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5일 한국의 땅콩이 세계의 명성을 얻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영국 가디언지가 ‘미친 땅콩의 분노’라는 제목으로 소개한 그 유명한 땅콩 회항 사건입니다.
미국 뉴욕 JFK공항에서 출입문을 닫고 인천공항을 향해 이륙을 준비하던 대한항공 086편 여객기에 마침 대한항공 부사장 조 모 씨가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승무원의 서비스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땅콩 봉지를 뜯지 않고 서비스한다는 이유입니다. 조 모 씨는 승객이 보는 앞에서 승무원을 밀치고 땅콩을 집어 던지며 입에 담을 수 없는 심한 욕설을 하다 무릎까지 꿇게 하였습니다.
즉시 객실 승무원 책임자 박창진 사무장이 와서 콩 알레르기가 있는 승객이 더러 있으므로 규정상 땅콩 봉지를 뜯지 않고 서비스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러자 그에게도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라며 소리를 지르고 서비스 메뉴얼 파일로 손등을 치고 어깨를 밀쳤습니다. 이렇게 되니 활주로를 향해 가든 비행기는 탑승구로 되돌아왔고 조 부사장은 박 사무장을 내리게 하였습니다.
이 땅콩 회항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 사회에 갑질이란 유행어를 정착시켰습니다. 순간의 혈기를 이기지 못한 결과는 많은 사람에게 깊은 원망 거리를 남겼습니다.
이 일로 인해 한진그룹 경영권에서도 밀려난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정신 상태를 해결 못 하면 또 사고 칠 가능성 있습니다. 국민 정서 잘 헤아려 많은 사람에게 깊게 남긴 원망 거리를 반드시 해결하여야 합니다.
오늘 말씀도 원망들을 만한 일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예배에 임하기 전에 혹 이웃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을 하였는가를 돌아보는 자기 성찰입니다.
혹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습니까? 잘 돌아보십시오. 예수님은 김삼일 가족에게 혹 그런 일이 있으면 잘 해결하고 예배에 임하라 하십니다. 그래서 말씀 제목을 「원망들을 거리를 먼저 해결합시다.」로 정했습니다.
1. 우리 모두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습니다. |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김삼일 가족 대부분이 믿음 생활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은 시간만큼 믿음이 성숙해 있습니까? 아무래도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저의 경우를 돌아보면 세상 사람에게도 우리 믿음의 가족에게도 원망을 산 일이 더러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모자란 저의 품성으로 인해 상처가 되거나 원망할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모자라는 저의 품성이 걱정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저는 자신을 쳐서 주님께 복종시키는 생활하기를 다짐합니다. 성화(聖化)의 진행 과정에서 자신을 점검하고 다듬어 가는 일에 매진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본문은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이 부분을 잘 보십시오. 우리의 살아가는 현 상태를 대변하는 말씀입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자기 의를 앞세웁니다. 예수님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자기 의를 내세우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완벽하다고 자부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돌직구를 날리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마 23:13, 15, 16, 23, 25, 27, 29).
롬 01:21~23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알되(21)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져 미련한 마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도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22) 여깁니다. 바보이면서 자기가 자기를 바보라고 생각 안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스스로 지혜 있다고 여기는 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규정합니다. 죄악의 욕심이 마음 가득히 채워져 있으므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런 마음의 상태이니 하나님의 자리에 우상을 세워놓고 섬기는 생활을 하는 겁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이 말은 유대인의 속죄제를 뜻합니다. 죄 사함을 받기 위한 속죄제는 희생제물을 절대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그 희생 제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제사를 지내는 자의 정결한 양심, 거리낌 없는 양심입니다. 그 거리낌을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사람 앞에서 거리낌 없는 마음이 있습니까? 사람은 모두가 죄인입니다. 우리 가운데 나는 죄인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전합니다.
롬 03:10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죄인이기 때문에 허물이 있습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모난 부분들이 튀어나옵니다. 자신을 잘 조절하기를 원하지만 마음대로 안 됩니다. 여기에 우리의 고민거리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과 관계에서, 또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과의 관계에서 심성이 컨트롤 안 되자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롬 0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 원망 거리는 내가 먼저 화목을 청해야 합니다. |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형제와 화목하고(διαλλαγηθι 디알라게디). 화목하다. 라는 동사는 변경하다, 바꾸다 라는 뜻입니다. 불편해진 얼굴을 고친다 이런 의미로 보면 되겠습니다. 먼저 가서 와 화목하고를 보십시오.
화목이란 단어에 적극성이 들어 있습니다. 먼저라는 말과 화목하다. 라는 말의 관계는 형제처럼 짝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화목하다. 라는 이 동사는 상호 적대 관계를 먼저 양보해서 푼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보다 형제와 화목하고 난 후 거리낌 없이 드리는 예배가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현실의 예물 가치보다 형제와 화해하는 사랑의 가치가 더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물은 어떠해야 합니까?
형제를 위한 따뜻한 사랑과 격의 없는 화해와 생명을 내놓을 정도의 정신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25:40). 결국 24절에서 강조하는 예배는 형제와 이웃에게 덕을 끼치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믿음의 가족이 엄숙하게 예배를 드리다 혹 마음에 불편한 일이 생각납니까? 원망들을 만한 일이 계속 떠오릅니까? 바로 화목의 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막 11:25 서서 기도할 때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때로는 상대가 먼저 까닭 없이 나를 아프게 할 때가 있습니다. 오히려 비난하며 도리에 어긋나게 화를 낼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까지 우선으로 해결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 죄책은 오히려 상대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는 항상 하나님과 수직 관계에 힘을 써야 하며 동시에 사람과 수평 관계에도 최선의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러면 말이나 이론보다 실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화목(和睦)하게 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제가 화목을 한문으로 풀어 보겠습니다. 현재 사용하는 개역 성경은 영어에서 중국 한문으로 중국 한문에서 우리 한글로 번역되어 들어왔습니다. 우리나라도 한문 문화권이기 때문입니다.
형제와 화목하고(和睦). 화목에서 화(和)는 밥(禾, 벼 화)을 함께 먹는(口)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목(睦)은 화목하다는 의미로 눈길(目)이 부드럽고 다정한 사이를 가리킵니다.
화목은 품사에서 명사로 쓰이나 서로 뜻이 맞고 정다운 관계로 수식하면 형용사가 됩니다. 그러므로 화목이란 명사를 형용사로 전환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화목의 본래 가치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화목을 현실로 정의하겠습니다. 편안하게 마주 보며 밥을 먹는 것이 화목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화목을 만드는 일에 등한히 하는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화목이 파선되었으면 복구하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화목을 복구하려는 밥을 먹으려 하지 않습니다. 복구를 위한 통화도 하지 않습니다. 복구를 위한 얼굴도 만들지 않습니다. 화목이 없는 예배 주님께서 받지 않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가인과 아벨의 제사 아시지요.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받으시지 않았습니다. 그때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면서(창 04:05) 화목이 파선되었습니다.
그러자 가인(ןיק)이 어떻게 행동합니까? 아벨((לבה,)에게 들로 가자고 합니다. 왜 들로 가자고 합니까? 그때는 성소나 성전 시대가 아니라서 들에 제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아벨에게 자기들이 제사를 지낸 장소로 가보자고 했고 아벨은 별다른 의심 없이 들판 제단으로 따라갔다가 죽임당했습니다. 원망은 죽음을 가져오는 무서운 감정 상태입니다.
3. 원망 거리는 반드시 풀어야 합니다. |
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어떤 원망에 관한 일이라도 반드시 풀 것을 명합니다. 이웃이나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 예배에 지장을 주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자가 갖추어야 할 기본 요소가 무엇입니까?
신령과 진리입니다(요 04:24).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어떤 원망이나 시빗거리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본의 아니게 그런 일이 일어나면 속히 푸십시오. 그리하여야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원망 거리를 풀지 못하면 예배에 실패자가 될 수 있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교회 들어오면 묵상기도부터 하지 않습니까? 그때 무엇을 기도합니까? 어떤 분은 속독법으로 책 읽듯이 빨리 훑고 지나가기도 합니다.
물론 나름의 기도 제목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형제에게 원망이나 불평 들을만한 일이 있는가를 살피십시오. 우리는 부족한 품성을 지녔기 때문에 원망 거리가 있습니다.
자신이 알든 모르든 피치 못하게 원망 거리 만든 일이 떠 오를 것입니다. 자기 합리화를 하지 말고 하나님께 솔직하게 잘못을 고하십시오. 그 상처받은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만져주시도록 말입니다.
26절 말씀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원망에 관한 오늘 본문을 26절로 결론 내립니다. 사람 간에 맺혀져 있는 원망 거리는 반드시 풀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회와 로마의 행정 체제 아래서 통용되던 화폐단위를 보십시오. 그 가운데 한 푼이라는 단위가 있습니다.
한 푼(κοδραντην 고드란텐)은 로마의 화폐단위로서 성경에는 고드란트로 나오며(마 12:42) 앗사리온의 ¼에 해당합니다. 앗사리온은 예수님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1데나리온의 1/16 정도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통용 주화 500원에도 채 못 미치는 가치입니다.
예수님께서 26절을 통하여 형제 사이에 원망 거리는 작은 것 하나라도 남김없이 갚아야 할 채무 수준으로 비유하십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오해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예배드리기 전이나 아니면 예배를 드리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 있는 것을 깨달았다고 당장 자리를 박차고 해결하러 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배보다 화목이 우선이다. 이런 식으로 여기고 예배드리다 나가면 안 됩니다. 가장 좋은 일은 예배드리러 오기 전에 원망 거리 해결하십시오.
예배가 시작되었으면 겸손히 예배를 마치고 가서 원망 거리를 풀면 됩니다. 형제와 화목 하는 일에는 자존심 내려놓으십시오. 부족함과 잘못을 시인하고 이해와 용서를 구하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원망 거리를 만든 주체가 누구입니까? 바로 나입니다. 22절부터 보면 형제라는 단어가 네 번이나 반복됩니다. 믿는 형제끼리 감정싸움이 되지 않도록 특별히 신중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화목을 명하시는 데도 감정을 못 풉니까? 그러면 책망과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요일 0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제가 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전에 한번 낸 문제이니 기억이 나실 것입니다. 어떤 단어인지 맞히어 보십시오. 산에 가면 칡넝쿨이 있습니다. 이 칡이 오른쪽으로 나무를 감아 올라갑니다.
반면 등나무 줄기는 왼쪽으로 나무를 감아 올라갑니다. 그래서 칡넝쿨과 등나무 줄기가 오른쪽 왼쪽 함께 얽혀서 도저히 풀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를 한자로 무엇이라고 하지요? 갈등(葛藤)입니다.
칡 갈(葛) 등나무 등(藤)입니다. 칡과 등나무가 서로 얽히어 있으면 풀 수 없습니다. 꼭 풀어야 한다면 그것은 칡과 등나무 밑 부분을 자르면 됩니다. 결국 두 가지가 시들어 죽고 말겠지요.
고후 0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대부분 성도가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책임 다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음을 자랑으로 여기는 분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런 분들에게 새로운 자기 혁신을 안내합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 안 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김삼일 가족은 자존심을 내려놓고 먼저 양보하는 가운데 화목한 관계를 잘 이루어가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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