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열두 제자

➏간사함이 없는 제자 나다나엘(요 01:46~51).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2. 11. 12. 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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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 대저제일교회 송활신 목사님 장모상이 있어서 하관식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분의 이름과 직분은 김정숙 권사님(82세) 이었는데 장례식 순서지에 고인의 친필을 복사해 놓은 내용이 저에게 와닿아 간단히 소개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욕심과 자랑이 나를 휘두르지 않게 하소서, 미움과 노여움이 나를 지배하지 않게 하소서, 나와 우리 생각과 주장이 나를 이끌지 말게 하소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를 채우시고 말씀으로 나를 움직이시고 하나님의 나라로 나를 이끄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①예수님 모시고 ②기도하고 ③말씀 순종 ④비판× ⑤교만× ⑥욕심× ⑦거짓말×(성실) ⑧성령 충만한 자 되자.

 

이 글을 한 주간동안 계속 생각하면서 정말 믿음이 좋은 착하고 순수한 분이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는 중에 오늘 본문을 대하게 되었습니다.4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향하여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순수한 믿음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저는 순수한 믿음의 사람 나다나엘을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면서 「간사함이 없는 제자 나다나엘」로 정했습니다. 은혜받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1. 나다나엘(Ναθαναήλ)의 기초 이력서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나다나엘 이름 뜻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의미입니다. 공관복음에는 바돌로매로 소개되는데(마 10:03, 막 03:18 눅 06:14). 그의 행적이 요한복음에 간단하게 나옵니다.

주소는 갈릴리 지방 가나입니다(요 21:02). 이곳은 예수님께서 혼인 잔칫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며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지명입니다.

학력은 회당교육 회에 특별히 랍비로부터 교육받은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유대인의 기본교육인 회당교육 정도입니다.

 

가정 배경은 여러 학자가 열두 제자 중에서 나다나엘이 유일하게 왕족 혹은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다만 그의 생애를 조명하는 가운데서 느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묵상하는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나다나엘의 부친 이름이 무엇입니까? 돌로매입니다. 성경에 그 이름이 돌로매라고 기록되어 있어서가 아니라 아들 이름이 바돌로매이기 때문입니다(마 10:03). 헬라어에서『Βα 바』는 아들이란 뜻으로 히브리어의 헬라 음역입니다.

 

그 부친 이름이 돌로매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나다나엘을 부를 때 쉽게 부르는 시골식 스타일 돌로매의 아들아 하며 불렀습니다. 그 호칭이 어느새 고유명사 바돌로매로 자리 잡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은 예로 소경의 처지에서 예수님으로 인해 눈을 뜬 바디매오를 들 수 있습니다. 

 

막 10: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영어권에도 이런 의미의 이름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 예로 Johnson을 들 수 있습니다. Johnson도 John과 son이 결합한 것으로 결국 존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그것이 나중에 아예 Johnson이라는 고유명사로 이름이 굳어졌습니다(Robertson, Jackson).

 

 

2. 주님과의 첫 만남의 순간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열두 제자 가운데 일부는 예수님께 나오게 된 동기가 형제가 형제를 전도하고, 친구가 친구를 전도하고, 또 친구가 친구를 전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요 01:35~51).

먼저 안드레는 스승 세례 요한으로부터 예수님이 메시아란 소식을 듣고 즉시 예수님을 찾아가 제자가 되기로 하고는 하룻밤을 같이 지냅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형제 베드로를 만나 전도하여 주님께로 데리고 옵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만난 후 같은 동네(벳새다) 친구 빌립을 예수님께로 인도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빌립도 평소 자기가 잘 알고 지내는 친구 나다나엘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빌립은 내가 만난 예수님,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을 내 방식을 따라 나다나엘에게 소개합니다(45). 예수님이야말로 율법과 예언서로 대표되는 구약의 모든 말씀을 성취하시는 메시아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빌립의 전도를 받은 나다나엘이 반응을 보입니다.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소개할 때 나사렛 출신이라고 하자 일단 즉각 부정의 반응을 보입니다. 나다나엘은 율법에 정통한 사람으로서 메시아가 오신다면 그분은 당연히 베들레헴에서 탄생해야 함을 알고 있었기에 한 말입니다(미 05:02).

나다나엘의 빈정대는 말투와 그 말투에 내포된 논리의 타당성은 빌립의 말문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심한 모멸감(侮蔑感)까지 주었을 것 같습니다.

당시 나사렛은 갈릴리의 한 마을에 속한 빈촌으로서 율법주의자의 입장에서는 매우 무시하는 지역입니다(요 07:52). 그러나 빌립은 더 이상 논쟁하지 않습니다.

 

일단 한 번만 와 보라고 합니다. 율법의 논리보다는 성육신하신 메시아의 실체를 직접 확인해 보라는 뜻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내 지식으로 설득하려 하지 말고 일단 한 번 데리고 나오십시오. 주위의 사람들에게 한 번만 와 보십시오. 이렇게 하면 됩니다. 

마침내 빌립의 전도를 받은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하셨습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과 간사한 것이 없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나다나엘이 깊은 신앙생활이나 회당에서 크게 충성하는 사람이라서 이렇게 부릅니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다나엘은 빌립의 전도를 받을 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며 반문하던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사는 동네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나사렛 동리의 상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나사렛 주민의 수준은 미천할 뿐 아니라 문명의 혜택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거기다 교육도 제대로 안 되었고 주택도 초라하기가 그지없습니다.

이처럼 나사렛에 대하여 천하게 여기 나다나엘에게 주님께서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라고 칭찬하십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이 깜짝 놀랍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은 당시 외식주의자 바리새인과는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본래 이스라엘이란 야곱의 새 이름으로서 그 의미는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본래 좀 간사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야곱이 밧단 아람을 떠나 고향 브엘세바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기도)하여 이김으로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을 받았습니다.

이때부터 나라 이름으로 사용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선민이라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이름만 귀할 뿐 진짜 이스라엘다운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간사는 물고기를 낚기 위해 미끼를 쓸 때 사용되던 단어입니다. 자기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다나엘을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아주 높이 평가하십니다.

 

시 32:02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나다나엘은 친구 빌립과의 대화에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라는 부정의 반응을 보였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별로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이런 칭찬을 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릅니다. 이에 나다나엘이 주님의 말씀에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또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이어지는 말씀을 봅시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보았노라.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무화과나무란 보통 4m 이상으로 자라고 그 가지는 사방 7m가량을 덮을 수 있는 그늘을 제공합니다. 더운 지방에서 무화과나무 그늘이란 참으로 좋은 안식처입니다. 피서를 할 수 있는 장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물론 그늘과 피서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 그늘은 주로 랍비나 경건한 분 또 나라를 염려하는 분이 성경을 읽는 장소 혹은 명상과 독경 혹은 기도의 처소로 이용하던 곳입니다.

나다나엘도 전통 관습으로 보아 기록으로는 나와 있지 않지만, 성경을 읽거나 아니면 메시아 왕국의 도래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 바탕에서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였지, 그렇지 않고는 별 의미 없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나다나엘을 보았다고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읽으면 읽을수록 품격이 있는 칭찬입니다. 이런 평가를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주변으로부터 들을 수 있다면 복된 일입니다.

 

 

3. 나다나엘의 위대한 신앙고백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나다나엘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친구 빌립에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46) 반문하였습니다. 예수님께는 저를 처음 보는데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모든 부분과 장단점 및 무화과나무 아래서 무엇을 생각하는 것까지도 아시는 예수님을 정면으로 대하자 이렇게 고백합니다. 선생님은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고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베드로와 같은 대단한 고백을 한 셈입니다(마 16:16). 만일 나다나엘이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는 사람이라면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메시아 되신 주님을 소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친구 사이인 이들은 신앙 공감대가 있었기에 빌립은 자신이 깨달은 그 중대한 사실을 나다나엘에게 전하였고 나다나엘도 받아들였습니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이미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로 작정한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은 이보다 더 큰 일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더 큰 일이 무엇입니까? 나다나엘이 체험한 초자연 지식과는 비교되지 않는 큰일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더 큰 일이 무엇을 말하는지 51절 말씀으로 확인하겠습니다.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이제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진실로 진실로라는 의미는 특별히 중요한 일을 말씀하시기 전 집중을 구하는 문구입니다. 공관복음에는 진실로 가 한 번으로 나옵니다(마 05:18, 막 03:28, 눅 04:24). 그러나 본서에는 진실로 진실로라는 반복 용어로 나옵니다(03:03~05, 05:24, 25). 

하늘이 열리고라는 표현은 현재 완료 능동태 분사로서 한순간이라도 닫힘이 없이 항상 열려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표현은 야곱이 벧엘에서 꾼 꿈과도 연관되며(창 28:10~22),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다시 이루어짐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늘이 열리고 그동안 죄로 인해 막혔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된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고 하셨는데 이 부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연결해 주실 속죄의 사역을 말합니다.

 

 

4. 나다나엘의 말년의 삶

 

성경에는 나다나엘이 예수님 만난 장면과 열두 제자의 명단 외에 더 이상의 행적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로 보아 그는 조용한 성격을 가진 제자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다만 1세기의 성경 외의 여러 문서에 전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나다나엘은 브릿지아에 가서 전도하였고 또 히에라폴리스, 아르메니아,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전해집니다.

어느 날은 복음을 전하다 곤봉으로 맞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석 달쯤 지나 박해자에 의해 칼로 피부를 벗김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순교하였습니다.

그의 시신은 자루 속에 넣어 바다에 던졌다고 합니다. 순결하고 투명한 마음을 지닌 나다나엘, 예수님도 인정하신 나다나엘의 그 순수한 인격을 우리도 배워야 합니다.

 

①무엇보다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좋게 보신 것은 그 마음의 문을 잘 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해결점은 자기의 세계를 여는 일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은 마음의 문을 열고 성도의 교제를 나눌 때마다 서로의 약점을 같이 나누는 일에 힘을 기울이십시오(약 05:16).

 

②진리를 탐구하고 수용할 줄 아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어떤 학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말을 하였습니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성경을 읽거나 묵상하였다면 어떤 성경일까 라는 질문을 하면서 창 28장 12절이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창 28: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예수님께서 조금 전 읽은 야곱의 사닥다리가 신기하다고 생각하느냐 그보다 더 놀라고 신기한 일을 네가 보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면 이 장면은 아주 의미 있는 일입니다. 나다나엘은 말씀 묵상과 진리를 탐구의 자세를 지녔기에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③진리를 깨달았을 때는 그 깨달음을 담대히 고백하여야 합니다. 나다나엘이 선생님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임금입니다(요 01:49) 라고 말한 것처럼 고백이란 대단히 중요합니다. 자기의 입술로 고백하게 되면 그때부터 그 고백처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