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28일 주일을 기독교의 절기로 종려주일(棕櫚主日)이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많은 사람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때 외친 구호가 호산나입니다(ὡσαννά 요 12:13). 당신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셨으니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 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오늘은 기독교의 절기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주님으로 오셨음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사순절(四旬節) 여섯 번째 주일이며 한때는 호산나주일이라 불렀습니다.
또 이전 고대 교회에서는 세례지원자주일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세례지원자주일이라 부른 것은 부활주일에 세례받기를 희망하는 자가 이 주일에 기독교 신조와 주님의 기도 및 고난의 의미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한 주간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당한 여러 고난을 생각하며 지내는 주간입니다. 믿음의 몸부림을 치는 주간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출발점이 무엇입니까? 새벽기도부터 나오는 일입니다. 우리 김삼일 가족은 상황에 따라 새벽기도에 나오는 일이 고난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가짐을 가지면 어떨까요? 이번 주간은 죽었구나. 그래야만 마음 편하지,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짜증 날 수도 있습니다. 진정으로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생각하고 그 고난에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기록한 저자가 누구입니까? 베드로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일원으로 부름을 받았으며 주님의 신임을 크게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저주와 맹세까지 하며 부인한 일이 있습니다(마 26:69~75).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믿음으로 연단을 받은 베드로는 마침내 굳건한 믿음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베드로가 권하는 말씀을 따라 우리 김삼일 가족도 믿음의 길을 잘 걸어가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을 「예수님의 길을 따라갑시다.」라는 제목을 정했습니다. 잘 실천하기를 축원합니다.
1. 우리도 예수님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 자취(ιχνεσιν)를 따라오게. 자취란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해 친히 고난의 길을 가신 흔적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 길을 따르도록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당연히 감당하여야 할 일입니다(마 20:28). 김삼일 가족 여러분, 현재 고난 겪는 일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웠을 때가 언제입니까?
성경은 고난의 상징 인물로 욥을 소개합니다. 그에게는 열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한꺼번에 사고를 당해 죽었습니다. 소유하고 있던 그 많은 재산도 단번에 사라졌습니다. 이쯤 되면 화병으로 죽을 정도의 상황을 만난 셈입니다. 그런데도 욥은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으니 알몸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하며 원망조차 하지 않았습니다(욥 01:21, 22).
본문이 속한 베드로전서는 로마 제국 네로[Nero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37.12.15~68.6.9] 황제 때 기록되었습니다. 이 네로는 16세에 즉위하여 31세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불행한 인물입니다. 네로가 즉위 10년이 지날 때쯤 한 날은 로마를 떠나 시골의 한 별장에서 파티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로마 시내의 한 낡은 목조 건물에서 불이 나 가난한 사람들 마을을 전부 불태웠습니다.
심지어는 부자 동네로 불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한 돌벽까지도 넘는 로마 역사상 최악의 화재입니다. 그때가 64년 6월 18일입니다. 로마 시내 14개 구역 중 10개 구역에 피해를 가져오고 인구 100만이 넘는 로마의 절반 이상을 집어삼켰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도 네로는 며칠 동안 계속 파티를 벌인 후 로마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화재로 집과 재산을 잃고 추위와 배고픔에 지쳐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향해 불이 꼴사납고 낡은 집들을 모두 치워버렸다. 이제 새 건물을 지을 자리가 생겼구나. 나를 위해 더 큰 궁전을 지어야겠다. 이에 화가 난 로마시민들이 분노하여 네로를 왕위에서 끌어내리려 합니다.
그 순간 네로는 그 분노를 잠재울 희생양을 찾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로마에 불을 질렀는지 알겠다. 기독교인이다. 네로는 자신의 왕위를 지키려는 이기심으로 화재의 책임을 기독교인에게 전가하였습니다.
그 말 한마디로 인해 기독교인을 향한 탄압의 잔인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악했습니다. 성도들은 체포되어 죽임을 당하거나 굶주린 야생 동물에게 죽임당하기 일쑤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베드로가 성도들을 위로하고 믿음을 북돋아 주기 위해 주님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자는 권면을 합니다.
이렇게 본문이 기록될 당시 모든 교회와 성도들은 네로 황제의 핍박으로 가장 지독한 고난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지독한 핍박을 가하는 네로와 로마 정부에 대해 성도들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그래도 주님이 가신 길을 가야 합니다. 그 길이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매우 어려운 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고난을 어떻게 감당하였습니까? 23절에 나옵니다.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예수님께서 재판받는 과정,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면서 병사들이 휘두르는 채찍에 맞으며 견디어 내신 예수님을 소개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므로 혹 주님 나라를 위한 고난이 나에게 주어졌다면 피하기보다는 감당하십시오. 그 고난의 형태가 어떤 것이든 감당하십시오. 그 고난의 종착점에는 신령한 복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2.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우리 죄를 담당(ανηνεγκεν 아네넹켄)하셨으니. 제단에 희생 제물을 올려놓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속죄 제물로 올려졌다는 의미입니다.
이어지는 우리로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는 부분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희생 제물이 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 희생 제물이 되셨다는 의미입니다.
여기 죄(αμαρτιαις)는 복수 형태로 나오고 이어지는 의(δικαιοσυνη 디카이오쉬네)는 단수 형태로 나옵니다. 이 부분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이는 넓게 적용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으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여 의를 획득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24절 마지막 부분인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라는 부분도 보십시오. 채찍(μωλωπι)의 본래 뜻은 매질로 말미암은 흔적을 의미합니다.
채찍의 결과는 나음 곧 치료로(ιαθητε) 이어지는데 우리 믿음의 가족 여러분, 이 문장 어디서 좀 본 것 같지 않습니까? 번쩍하며 머리를 스치는 구절이 안 떠 오릅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기록한 메시아의 고난장을 생각하면 됩니다.
사 53:0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 53:0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베드로가 구약성경 이사야 53:05절을 인용한 구절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B.C. 700년 전쯤 장차 오실 메시아께서 재판받는 과정에서 채찍에 맞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서 못 박혀 죽을 것을 내다보고 기록한 예언입니다. 베드로는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는 이유를 이사야 53장으로 대신합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우리의 허물 때문이라고 단정합니다. 허물이란 단순한 실정법에 대한 위반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대한 위반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거스르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 아래 놓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의 삭은 사망이고 하나님의 은혜는 주님 안에 있는 영생이라고 진단하였습니다(롬 06:23).
그러면 이런 상황에 놓인 우리의 마지막은 사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가 메시아에 대하여 예언한 찔리다, 상하다, 등은 단순한 상처가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 십자가형을 내린 자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의 실권자 총독 빌라도입니다.
당시의 이스라엘의 상황은 이미 로마 제국의 식민지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교권자 대부분이 무리를 동원하여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십자가형으로 처단할 것을 요청합니다.
무엇 때문에 십자가형을 요청합니까? 다른 사형법도 얼마든지 있는데 굳이 십자가형으로 기소해 죽이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시의 권력 집행관인 로마의 관료들과 유대교 교권자들 간의 의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권력자들은 속국인 유대인에게 언제든지 잘못하면 이런 식으로 처형하겠다는 로마의 힘을 보여주는 기회입니다.
반면 유대교 교권자는 예수님을 공개석상에서 처형함으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기대를 제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는 것은 겉으로는 사람의 뜻에 의한 것처럼 보입니다(마 27:23). 그러나 하나님의 뜻으로 보면 우리를 위한 구원의 계획입니다.
3. 우리도 목자이신 예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 부분도 베드로가 구약성경 이사야 53:06절을 인용한 구절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이 부분은 구원받기 전 우리의 모습으로 적용해도 되겠습니다. 구원의 길을 알지 못하는 인간의 비참한 상태 말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베드로는 전에(ποτέ 포테) 와 이제를(νῦν 뉜) 대비합니다. 구원받기 전 죄의 종으로 머물던 상태와 생명을 얻은 현재의 상태를 대조시킵니다.
베드로는 25절에서 무엇을 나타내려고 합니까? 한때는 몰라서 죄의 종노릇 하였으나 이제는 영혼의 목자 되신 예수님을 믿고 그분께로 돌아왔으니 다시는 세상 길 멸망의 길로 나가지 말라는 뜻입니다.
김해삼일 가족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건강한 믿음이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성공과 출세를 목적으로 삼는 생활 아닙니다.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는 생활도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현재 나에게 주어진 삶을 믿음으로 관리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로 인해 새 생명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전에는 예수님 밖에서 내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영혼의 목자이신 예수님 안에서 그 계획을 전하고 실천하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자신만을 위하던 이기심을 비워야 합니다.
비웠으면 현재 내가 가진 삶의 에너지를 이웃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죽어가는 영혼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다가가는 일이 때로는 해산의 수고와 같은 복음의 몸부림을 쳐야 할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가 전하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전에는 예수님 밖에서 세상의 것을 즐기며 지냈지만, 이제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것을 안내합니다.
벧전 04:0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03….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기독교는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의 희생 위에 세워졌습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기독교 신앙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고 그 구원을 이루기 위해 고난받으셨습니다. 그 고난은 바로 나를 위한 고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오, 주님,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으니 그 은혜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나도 주님 나라를 위해 십자가와 같은 길이라도 걸어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바울과 같은 고백도 해야 합니다.
갈 0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고려를 세운 왕건[太祖 王建, 877~943]이 20세 되든 젊은 시절 아버지 왕륭과 함께 궁예의 휘하에 들어갔습니다. 20여 년간 전쟁터를 누비면서 온가 고난과 죽음의 현장을 겪다 마침내 자기를 해하려던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세웠습니다.
이후 927년 11월 왕건은 군사 5천 명을 이끌고 동맹인 신라를 도우러 가다 대구 팔공산 공산(公山)에서 견훤의 책사 최승우의 지략에 말려들었습니다.
매복한 견훤의 군대에 속수무책으로 무차별 공격을 당하면서 죽음의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그때 자신의 3명 의제 중 한 사람인 신숭겸(申崇謙)이 왕건에게 의복을 바꿔 입자고 강권합니다. 그리하여 왕복을 입은 신숭겸이 왕건처럼 활동하며 무리를 유인하다 견훤의 군대에 의해 화살 받이가 되었습니다. 수급(首級)도 베임을 당했습니다.
반면 신숭겸의 군복을 입은 왕건은 몇몇 장수와 함께 무사히 그 현장을 탈출하였습니다. 공산전투가 끝난 후 왕건이 공산의 수천 시신 중에서 목이 없고 북두칠성 표식이 있는 신숭겸의 시신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목 없는 신숭겸의 시신이 곧 나의 시신이로다. 하고 울부짖었다 합니다. 신숭겸이 왕건을 대신하여 죽었으니 왕건이 죽은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바로 나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를 주님의 대속의 죽음이라고 합니다. 오늘 종려주일을 맞아 내 죄를 대속해 주신 예수님 은혜를 진정으로 감사합시다. 이제부터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고 구원의 복을 잘 관리합시다. 그리고 충성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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