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열두 제자

➌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요 01:35~39).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2. 11. 12.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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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의 이름 통계를 보니 요한(John)이라는 이름이 첫째에 올랐습니다. 약 60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왜 요한이라는 이름을 지었는지 그 근원을 살펴보니 열두 제자 중의 요한에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그만큼 요한의 이름이 좋은 것 같습니다.

둘째는 야고보(James)입니다. 약 30만 명 정도, 셋째가 도마(Thomas)로서 약 20만 명, 넷째가 베드로(Peter) 순입니다. 대신 유다라는 이름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오늘은 미국에서 그 이름이 첫 번째 자리매김을 한 제자 서열 3위의 요한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아주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번잡함을 피하려고 열두 제자 중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만 동반하신 때가 세 번 나옵니다(막 05:35~37, 마 17:01~02, 마 26:36~46).

이들을 흔히 열두 제자의 삼인방이라 부릅니다.그 이유는 세 제자가 삼 년 동안 예수님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섬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헤아려 처신한 제자들입니다. 이 삼인방 중 베드로와 야고보에 대해서 지난 3주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역시 삼인방 중 마지막 한 사람 요한에 대해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강론하겠습니다.

 

 

1. 요한(Ἰωάννην John)의 기초 이력서

 

마 04: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이름은 마 04:21 절을 통해 볼 때 야고보의 동생 요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소는 갈릴리 서북쪽 가버나움 근방의 벳새다입니다(고기 잡는 집).

이곳은 예수님께서 다니시며 이적을 많이 행하신 곳입니다. 다만 민심이 완악하여 믿지 아니함으로 화 있으리라고 책망하신 곳입니다. 또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신 광야가 있습니다.

 

학력은 랍비로부터 교육받은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유대인의 기본 교육인 회당교육 정도 받은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가족 관계는 아버지의 이름은 세베대(Ζεβεδαῖος 여호와께서 주심)로서 아버지가 제사장과 알고 지낼 정도로 지역에서는 유지였던 것 같습니다. 

근거로는 요한이 대제사장 집과 친숙하게 지냈기 때문입니다(요 18:15). 즉 북부의 시골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하는 권세자 제사장 집안과 알고 지낼 정도면 일반 서민의 수준을 조금 넘어선 것으로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이름은 야고보를 살펴볼 때 살로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살로메가 아들의 청을 받아서 잠시 치맛바람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신령한 세계를 깨닫고 난 후 예수님을 위한 일에 믿음의 봉사를 많이 하였습니다(마 27:56, 막 15:40, 16:01).

그리고 그의 형은 제자 서열 2위 야고보로서 지난 주간 꿈과 야망의 제자 야고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면서 자세하게 말씀드렸습니다.

경제면에서는 집안 대대로 어부의 일을 한 것으로 추정되며, 큰 배를 소유하여 삯꾼을 고용한 것은 어느 정도 부유한 집안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막 1: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2. 주님과의 첫 만남의 순간

 

요 01: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요한은 일찍부터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품고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등장한 세례 요한의 문하에서 제자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만큼 진리 탐구에 열중한 셈입니다.

그런데 한날은 스승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안드레와 함께 즉시 예수님께로 달려갔습니다.

여기 두 제자는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와 요한입니다(40). 이들 두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 그러자 두 사람이 무엇을 원한다는 현실 이익에 대해 말하지 않고 선생님은 어디에서 사시는 분입니까 하고 장소에 관해 물었습니다. 이 부분을 다시 점검해 봅시다.

 

요 01: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무엇을 구하느냐? 찾아다니다, 구하다. 라는 이 단어는 사람이 최고로 찾고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 해 줍니다(행 17:27, 고전 01:22). 무엇을 구하느냐? 라는 문장이 신약성경에는 주로 구원에 연관된 말입니다(마 18:12, 눅 19:10).

따라서 예수님의 질문은 너희가 진정으로 찾고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라는 뜻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질문에 두 제자가 이렇게 답을 합니다.

 

어디 계시오니이까? 이 문구는 랍비라는 호칭과 함께 사용되는 유대인의 관용 표현입니다. 주로 율법사에게 대화를 요청할 때 이런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질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겠다는 각오가 들어 있습니다.

이들은 무엇을 취하기 위한 단순 이익이 아닙니다. 스승 세례 요한에 의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증가가 된 그분의 제자가 되어 배우고 따르겠다는 뜻입니다.

출발부터가 어떤 물질에 관한 것을 원해서가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이 좋아서, 그 예수님으로부터 계속 교제와 신앙의 지도를 받고 싶어서 어디에 사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요 01: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와서 보라. 현재 명령형 오다(ἔρχομαι) 와 미래 직설법 보다(ὁράω) 그리고(καὶ) 로 구성된 간단한 문장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거하시는 곳으로 오라는 말씀입니다.

보라. 제자의 길을 가고 싶으면 와서 보고 확정하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본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부르시는 구원의 초청장입니다.

 

요 01:39…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표현하는 구절입니다. 현재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은 나사렛이 아니라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베다니 근처 한 장소입니다.

그러면 왜 장소를 정확히 명기하지 않습니까? 이유는 그들이 먼저 구할 것이 거처나 장소가 아니라 예수님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와 보라는 표현은 랍비들이 사용하는 권위 있는 초청 방식입니다. 요한은 39절을 통해서 당시 표현 어법을 자세하게 보여줍니다.

이때부터 예수님을 따르는 요한의 생애가 새롭게 펼쳐집니다. 이 만남이야말로 얼마나 복된 만남입니까? 이런 만남이 우리에게도 체험되어야 합니다.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는 예수님 물음에 저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을 더 깊이 알기 위해서 선생님을 따르려 합니다. 라는 고백이 주님의 측근으로 쓰임 받은 근원입니다.

 

 

3. 요한의 인물 됨됨이와 그 성격

 

막 3:16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17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지난 시간 야고보를 설명할 때 말씀드렸습니다. 막 03:16, 17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요한에게는 야고보와 더불어 같은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 별명 뜻이 무엇입니까?

우레의 아들 곧 천둥과 벼락의 아들이란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야고보 요한 형제에게 같은 별명을 주신 것은 함께 잘 어울리면서 비슷한 기질의 열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를 좀 안 좋게 표현하면 불같은 성질을 가진 급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말입니다.

거친 감정을 지닌 약간 시끄러운 사람이라는 표현도 됩니다. 한편 야고보와는 별도로 요한 개인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눅 09:49 절에 나옵니다.

 

눅 09:49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요한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한 사람을 보자 아무래도 자기들 영역이 침해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선생님 이름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하지 말라고 제재하였다고 보고합니다. 

요한은 자기와 같은 편이 아니면 다 적으로 간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런 요한의 태도에 대하여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요한과 예수님이 비교되어 나타나는데 예수님의 마음은 얼마나 넓고 요한의 마음은 얼마나 좁은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어서 다음 말씀에서 요한의 성격을 또 볼 수 있습니다.

 

눅 09: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52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이 말씀을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을 하자면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걸어가는 예루살렘행은 대단히 비장하고도 고독한 행진이었습니다.  그래서 일행이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거처를 알아보기 위하여 사자를 먼저 사마리아인의 촌에 들여보냈는데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의 통행 일정을 거절하는 것은 당시 환경이 수백 년 전부터 내려온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과 시기심의 표현입니다.

요한이 야고보와 함께 주님을 감히 괄시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을에 불벼락을 내려서 버릇없는 사람들을 모두 다 태워 죽이자는 이 제안을 보십시오. 이런 예만 보더라도 요한은 불같은 성격을 지닌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려 마을 전체를 다 태워 버리자는 말은 제자로 부름을 받은 때로부터 삼 년이 다 된 지금까지도 그의 급한 성격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의미입니다.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어떤 사본에는 55절 끝에 가라사대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 모르는구나.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하러 온 것이 아니요, 구하러 왔노라 하시고. 가 붙어 있습니다. 갈릴리 사람의 특징은 정열과 용기가 전투 스타일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요한도 역시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과격한 기질의 사람도 예수님은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사용하십니다.

베드로도 바울도 마가도 주님 보실 때 허물이 대단히 큰 사람이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좋은 신앙의 사람으로서 변화시켜 사용하셨습니다.

 

 

4.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

 

요 13: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제자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자기를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그가 사랑하시는 자(요 13:23), 그가 사랑하시는 제자(요 19:26),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요 21:07, 20).

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 이 정도로 사랑받았음을 밝힙니다. 대신 요한은 자기 이름은 한 번도 직접 밝히지 않았습니다. 다른 제자들 이름은 오히려 상세히 들추었습니다.

 

20:02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요 21:0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요한은 다른 어느 제자보다 주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은 제자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요한이라는 표현보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표현으로 자기를 나타내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따라다닌 말기쯤 주님과 이제 마지막 이별을 앞둔 상황에서 마침내 그렇게도 급하고 좁은 그 성격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요 13:21~2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 것을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때 이름을 생략한 채 말씀하셨기 때문에 가룟유다 외에는 이 사실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따라서 서로가 누구를 향한 말씀인가만 나름 추측하였습니다.

 

요 13: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이 말씀을 보면 지금 다른 제자들은 누가 예수님을 팔 범인인지를 놓고 수군수군하고 있는데 정작 그는 예수님의 품에 누워 아양을 떨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성격 같으면 어떠했겠습니까?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중에 어느 놈이 주님을 배반한다는 말이야. 빨리 나오라고 하면서 고함을 질렀을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로 인해 만찬장은 뒤집혀 졌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요한이 이렇게 조용한 것은 그의 성격이나 성품이 예수님의 사랑을 닮은 사랑의 사람으로 서서히 변화했기 때문입니다.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5.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답게 행동하는 요한

 

요 19: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가룟유다의 배반으로 인해 예수님은 권력자들에게 잡히어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됩니다. 그러자 제자들 모두가 예수님을 떠나고 맙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까지 모두가 큰소리치면서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죽는 자리까지라도 가겠다고 큰소리를 쳤는데 말입니다.

 

막 14: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29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1 베드로가 힘 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같이 말 하니라.

 

제자들이 흩어져 도망했을 때 오직 요한만이 십자가의 현장까지 따라와서 최후의 장면을 목격합니다. 그러고 보면 가장 믿을 만한 제자가 요한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 고통을 삼키며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며 외치실 때 눈앞에 있는 제자는 요한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큰소리치던 베드로와 한결같이 우리도 요. 하면서 장담하던 제자들은 흔적도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가장 간절하고도 가슴 저미는 부탁을 요한에게 하십니다.

 

이로 보아 요한이야말로 참으로 신실했던 제자, 가장 믿을만한 제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른 제자들은 모두가 도망을 갔는데 어떻게 이 요한만이 용기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오직 주님을 사랑하는 그 의리를 가슴에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한은 야고보와 더불어 세상의 꿈을 꾸면서도 주님 곁에서 보필한 신임의 사람입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면서 부활의 위대한 교훈을 베푸실 때(막 05:35~37),

변화산에서 예수님 모습이 형용할 수 없는 모습으로 변모할 때(마 17:01, 02),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 기도하실 때(마 24:36~46)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단순하게 비교하겠습니다. 물론 베드로는 수제자다웠으며 모든 일을 잘 주도해 나갔고 반면 요한은 언제나 보조자로 등장하여 제2인자답게 행동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열정이 충만하여 일을 추진하고 주님을 따르다가도 사태가 어려워지면 쉽게 발을 빼는 사람인 데 비해 요한은 다소 다른 면이 있습니다.

요한은 주님을 향한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제자라는 점이 베드로와 다릅니다. 계속 요한과 베드로의 행적이 나오는데, 요 18:15, 16절을 보겠습니다.

 

요 08:15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16 베드로는 문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이 부분에서 결국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장면까지 진행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는 그 현장에 요한은 계속 있습니다.

주님을 끝까지 바라보다가 십자가 아래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주님의 특별한 부탁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복된 현장을 요한 외에 누가 또 받을 수 있습니까?

 

 

6. 요한의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요한은 한날은 복음 전하다 잡혀서 고도(孤島) 밧모로 귀양을 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깊이 기도하던 중 성령님의 감동으로 장차 될 일에 대하여 보고 받았습니다. 그때의 일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러다 귀양에서 풀려나와 다시 에베소로 돌아와서 마지막 최후의 사역을 합니다. 그때가 주 후 98년쯤입니다. 이전에 함께 교제하던 제자들은 다 순교하여 떠났고 오직 요한만이 마지막 늦게까지 살아남았습니다. 제자 중 가장 오래 산 인물입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요한은 복음을 전하다가 에베소에서 또 한 번 잡혔습니다. 그리하여 독사 굴속에 들어갔고 또 한 번은 끓는 물에 던져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그를 살리셨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서 최후에는 들것에 실려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가끔 그리스도인의 모임에 참석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앉혀 놓으면 이렇게 설교했다고 합니다. 소자들아 서로 사랑하라. 그래서 한 성도가 선생님, 그 설교를 수십 번도 더 하셨는데 이제 새로운 설교는 없습니까?

그러자 요한은 오늘은 특별히 새로운 설교를 하겠다. 하면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하며 삶을 마무리하였다고 합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요한일서 04:07~21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곳에는 성부 하나님은 사랑이시고(07, 08), 그 사랑은 성자 하나님 독생자를 통해서 십자가에 나타났으며(09), 이 사랑은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 마음속에 거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13).

우리 마음에 예수님 사랑이 자리를 잡았습니까? 이 사랑은 내 곁에 있으면서도 잘 보이지 않는 소외된 이웃에게 나타날 때 비로소 참사랑이 됩니다(20).

요한의 사랑의 메시지가 살아 숨 쉬고 있습니까? 이러한 사랑의 메시지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스스로 연구해 낸 메시지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장에서 주님에게 들은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그가 들은 사랑의 메시지를 요한일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주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요한 그는 그 사랑을 그대로 전하려는 마음으로 펜을 들어 예수님의 사랑을 조명해 보입니다.

①그래서 그는 먼저 요한복음 03장 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 0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②다음 요한일서 03장:16절에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자는 그 사랑을 형제를 향하여 나타내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요일 0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③그리고 주 안에서 성도끼리 서로 사랑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제기합니다.

요일 0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신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