 순간 외치기를, 나는 주님을 예배합니다. 주님이여, 주님을 예배합니다. 지금도 인도에는 도마의 성지가 많습니다. 그의 무덤, 기념 교회, 기도하던 동굴, 피신했던 동산, 도마의 샘이라는 성지도 유명합니다. 

주님은 도마에게 보고라도 믿게 하심으로써 누구보다 훌륭한 사도의 길을 걷게 하시고 순교로 생을 마감하게 하셨습니다. 도마에게 베푸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에게 넘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