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21년 말씀

아브라함은 믿음의 모델입니다(롬 04:16~26).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1. 8. 14.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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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시대의 인물로 목사의 설교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한 인물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입니다. 성도들도 설교에서 아브라함의 이름을 가장 많이 듣습니다. 이 아브라함이 갈대아인의 땅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12:01)는 부름입니다. 이에 아브람이 칠십오 세 때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부름을 받고 고향을 떠날 때의 일정을 한번 보겠습니다. 하란에서 가나안까지는 약 600Km쯤 되는 먼 거리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직업이 목축업입니다.

당연히 가축을 거느리고 나왔습니다. 아주 천천히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을 건너 시리아로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잠시 숨 고르기를 하고 다시 광야를 횡단하여 다메섹을 거쳐 가나안에 들어왔습니다. 약속의 땅까지 오는 과정이 매우 힘들었기 때문에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고 표현합니다(창 12:05).

 

하나님께서 가라 하신 곳이니 휘황찬란한 환경이 기다리고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텃새 심한 낯선 환경에 외롭고 고달픈 생활만 기다렸습니다. 이민자의 삶은 한 마디로 고달픕니다. 살기 위해서

그곳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 풍습에 동화되어야 합니다.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특별 목적을 띄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목적 있는 인생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진리를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바울은 할례나 율법준수와 같은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때 구원을 받는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구원을 오해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 구원받은 거야라며 함부로 진리를 남발합니다. 물론 구원받는 길은 쉽고 간단합니다.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도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까? 그 말 한마디로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는 다른 길이 있다는 말입니까? 예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고백한 그런 믿음을 소유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제목을 「아브라함은 믿음의 모델입니다.」로 정했습니다.

 

 

 1.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환경에서도 바라고 믿었습니다.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김삼일 가족 여러분, 믿음과 현실은 자주 충돌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믿음은 때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현실을 넘어서라고 요구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타협할 때가 있습니다.

믿음의 의지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18절 말씀을 잘 보십시오. 바울은 아브라함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은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현실 환경과 육신의 한계를 뛰어넘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랄 수 없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의 가정사를 창세기에서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창 11:30을 보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롯과 함께 가나안에 들어올 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 12:02).

또 횃불 언약을 맺을 때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창 15:04)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구십 구세 때 일입니다. 창 17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개명시키면서 내가 사라에게 복을 주어 아들을 낳을 것이며 열국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 17:16).

 

그때도 아브라함이 웃으며 내 아내 나이가 구십인데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하갈에서 난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합니다. 라고 청합니다(창 17:17, 18).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마므레 상수리 숲에 거할 때 천사 셋이 소돔과 고모라를 불심판 하러 가다 아브라함의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약속합니다.

 

창 18:10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천사가 이 말을 할 때는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거한 지 24년쯤 되었을 때니 이제 약속의 때가 가득 찬 때입니다. 반면 사라는 아들 낳는 것은 현실 한계를 넘어섰고 생리도 끊어져서 완전 포기상태입니다.

그런데 천사가 일 년 후에 아들 낳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 소리를 사라가 집 뒤에서 듣고 웃었습니다. 덕담으로 받은 셈입니다.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하였을 것 같습니다. 아이고, 무시라. 내 나이가 얼마이고 생리도 끊어진 지가 언제인데? 아이고, 무시라. 사라는 천사의 개그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사라에게 말합니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창 18:14)?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는 말은 바로 가나안에 거할 당시 사라의 육신의 한계를 말합니다.

 

처음에는 아브라함도 사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살던 그 시절 고대 근동 지방은 자식을 신의 선물로 생각하였습니다. 아이가 없는 것은 신의 은총에서 제외된 자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방 족속과는 달리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은 그분의 세밀한 계획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씨는 하나님의 예정을 따라 잠시 대기 중에 있다가(창 17:01~08) 마침내 힘차게 올라옵니다.

 

19절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중간 부분을 생략하면 아브라함이 믿었으니 이렇게 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세상의 희망은 끊어졌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 줄이 끊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믿음 줄 하나만 잘 붙들고 있으면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이 믿음 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관리할 수 있습니다.

 

 

 2. 아브라함은 흔들리는 믿음을 말씀으로 붙들었습니다.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다는 말은 믿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이 견고하지 못해서 흔들리던 때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 흔들리던 환경이 무엇인지 아실 것입니다. 한번 간단하게 살펴볼까요?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근을 만났습니다. 기근(飢饉)이란 흉년으로 인해 먹을 것이 제대로 없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양식이 넉넉한 애굽으로 잠시 이주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라에게 말합니다. 그대는 미모의 여자이니 애굽 사람이 나를 죽이고 그대를 빼앗아갈지 모른다. 우리 이렇게 하자며 한 해결책을 제안합니다.

 

창 12:13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절대 내서는 안 될 꾀를 내었습니다. 대단히 못난 사람입니다. 아내를 희생시켜 자기가 살겠다는 계획이야말로 매우 악한 일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런 일을 또 벌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헤브론에 거하다 그 지역을 침입한 헷 족속(23장)으로부터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네게브 지역 그랄에 옮겼을 때 일입니다.

 

창 20:02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아브라함이 아무리 생명의 위협을 느껴도 어떻게 아내를 두 번이나 오누이 관계로 만듭니까? 아브라함은 이 일로 오늘날까지 못난 남자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입고 가나안까지 왔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수없이 체험하였음에도 불편한 현실 앞에서 믿음이 그만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뒤에서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십시오. 무너지는 자리에는 들지 않았지만, 환경에 무릎을 꿇고 그만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그 흔들린 믿음으로 아내를 욕되게 하였습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는 힘은 원주민들과 비교할 때 미미합니다. 헷 족속은 아브라함의 힘을 강 건너온 사람이라는 히브리인 정도로 낮추어 버립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의 현실은 흔들리는 믿음, 불안한 믿음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와서 나름 힘은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 힘은 막강한 세력을 갖춘 국가 수준의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체제를 갖추는 때가 언제입니까? 훗날 야곱 일가가 애굽에 들어갔다가 출애굽 하여 가나안에 다시 들어오는 때입니다(창 15:16). 그동안 아브라함은 믿음이 흔들리는 환경을 수없이 만납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과 소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으면서 흔들리는 믿음을 이겨냅니다.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우리도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음부터 안 흔들리면 되겠지 라는 안일함 속에 머물려고 합니까? 믿음의 안일함은 믿음의 파선(破船)으로 가는 길목임을 아셔야 합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내일부터 믿음을 바로 세우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늘 이 순간부터 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흔들리는 믿음을 붙들어 매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절망 같은 상황에서도 요동하지 않고 믿음도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 줄을 붙잡았습니다.

 

 

 3.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약속하셨습니까? 그 약속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된다는(17) 약속과 둘째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티끌과 같이 많을 것이라(18)는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이 75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175세의 삶을 마치기까지(창 25:07) 백 년을 이 두 가지 약속을 받드는 일에 순종하였습니다. 이 약속을 받들면서 때로는 믿음이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역사에 오점을 남기는 일도 더러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의 중심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일에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약속하신 일에 대해 확신 있는 믿음으로 밀고 나갔습니다. 22절을 원문으로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διο) 다음에 이어지는 단어가 카이(και) 입니다. και는 보통은 접속사 그리고를 뜻하나 22절에서 και는 접속사가 아닌 역시라는 의미의 부사로 쓰입니다. 바울이 왜 이 단어를 사용하였습니까?

 

09절 하반을 잘 보셔야 합니다. 거기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는 말씀을 반복하기 위해서입니다. 21, 22절을 정리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자기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 확신과 순종이 하나님 보실 때 의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의로(δικαιοσύνην 디카이오쉬넨) 여겨졌느니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일이야말로 믿음의 길을 가는 아브라함이나 우리에게 최고의 핵심 가치입니다.

기독교의 절대 진리인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진리를 신학 용어로 이신칭의(以信稱義)라 합니다.

또 예전에는 이를 이신득의(以信得義)라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인정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신득의라 하지 않습니다. 혹 믿음이 공로가 되어 자기가 구원을 얻은 것처럼 오해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교리서신 갈 02:16에서 이신칭의의 핵심 가치를 이렇게 정리하였습니다.

 

갈 0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사람이 구원을 받는 진리는 선한 행실이나 율법의 행위로 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절대 의의 기준에 전혀 도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외형으로 드러나는 행위만을 따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속에 있는 생각과 마음의 태도를 따집니다. 하나님의 의의 기준이 이렇습니다. 

따라서 사람의 노력으로는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키기에 불가능합니다. 만일 사람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한다면 이는 완전 절망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믿음의 길이 때로는 힘들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비난하거나 비웃는 사람도 주위에 더러 있습니다.  믿음으로 나아가는 성도의 삶이 매우 고달프게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그중에 힘들다고 하나님의 손을 그만 놓아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두가 내 힘으로 믿음 생활을 하는 가운데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의심과 유혹이 밀려올수록 예수님 한 분만 붙들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아브라함이 우리의 믿음의 모델이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믿음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말씀을 바탕으로 자기의 삶을 디자인하였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행실 하나하나가 의롭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이 의롭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말씀을 통해 장차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았습니다. 세상에서 부귀영화의 소망이 아니라 영원한 본향 천국의 소망을 바라보았습니다(히 11:13, 14).

영원한 본향을 사모함으로 세상의 미련을 떨쳐 내었습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성도는 세상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최고 가치의 기업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모델로 삼는 자를 위하여 역시 한 성을 예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 성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여러분, 마침내 믿음의 조상 반열에 오른 아브라함의 길을 따라갑시다. 그곳은 참된 안식과 평안함이 있는 천국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성도도 믿음이 흔들릴 정도의 의심과 유혹이 찾아옵니다. 굳게 붙들고 있는 약속의 말씀을 놓아버리고 싶은 충동도 수없이 찾아옵니다.

김삼일 가족은 그럴수록 약해지려는 유혹을 떨쳐버리고 견고한 믿음 위에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의심의 유혹을 극복하고 확신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약해질 때마다 하나님께서 찾아주심을 체험하였습니다.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우리도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아브라함을 믿음의 모델로 삼고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