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열두 제자

[열두 제자 ➋야고보] 세상 욕망을 꿈꾼 야고보(마 20:20~28).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2. 11. 12.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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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 가끔은 번거로움을 피하려고 특별히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만 데리고 가신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흔히 열두 제자 중 선두 그룹인 삼인방이라 부릅니다. 예수님을 삼 년 동안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모시고 섬겼기 때문입니다. 이들이야말로 예수님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헤아려서 처신한 제자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 삼인방 가운데 한 사람인 베드로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중의 또 한 사람인 야고보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그런데 그의 여러 행적을 보면 큰 야망을 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 제목을 세상 욕망을 꿈꾼 제자 야고보로 정했습니다. 함께 은혜받는 귀한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1. 야고보(Ἰάκωβον James)의 기초 이력서

 

마 04: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이름은 야고보이며( 04:21) 입니다. 이름의 뜻은 발뒤꿈치를 잡았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구약시대 이삭의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 중 야곱을 연상하게 하는 이름입니다.

 

창 25:25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26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주소는 갈릴리 서북쪽 가버나움 근방의 고기 잡는 집이란 뜻을 가진 벳새다입니다. 이곳은 예수님께서 전도를 위하여 더욱 이적을 많이 행하신 곳으로서 이 벳새다 동네 뒤로는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신 광야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전도의 공을 들였음에도 이 벳새다에서는 믿는 자가 별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 완악한 자들을 향해 엄하게 책망하셨습니다.

 

마 11:21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눅 10:13).

 

학력은 역시 랍비 교육받은 흔적은 보이지 않고 유대인의 기본교육인 회당 교육 정도를 받은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하는 사람이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하며 놀라워하였기 때문입니다( 02:0~08, 12~13).

 

가족 관계는 부친(父親)의 이름은 세베대(여호와께서 주심)로서 제사장과 잘 지낼 정도로 지역에서는 유지(有志)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근거로는 작은아들 요한이 대제사장의 집과 친숙하게 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18:15).

즉 북부의 시골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권세자 제사장의 집안과 알고 지낼 수 있다는 것은 일반 서민의 수준을 조금 넘어선 것으로 짐작됩니다.

모친의 이름은 살로메(Salome)로 치맛바람을 일으키기도 한 극성 여자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일에 눈을 뜬 후부터 믿음의 봉사자로 바뀌었습니다( 27:56,  15:40, 16:01). 야고보의 동생은 서열 3위의 요한으로서 우리에게는 사랑의 사도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요한이 왜 동생이냐 하면 야고보의 이름을 기록할 때마다 계속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동양 문화권에서는 동생보다 형의 이름을 먼저 기록하는 게 원칙입니다. 열두 제자 명단에서도 요한보다 야고보의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경제면에서는 집안 대대로 어부의 일을 한 것 같습니다. 큰 배도 소유하였고 또 삯꾼까지 고용한 것을 보아 다소 부유한 집안이 아니겠느냐는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막 01:19….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 가니라.

 

 

2. 야고보의 인물 됨됨이와 그의 성격

 

복음서가 전하는 야고보를 좀 더 자세하게 조명해 보겠습니다. 대부분이 그의 동생 요한과 같이 행적(行蹟)을 다룹니다. 왜 같이 다룹니까?

형제이기 때문입니까? 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와 안드레도 형제이니 같이 다루어야 하지 않습니까? 형제라고 꼭 같이 행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베드로와 안드레는 각각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와 요한은 늘 같이 나타납니다. 이는 두 사람이 아주 잘 어울리는 스타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변을 보십시오. 형제이면서도 같이 있는 것을 싫어하여 따로 활동하는 것을 오히려 홀가분히 생각합니다. 때로는 형제의 성격이 잘 맞아 어울리기도 합니다. 이럴 때 사용하는 말이 피는 물보다 진하다. 이렇게 말합니다.

결국 야고보와 요한은 잘 어울리는 성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성경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같은 별명을 붙여 주신 일입니다.

 

막 03:17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Βοανεργές)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이 별명의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레의 아들 곧 천둥과 벼락의 아들이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별명을 형제에게 같이 붙여 주심을 볼 때 함께 잘 어울리면서 비슷한 기질로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레의 아들을 좀 다르게 표현하면 정열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좀 안 좋게 표현하면 불같은 성질을 가진 성격의 소유자가 됩니다. 즉 거친 감정을 지닌 약간 시끄러운 사람이라는 말인데 그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눅 09: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이 말씀은 형제 스타일이 같음을 증명하는 구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걸어가는 예루살렘행은 대단히 비장하고도 고독한 행진이었습니다.

그래서 일행이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거처를 알아보기 위하여 사자를 먼저 사마리아인의 촌에 들여보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즉각 예수님의 일행을 거절하였습니다. 수백 년 전부터의 내려온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갈등 때문입니다.

이때 야고보와 요한이 나서 선생님, 감히 선생님을 괄시하는 사마리아 사람들 마을에 불벼락을 내려서 버릇없는 이 사람들을 모두 다 태워 죽입시다. 하고 요청합니다. 이런 예만 보더라도 야고보는 불같은 성격을 지닌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3. 세상의 꿈을 꾸는 야고보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가 예수님께 두 아들을 직접 앞세우고 나왔습니다. 곧 이루어질 나라에서 좋은 자리 두 곳을 청탁하기 위함입니다( 20:17~19). 마가복음에는 야고보 요한 두 제자가 직접 예수님께 요청하였습니다( 10:35~37).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능히 로마로부터 독립시켜 메시아 왕국을 세우게 될 줄 믿고 핵심 자리를 선점하기 위함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2절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장차 내 앞길에 무엇이 다가오고 있는지 잘 모르고 있다. 너희는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이야기하니 세상에서 어떤 굉장한 나라가 이루어질 줄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내가 그 나라를 통치할 때 너희는 핵심 자리를 예약하나 너희가 바라는 것과 내가 주려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어머니를 앞세운 야고보와 요한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 선생님 마실 수 있습니다. 하고 강하게 대답합니다. 나중 일은 어찌 되든 일단 예수님의 신임부터 얻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마시려는 잔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속죄의 길 곧 죽음의 길입니다. 그러나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대속의 길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저 메시아 왕국 선포 과정에서 어떤 잠깐의 어려움이 있을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그런 정도의 고난은 능히 동참할 수 있다는 각오입니다. 그래서 어머니까지 동원한 소위 치맛바람을 일으킵니다. 왜 이런 치맛바람이 일어납니까?

이는 특정한 일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 3인의 제자만 동반한 때가 많았기 때문에 일어난 오해입니다. 그래서 강렬한 꿈과 야망을 품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친분이 깊은 그의 어머니를 은근히 앞세우고 청탁합니다.

 

어머니 살로메도 아들의 출세를 위해서 체면 무릅쓰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이런 모습은 자녀의 출세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극성스러운 어머니 모습입니다. 남의 시선은 상관없이 내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윗사람을 찾아가 청탁하는 어머니의 모습과 같습니다.

생활은 어렵고 적자 또한 분명한데도 그렇게 해서 환심 사기를 바랍니까? 재고해 보십시오. 부담 없이 만날 일 있으면 기도하는 마음으로 찾아가서 상담하십시오. 윗사람으로부터 혹은 선생님으로부터 더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신앙인에게는 미래를 향한 계획과 꿈 그리고 야망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또한,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하여야 하며 중단 없는 전진을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자기의 영달이나 세상 욕망 수준에 머물면 야고보와 요한이 구한 것과 다를 바가 뭐가 있습니까? 이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3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24절에 의하면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그의 어머니를 앞세워 예수님께 청탁한 소식을 들은 나머지 열 명 제자가 상당히 분하게 여겼다고 나옵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불신자들은 더 높은 권력, 더 높은 힘을 가지고 남들을 지배하기를 꿈꾸지만, 너희는 그들의 삶과는 달라야 함을 주문하십니다.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야고보와 요한이 어머니 살로메와 더불어 예수님께 특별 자리를 청탁한 사건을 통하여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세상 권력의 욕심은 한계가 없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또한, 그런 모든 욕망을 주님은 제거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마음을 비울 때 비로소 주님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4. 야고보의 생애와 그의 죽음

 

야고보는 어떤 특별 재질을 가진 것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계신 곳이면 베드로와 요한과 더불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면서 부활의 위대한 교훈을 말씀하실 때( 05:35~37), 변화산에서 예수님 모습이 형용할 수 없는 모습으로 변모하실 때( 17:01, 02),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 기도하실 때( 26:36~46) 함께 하였습니다.

야고보가 사람의 눈에 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야고보의 지도자 기질을 보셔서 훈련 시키셨고 결국은 지도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영광스러운 지도자로서 부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세상의 꿈을 하나님 나라의 꿈으로 바꿈으로 마침내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남의 야망을 짓밟는 일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야망을 품지 못하면 그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 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선한 야망을 품으십시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며 주님의 교회를 가장 신실하게 받들며, 주님을 위해서 가장 귀한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선한 야망, 믿음의 야망을 품는다면 매우 아름다운 일입니다.

초대교회 시절 전해지는 한 문서에 의하면 야고보는 순교하기 전 지중해 영역 주변과 스페인까지 가서 전도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야고보에게 조가비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이는 해안지방을 찾아다니면서 어부들에게 전도를 한 일이 역사의 문서 가운데서 자주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많은 지역을 다니며 부지런히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모든 힘을 다했으며, 열두 제자 중에 제일 먼저 순교를 당했습니다.

때는 주 후 44년경으로 사도행전 12 01~02절에 의하면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였다고 기록합니다.

헤롯 왕은 유대인 대다수가 복음 전하는 일을 원치 않음을 잘 알았습니다. 따라서 자기의 정치 꿈을 위해서 야고보를 희생 제물로 삼았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스페인에는 세계의 사람이 모여드는 특별한 길이 있습니다. 산티아고(Santiago) 순례길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성() 야고보의 스페인식 이름입니다. 야고보는 헤롯 왕에게 참수되면서 열두 제자 중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유해가 안치된 곳이 산티아고 대성당입니다. 스페인에서는 열두 제자 중 야고보가 국민 차원의 숭배를 받습니다. 거기에는 특별 이유가 있습니다.

야고보가 초기 기독교 시절 이베리아반도까지 와서 선교하였는데 사후 그의 행적을 기념하기 위해 시신을 스페인으로 옮겨 안장하였다는 전승 때문입니다.

 

1947 8 24 Paulo Coelho 1987년 야고보가 걸었다는 길을 걷고 <순례자>라는 책을 출간해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 책 때문에 세계인의 관심을 끌었는데 산티아고 순례길은 여러 갈래지만 보통 4대 코스가 유명합니다.

프랑스 남부지방 국경 마을 생장 피드포르에서 야고보 성인의 유해가 묻혀 있다는 콤포스텔라까지 807km의 프랑스 길, 스페인 남부 세비야에서 출발하는 1,000km가 넘는 은의 길, 이베리아반도 북쪽 해안을 따라가는 북쪽 길,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시작하는 포르투갈 길입니다.

 

이 가운데 대부분 사람이 걷는 길은 782km에 달하는 프랑스 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 역시 산티아고 순례길이라면 대부분 이 길을 말합니다중간에 높은 산과 가파른 고개를 넘어야 하지만 전체로 보면 평지가 많아 웬만하면 도전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가 육신의 야망을 하늘나라의 야망으로 바꿈으로써 선한 영향력을 남긴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 가치관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야고보가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았듯이 우리도 끝까지 주님만 바라볼 때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