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21년 말씀

나는 미래를 내다보는 사명자입니다(빌 03:10~16).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1. 11. 27.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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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첫째 과거에 얽매여 사는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의 가치관은 율법에 얽매어 현실을 부정하는 삶이었습니다.

둘째 현실에 얽매여 사는 사두개인들입니다. 그들의 가치관은 믿음을 현실의 이해타산과 연관하여 언제든지 타협하는 삶이었습니다셋째 미래지향의 예수님 제자들입니다. 그들의 가치관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현실의 이권도 바라보지 않고 오직 미래의 복음 전파에 몸을 던지는 삶이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 가치관이 무엇입니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미래지향의 비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미래지향의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행복한 앞날을 위해 자신의 장점과 재능을 던지는 삶이 미래지향의 삶입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특별히 두 가지 정신이 필요합니다. 창조 정신과 개척 정신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런 정신을 품었기에 이스라엘 조상이 되었고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의 조상도 되었습니다(04:11~12).

 

아브라함이 75세에 부름을 받아 175세에 삶을 마치기까지 백 년의 삶이 창조 정신 개척 정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른 시점과 그의 출발점을 보겠습니다.

 

창 12:0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0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떠나라는 말은 창조 정신, 개척 정신을 가진 자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일에는 결단력이 필요합니다이 길을 가는 사람은 무척 외롭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 길에 들어섰으면 힘들어도 가야 합니다. 불평의 소리가 들려도 가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가야 합니다.

과거에 얽매인 사고방식은 미래의 행복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제목을 나는 미래를 내다보는 사명자입니다. 로 정했습니다. 말씀 속에서 창조 정신 개척 정신 품기를 바랍니다.

 

 

 1. 사명자는 과거지향의 의()에서 나와야 합니다.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미래를 품은 사람은 삶에 대한 자기 가치관과 세계관이 분명합니다. 세계관이란 세상을 보는 안목을 자기 가치관으로 반응하는 일을 말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 중에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바로 알고 사는 분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신령한 목적이 이끄는 삶 그대로 살아갑니까? 그렇게 살면 그 사는 만큼 좋은 열매를 맺습니까? 제가 복을받는교회 여러분에게 세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첫째 나는 누구입니까? 신분 말입니다. 둘째 나는 과연 중요한 존재입니까? 꼭 필요한 사람이냐 말입니다. 셋째 나의 위치는 어떠합니까? 영향력이 있는 사람인가 말입니다.

이 세 가지 질문을 항상 자신에게 던지며 살 때 삶의 방향이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역할도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게 될 것입니다그런데 아직도 낡은 생각, 박물관에나 있어야 할 구습에 속한 생각을 든든히 고수하며 살기를 원합니까? 내 낡은 생각, 폐쇄된 생각을 비워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을 넘어가면 안 됩니다. 남이 하는 걸 보니 안 되더라. 다른 교회 하는 걸 보니 안 되더라. 그래서 우리 교회도 안 된다는 생각 말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풀어가야 합니다.

 

13절은 사도 바울이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기록해 놓은 12절을 반복하는 구절입니다반복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빌립보교회 성도 가운데 일부가 작은 은혜를 받고서는 내 믿음이 최고라고 선전하는 그 교만을 시정하기 위함입니다. 이들은 바울도 온전한 분이지만 우리도 이만하면 완전하다며 교만에 들고 말았습니다.

이런 자들을 향해 바울은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않는다. 전에 한 모든 일은 다 잊어버렸다. 나는 조금도 의로운 것이 없다. 이렇게 자기 선언을 합니다.

 

잊어버리고(επιλανθανομενος 에필란다노메노스). 바울은 과거의 일이 자신의 미래를 발목 잡는 일 되지 않도록 노력한다는 의미입니다바울은 일찍부터 몇 가지 특권을 지녔습니다.

바리새인, 율법 학자, 로마 시민권 등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장점이 혹 믿음의 경주에 방해된다면 과감하게 내려놓겠다고(07~08) 이미 선언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훈련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눅 09:62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손에 쟁기를 붙들고 밭을 가는 목적은 곧은 고랑을 내는 일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농경 문화의 산물인 농기구를 통해서 전하시려는 뜻을 잘 헤아려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이 신경을 써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자기 관리입니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사명자는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줄을 알고 일합니다나는 아직도 멀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자기 부정이 필요합니다.

바울처럼 말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 누구입니까대부분 바울이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이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자기 관리를 잘했느냐 하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고전 15:31). 이 고백이 나를 과거의 의에서 해방합니다. 이 고백이 교회를 살립니다. 이 고백이 교회 부흥의 길목입니다.

 

 

 2. 사명자는 교회 부흥을 미래지향으로 도전합니다.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앞에 있는 푯대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푯대는 신앙인에게 여러 의미로 쓰일 수 있지만 오늘 말씀에서는 하늘나라의 상급으로 저굥할 수 있습니다.

미래지향의 성도는 교회의 부흥을 책임집니다. 미래를 품은 성도가 미래를 열어갑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믿음으로 헤쳐나갑니다. 미래를 품은 성도는 모두에게 용기를 줍니다.

미래지향의 삶을 설계하는 성도는 현재의 삶이 고통스러워도 잘 이겨냅니다교회의 미래를 품고 충성의 열매를 맺는 일에 전념하여야 합니다. 만일 비전을 넘어 미래를 환상으로 보려는 일까지 들어가면 그때는 위험을 만날 수 있습니다이단의 길목에 들어서기 때문입니다. 자칫 이장림의 다미선교회(1992.10.28.) 같은 격이 될 수 있습니다.

 

미래를 내다보고 믿음으로 충성하는 일까지가 내 영역입니다. 더는 벗어나면 교회 혼란 메이커 됩니다복을받는교회 성도 여러분, 기도 제목이 무엇입니까? 교회를 놓고 열심히 기도합니까?

멀지 않은 날의 복을 누리기 위해 충성합니까? 그러면 하나 정리합시다지금까지 다른 사람보다 좀 잘했다고 여겨지는 것 나름대로 충성했다고 자부심이 드는 것부터 내려놓읍시다. 가지고 있으면 걸림돌 될 가능성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과거의 좀 잘했다고 인정받는 일을 과감하게 내려놓았습니다. 13절 다시 보겠습니다.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우리가 잊어야 할 과거는 두 가지 형태입니다. 첫째는 자기 허물에 관한 일입니다. 부끄러운 과거 말입니다. 바울도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과거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 믿는 사람을 핍박하고, 살인까지 서슴없이 한 과거입니다이런 일을 위해 다메섹으로 가다 예수님을 만난 후 회개하여 다 정리하였습니다(09). 우리에게도 부끄러운 과거가 있습니다. 회개로 정리하고 용서받으면 됩니다. 만일 과거의 허물에 계속 잠겨 있으면 어떻게 교회 일에 나설 수 있습니까?

 

둘째 자기가 잘했다는 의에 관한 일입니다. 이것을 완전히 잊어야 합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만난 후 쌓은 업적들이 대단합니다무엇보다 기독교의 교리를 체계화하였으며, 세 차례 선교 여행을 통해서 많은 제자를 얻었고,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모든 과거의 자랑거리 목록을 깨끗이 비웠습니다.

바울에 비하면 우리는 내세울 만한 의가 있습니까조금도 없습니다. 교만할 만한 자리에 설 존재도 못 됩니다. 그러니 죽어 지내야 합니다. 대단할 거리도 없는데 목에 힘을 줘서 뭐 합니까?

 

눅 17:10 이와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길을 가다 한 맹인을 만났을 때 일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의 죄입니까? 그의 부모 죄입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09:01~03)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맹인이 된 원인을 캐는데 집중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 이 맹인을 치료하여 생을 새롭게 열어 줄 것인가에 집중하셨습니다. 미래지향의 메시지입니다.

우리 모두 혹 작은 영광과 업적이 있을지라도 그만 내려놓읍시다. 오늘에 충실하며 교회의 미래를 품고 달려갑시다. 과거지향의 삶이 아니라 미래지향의 삶을 삽시다.

 

 

 3. 사명자는 교회 부흥에 걸림돌 되는 거리를 제거합니다.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온전히(τελειοι) 이룬 자들이란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일상에서 말하는 온전은 완전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온전은 그런 절대 완전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행한 일과 믿고 난 후를 비교할 때 이만큼 성장했다는 뜻입니다(고전 02:06, 04:13). 정리하자면 아직도 멀었다는 의미입니다예수님을 구원의 주님으로 믿는 성도는 하나님께 속한 천국 백성입니다. 천국 백성임에도 세상에 사는 동안은 완전에 이른 자가 아닙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숙해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세상에 머무는 동안 죄인의 속성에 지배를 당합니다. 그래서 혹 내게 교회 일에 걸림돌 되는 일 없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엡 0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이 부분을 잘 보십시오. 아무리 믿음의 공동체 안에 있는 성도라도 완벽한 일치를 이루기가 쉽지 않음을 밝힙니다각자 생각하는 일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상 교회의 속성은 불완전이며 그 속에 때로는 불협화음이 수시로 일어납니다(04:01~02). 불협화음으로 인한 충돌이 빌립보교회에만 일어났습니까? 에베소교회에도 일어났습니다.

안 일어나면 좋겠지만 지상에 있는 교회는 어쩔 수 없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04:26) 하였습니다.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이 부분은 교회에서 공동체 멤버로 만나 일을 하는 가운데 얼마든지 충돌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안내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걸림돌 같은 허물이 내게는 없고 상대에게만 있다고 여기는 그 마음을 치료받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허물이 있기 마련입니다(03:10).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에게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06:04)고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산상보훈을 통해 자기 허물에 관한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마 07:0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본문 마지막 16절 봅시다.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믿음의 경주를 시작하였으면 어디까지 왔든지 간에 멈추지 말고 계속 달리라는 안내문입니다. 만일 믿음의 법칙을 벗어난 일이 있으면 고쳐가면서 달리라는 안내문입니다탈무드에 나오는 말입니다

반성할 줄 아는 사람이 서 있는 땅은 가장 훌륭한 랍비가 서 있는 땅보다 더 고결하다. 그렇습니다. 좋은 말입니다사람에게 주어진 일 중에 가장 큰 복은 깨달음과 반성입니다.

반성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과 왜 그렇게 살았는지를 깨닫는 일입니다내가 먼저 바꾸지 않으면 신령한 효력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바꾸라고 요구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나만 바꾸면 됩니다. 왜 바꾸지 않느냐고 손가락질하는 것은 비난입니다. 비판이나 비난을 통해서는 아름다운 사회,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를 가꾸어 갈 수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복을받는교회 성도 여러분, 노인과 청년의 차이를 아십니까? 혹 자는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믿으면 청년이다. 그러나 사람을 의심으로 대하면 노인이다우리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고 있으면 청년이다. 그러나 예로부터 내려오는 편견에만 사로잡혀 있으면 노인이다.

우리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다면 청년이다. 그러나 공상만 일삼고 있으면 노인이다. 우리가 아직도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면 청년이다. 그러나 만약 대가를 지급하지 않고 행복만을 추구한다면 노인이다. 그러면 여러분은 청년입니까? 노인입니까?

 

살아있는 믿음, 역사하는 믿음은 미래를 품고 나가는 데 있습니다. 미래지향의 믿음은 현실을 넘어설 수 있고 고통의 상황도 넘어설 수 있습니다. 믿기 때문에 참고, 믿기 때문에 실망하지 않고, 믿기 때문에 고난을 극복합니다.

내 믿음의 초점을 과거형에 맞출 것이냐? 미래형에 맞출 것이냐는 내가 결정하면 됩니다. 행복의 열매는 과거지향의 믿음이 아니라 미래지향의 믿음에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어디를 겨냥합니까? 여러분의 눈을 들어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십시오. 그리고 중단하지 말고 달려가십시오.
내 현실의 삶을 돌아보면서 내 모습을 하나하나 바꾸어갈 때 세상은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어갑니다. 변화는 나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우리 모두 현실의 문제에 갇힐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실 일을 내다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실 은혜를 맛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