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에서 하나님 백성을 대표하는 것이 열두 지파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인과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상징은 열두 제자라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초대 교회 시대를 이끌어 핵심 인물은 예수님께서 삼 년 동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복음으로 훈련 시킨 열두 제자입니다.
열두 제자야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복음의 기초를 놓은 인물입니다. 초대 교회 시절의 부흥을 주도한 꼭 필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오늘부터 열두 제자에 대해 성경에 기록된 서열을 따라 차례대로 전하려 합니다. 이 가운데 첫 번째 살펴보는 인물은 베드로입니다.
베드로의 여러 흔적을 보면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이 나오는 인물입니다. 이 베드로를 두 시간에 걸쳐 살펴보겠습니다. 따라서「점점 성숙해 가는 베드로」라는 제목으로 강론하겠습니다.
1. 베드로(Πέτρος Peter)와 주님과의 첫 만남 |
요 01: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하고….
안드레가 그의 형 시몬에게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메시아 되신 그분에게 같이 가자고 권합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본명이 시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시몬이 동생 안드레를 따라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Σίμων)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42).
게바가 무엇입니까? 수리아로 반석이라는 의미입니다. 게바를 헬라어로 표현하면 베드로가 되는데 두 말의 뜻은 꼭 같이 반석입니다.
베드로를 처음 만난 예수님의 말씀치고는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너는 나만 믿고 따르라. 이렇게 하셔야 하는데 그런 일상의 말보다는 너는 장차 게바라 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어떻게 받아야 합니까? 또 우리가 반석이라고 하는 단어에서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반석은 무게 있고, 아주 든든하고, 보기만 해도 위압감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이 반석의 의미가 시몬의 성격이나 기질로 볼 때 잘 어울리는 명칭인 것 같습니까? 성경이 전하는 시몬의 여러 행적을 보면 그의 성격이나 기질과는 아무래도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조변석개(朝變夕改) 스타일 시몬입니다. 다혈질 시몬입니다. 이런 시몬에게 반석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람을 한 참 잘못 본 것으로 여겨집니다.
지금 시몬을 주님께 데리고 온 사람이 누구입니까? 동생 안드레입니다. 이 안드레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속으로 어떻게 생각했을 것 같습니까?
뭐 반석, 반석 좋아하네. 다른 건 몰라도 형의 성격을 내가 잘 알고 있는데 그건 아니지. 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신 중요한 부분을 잘 보아야 합니다. 시몬에게 네가 지금 당장 반석이라 하시지 않고 장차, 곧 앞으로 라고 하셨습니다.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Κηφᾶς)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시몬에게 네가 지금 당장 반석이라 하시지 않고 장차, 곧 미래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사막, 황야)의 현재를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시몬에게 반석이라는 이름을 주신 것은 지금은 네가 많이 부족한 줄 안다. 그러나 내가 너를 훈련하면 장차 게바로 변하게 될 줄 믿는다. 라는 말씀입니다.
네가 장차 반석이 되리라는 이 한마디가 시몬에게는 얼마나 희망에 넘치는 큰 도전의 말씀입니까? 대단한 희망의 말씀입니다. 우리도 받을 수 있는 말입니다.
시몬의 생애에서 처음으로 자기를 믿어주고, 자기에게 기대를 걸고, 새로운 삶을 향해서 도전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신 주님과 첫 만남은 시몬에게 일대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이렇게 평범한 사실과 별 내세울 것이 없는 시몬이 열두 제자의 수반이요 초대 교회사에서 위대한 지도자가 된 것도 다 장차 게바가 될 것이라는 예언 때문입니다.
하나 더 부연하자면 시몬이 지도자로 세워진 것은 갈릴리에서 길러지고 다듬어진 뱃사람으로의 야성과 그가 지닌 적극적 성격 아니겠습니까?
이런 시몬의 장점 때문에 평소에 허물과 약점이 많음에도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과 달리 세심한 지도와 배려를 하셨습니다.
시몬이 새로운 이름을 받은 후부터 예수님의 말씀에 이탈하거나 실망하는 일을 할 때는 꼭 베드로야 라고 부르지 않고 시몬아, 하고 부르십니다.
막 14:37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요 21: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옛 이름 시몬을 부르실 때는 베드로가 신앙의 자리에 이탈돼 있음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아 하고 베드로의 옛 이름을 부르시면 그때 베드로는 아, 내가 또 옛날로 돌아갔구나. 하며 깨닫습니다.
베드로가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고백함으로 베드로라는 칭호가 공적으로 부여되었습니다(마 16:16~19).
그런데도 베드로는 자기 생각만으로 주님을 섬기려다 사탄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런 실수와 깨달음 속에서 시몬은 점점 반석으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시몬은 여러 약점을 성령님의 역사로 극복하며 마침내 초대 교회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고 일꾼이 되었습니다(행 1:15~25).
2. 베드로의 기본 이력서 |
행 02:0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0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주소는 갈릴리 지방 벳새다입니다(요 01:44). 그러나 나중에는 예수님처럼 가버나움으로 주소를 옮겨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더 가까이서 섬기고 배우기 위함입니다.
학력은 특별히 랍비 교육을 수학한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유대인의 기본교육 회당교육 정도를 받은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 근거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오순절 날 성령님 강림 사건 때 베드로의 메시지 때문입니다.
당시의 관원들이나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처럼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역시 놀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학문 없는 범인 정도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행 04: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凡人)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가족 관계는 다른 제자들도 그러하겠지만 자세히 소개되지 않습니다. 가족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성경 자체가 속량사(贖良史)에 관한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위인들의 전기처럼 인적 사항을 나열하는 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만 부친(父親)과 동생 이름 정도가 나오는데 부친의 이름은 당시의 흔하게 쓰인 요한입니다.
요 21: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가족 관계는 동생 안드레가 있습니다. 베드로를 예수님께로 인도하였으며 열두 제자의 서열 4위입니다. 또한, 장모에 관한 일도 나옵니다(막 012:29, 30).
장모와 같이 지낸 것은 베드로의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의 간접 증거입니다. 그의 장모를 모시고 부인과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경제면에서는 눅 05:10에 의하면 베드로는 집안 대대로 어부의 일을 하였습니다. 그 일을 같이 담당한 동업자들도 있습니다.
눅 05: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3. 베드로를 부르신(召命) 예수님 |
막 01: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베드로가 어떻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지 그의 소명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역에 힘써 뛰어들게 된 사건부터 보겠습니다(막 01:16~18, 눅 05:01~11).
막 01: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막 01장은 베드로의 소명을 간단히 다루지만 같은 내용이 눅 05:01~11절에서는 좀 상세히 나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요한복음과 비교해 보면 처음 만나는 장면이 아닙니다.
그 근거로 막 01:14 절에 세례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라고 기록하고 난 후 16~18절에서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십니다.
반면 요 01장에는 세례 요한이 활동 중에 안드레를 통하여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왔고, 그때 장차 반석이 될 것이라는 언질을 받았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세례 요한이 잡힌 후라고 기록함으로써 시간이 좀 더 많이 지나간 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베드로가 일찍 부름을 받았지만, 고기잡이 일을 좀 더 하다가 예수님으로부터 본격 사역의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베드로는 모든 일을 관두고(그물, 배, 인부, 부모, 고기 등) 예수님을 따랐으니 베드로는 예수님과 만남이 초면이 아닌 구면인 셈입니다(막 01장, 눅 05장).
눅 05:02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03 예수께서 한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예수님은 일찍부터 시몬의 인생을 주목하셨기 때문에 그의 배에 오르셔서 육지에서 조금 나간 후 그 앞에 모인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0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가 그대로 따릅니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이미 낯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조금씩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만일 처음 만나는 사람이 시몬에게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고 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 것 같습니까?
지금까지 바다에서 살았고 바다에 관한 한 전문가인 베드로는 오히려 그 사람에게 나보다 당신이 어떻게 잘 알 수 있느냐는 반응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한 상당한 믿음과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0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베드로는 요 01장에서 형제 안드레를 통하여 예수님을 소개받았지만 아마도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은 주님이시라는 강한 확증을 가졌을 것입니다.
이미 처음 만났을 때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던 그분, 갈릴리 바다 속의 고기 떼의 방향까지도 다 알고 계시는 그 전능자 앞에서 시몬은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눅 05:08).
그런데 지금까지 고기 잡는 이야기 하다 이내 신령한 주제로 전환합니다. 누구든지 영의 체험과 이런 고백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라 말하기 부끄럽습니다.
베드로가 비록 안드레를 통해서 예수님을 소개는 받았지만, 그 소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주님과 신령한 관계로 만나야 합니다. 이 말씀 후에 베드로에게 다시 사명감을 확인시키십니다.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0절을 유의해서 보십시오. 예수님은 시몬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시몬 베드로가 놀라운 현장을 통해 떨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자기의 과거의 모습과 현재 의식의 밑바닥도 꿰뚫어 보시는 그분 앞에 섰다는 두려운 일이요 복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이 말씀 후에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11).
시몬은 주님의 부름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의 전 생애와 전 시간과 모든 삶을 정리하고 베드로로 새 출발을 합니다.
나를 따라서 오너라. 이 말씀이 무엇이기에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른다는 말입니까? 베드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았기 때문에 그 말씀에 자신의 인생을 걸었습니다.
4. 삼 년 동안 예수님으로부터 훈련받는 베드로의 모습 |
요 06: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일까?
베드로는 천성이 대단히 격렬한 사람입니다. 충동성이 있습니다.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갔던 사람입니다. 변화무쌍한 격정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강한 것 같으나 속으로는 아주 약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느 학자는 베드로의 생애를 갈릴리 바다를 닮은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갈릴리 바다가 평소에는 고요하고 아름다우나 파도가 일면 걷잡을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지낸 삼 년 동안의 훈련 속에서 나타난 몇 가지 사건을 보겠습니다.
①마태복음 14:25~29(28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마 14: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
이 일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갈릴리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이 유령이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십니다. 즉각 베드로가 만일 걸어오시는 분이 주님이라면 나를 명하여 물 위로 오라 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믿음과 용기가 대단합니다.
②요한복음 06:66~68(68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요 06:66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
예수님을 향한 여러 박해가 시작되면서 주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이 위기를 느끼고 떠나갈 때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영생의 말씀이 바로 주님께 있는데 우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베드로가 주님께 대한 애정과 신뢰를 보인 다음 다른 제자들 마음도 안정시켰습니다.
③누가복음 09:28~33(33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눅 09: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 새 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산에 가서 기도하실 때 예수님 자신의 감추어진 신성과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놀라운 변화의 현장이 일어났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관한 일을 이야기합니다. 이 놀라운 현장을 목격한 베드로가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 있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하여 초막 셋을 이곳에 짓고 살면 어떻겠습니까? 라고 청원합니다.
④마태복음 16:13~1(16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3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이다. |
베드로는 세상 여러 사람이 주님을 평가하는 것과는 달리 주님이야말로 우리의 전 생애를 드릴 수 있는 구주이십니다. 라고 담대히 고백합니다.
⑤마태복음 16:21~22(23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마 16:21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고. |
주님께서 자기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예언하실 때 베드로는 하나님의 섭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주님, 저희가 있는데 무슨 그러한 위험한 일을 당한다는 말입니까?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있습니다. 하면서 주님을 위로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곧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준엄한 책망을 하십니다. 이는 베드로가 주님의 십자가 고난의 의미와 십자가의 뜻이 무엇인지를 좀 더 깊이 생각했어야 합니다. 그랬더라면 자기감정대로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또 책망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⑥요한복음 13:04~09(0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요 13:0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0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0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0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0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09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
최후의 만찬 중 세족식(洗足式) 하는 장면입니다. 모든 제자가 발을 씻겨 주심에 황송해하면서 감격하고 있는데 베드로만은 주님께서 어떻게 자기의 발을 씻을 수 있느냐며 완강히 거절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하고 말씀하시자 조금 전 자기의 주장을 철회합니다. 이어 말합니다.
주님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이 말씀에서 베드로가 얼마나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잘못되었으면 바로 고치는 것이 좋습니다
⑦마가복음 14:27~31(29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막 14: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29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1 베드로가 힘 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아 말 하니라. |
예수님은 베드로의 약함을 아시고 하신 말씀이지만 베드로는 자신의 약함은 모른 채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장담합니다. 결과는 예수님 말씀대로 참담한 실패입니다.
즉 66~72절에 보면 여종 앞에서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영원한 한을 남기고 마는데 이는 정말 수제자답지 못한 일입니다. 베드로의 천추의 한입니다.
그러고 보면 시계추가 이 끝에서 저 끝으로 가는 것처럼 항상 극에서 극으로 움직이는 사람, 언제 어떻게 변할지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베드로는 순간의 격정이 끓어올라 자주 실패의 자리에 이릅니다. 그러면서도 잘못인 줄 알면 즉시 철회하는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결단은 베드로의 상당한 장점입니다.
5. 베드로의 말기 사역과 죽음 |
그러나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의 모습은 복음서에서 보는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시몬(사막. 황야)에서 이제 담대한 반석 베드로로 확실하게 변화된 균형 잡힌 지도자 모습입니다. 언제 이런 변화의 사람이 되었습니까?
행 02장의 오순절 성령님 강림 사건 이후에 성령님의 능력에 사로잡히고 난 이후부터입니다. 베드로에게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면 많은 허물과 시행착오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감동함에 사로잡힐 때 비로소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진정한 지도자로 발돋움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를 통해 사도행전에 나타난 놀라운 역사 가운데 세 가지를 특별히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①베드로가 유대인에게 복음의 문을 01장에서 열기 시작하였고, ②08장에서 사마리아 사람에게 복음 전하는 데 중요 역할을 하였고, ③10장에서 이방인 고넬료라는 사람의 집에 가서 가정 부흥회를 인도한 모습입니다. 이후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주님의 명령을 받들어 복음 전하는 지도자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이 3가지의 사역이야말로 베드로의 중요한 업적입니다. 이후 베드로는 고린도에까지 가서 사역하였는데 이 영향으로 교회 안에 게바 파까지 생겼습니다.
고전 01: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베드로가 고린도에서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마지막 사역지는 로마입니다.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벧전 05:13).
바벨론은 문자 그대로 옛날 문명의 중심지인 바벨론이 아닙니다. 당시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 문명을 의미합니다. 이곳에서 베드로는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그의 죽음에 관하여는 교회 야사(野史)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Quo Vadis, Domine? 들어보신 말이지요. 베드로가 로마에서 말기 사역 때 로마 권력의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베드로는 신자들의 권유로 탄압을 피하려고 로마에서 빠져나와 교외의 언덕을 넘어가는 중입니다.
이때 베드로는 자기와 반대 방향에서 로마로 가시는 예수님의 환상을 봅니다. 깜짝 놀란 베드로가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Quo Vadis, Domine)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버리고 간 양 떼들이 있는 로마에서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깨닫고 제가 다시 로마로 가겠습니다. 하며 목숨에 연연하는 자기 허물을 뉘우치고 다시 로마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박해로 인해 십자가형을 선고받았는데 베드로가 십자가에 달릴 때 내가 어찌 감히 주님이 달려 돌아가신 모습 그대로 죽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형 집행자들에게 나를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죽여 달라고 요청하여 그대로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때가 가톨릭교회 전승과 베드로행전에 따르면 A.D. 64년 또는 67년입니다.
이 일화는 폴란드의 소설가 시엔키에비치(Henryk Adam Aleksander Pius Sienkiewicz, 1846.5.5.~1916.11.15.)가 1895년 쓴 소설 [Quo vadis. Powieść z czasów Nerona]를 통해 유명해졌습니다.
이 일은 오래전에 성경에 예언된 일입니다.
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띄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가 우리에게 남기는 교훈들 |
벧후 0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 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자라 가라(αὐξάνετε). 미완료 형으로 계속해서 자라가야 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신앙인이 단순히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으로만 만족할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은혜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의 지식이 자라가기를 권합니다. 자기의 믿음이 성숙하지 못함으로 주님의 가슴에 못 박는 일을 많이 하였기 때문입니다.우리도 베드로의 모습을 통해서 주님 앞에서 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웁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날로부터 지금까지 얼마만큼 내 믿음이 자랐는가? 라는 질문을 해 보십시오.
아무리 오래 동안 교회를 다녀도 믿음이 자라지 못하여 그저 구경꾼이나 아니면 남의 일감이 되어있는 것은 아닌가를 돌아보십시오. 그렇다면 심히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나님, 나의 믿음이 계속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라는 고백하는 가운데 우리 모두 베드로처럼 변화되는 일꾼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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