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일 가족에게 두 가지로 묻습니다. 한 달 동안 대궐 같은 집에서 살다가 그 후에는 영원히 집도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되는 것과 한 달 동안 집도 없이 떠돌다가 그 후에는 영원토록 궁궐 같은 집에서 사는 삶이 있다면 어느 편을 택하겠습니까? 저는 후자를 택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고난을 조금만 견디면 나중은 더 아름다운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좀 힘들어도 때가 되면 좋은 일이 올 줄 믿고 그 기대감으로 행복한 삶을 삽니다.
한국 사회는 특별히 세계 어느 나라보다 일가족 자살 형태가 많습니다. 2019, 2020년 2년 동안 일가족 자살 형태를 보면 37건이나 됩니다. 최근의 일은 2020년 12월 19일 서울 용산 모녀 자살을 들 수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실직한 전직 저가 항공사 승무원 A(35) 씨가 생활고를 비관해 목숨을 끊었습니다. 몇 시간 뒤 죽은 딸을 발견한 어머니 B(63) 씨도 뒤따라 목숨을 끊었습니다. 현실 상황을 제대로 보면 채무를 해결하고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경제권이 주변에 분명히 있습니다. 한 마디로 소망이 없어서 일어난 일입니다.
정말 마음 아픈 일이지요. 우리가 장래의 소망을 품고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현실의 고난이 길면 얼마나 길겠습니까? 잠깐입니다. 베드로가 남긴 말을 보겠습니다.
벧후 03:0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예수님은 이 영원한 곳에 대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02). 이 영원한 집은 장래의 소망을 품은 자만이 들어갑니다.
그러면 그 영원한 날이 언제입니까? 성경은 그날을 우리에게 정확히 알려주지 않습니다. 다만 그때 될 일에 대한 징조만 안내합니다. 세상의 시간이 길다 한들 얼마나 길겠습니다. 잠깐입니다. 이 기간에 영원한 집을 잘 준비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제목을 「우리에게 영원한 집이 있습니다.」로 정했습니다.
1. 우리의 장막 집은 때가 되면 무너집니다. |
0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사도 바울은 땅에 있는 장막집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비교하여 설명합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소망의 삶에 대한 안내입니다. 바울은 장막(tent)을 만들어 팔아서 생활비를 충당하였습니다. 삶에서 자기가 직접 체험하고 있는 장막 제조업을 사람의 몸으로 비유합니다.
장막집(οικια του σκηνους). 장막(帳幕)이란 임시 거처라는 뜻으로 천막이라고도 합니다. 바울이 여기서 의도하는 장막은 사람의 육신입니다.
그리고 장막집이 무너진다는 표현은 사람은 세상에서 잠깐 살다가 가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무한한 삶이 아닌 정해져 있는 삶입니다. 사실 사람은 잠깐 정도 사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뭐가 대단하다고 목에 힘을 팍팍 줍니까? 잠깐이면 끝나는 인생인데 말입니다. 우리의 삶은 임시 보호소 같은 곳에서 지내다 떠나가는 존재임을 망각하지 마십시오. 이런 짧은 삶을 구약시대 모세는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시 90:09 우리의 모든 날이…. 순식간에 대하였나이다.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가끔 야외에서 텐트를 치고 지낸 일이 있으시지요. 정해진 일정 끝나면 아무리 재미가 있어도 텐트를 접고 돌아옵니다. 저는 우리의 삶을 세상에서 잠시 살기 때문에 텐트 인생 곧 장막 인생이라 부릅니다.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이 부분만 보면 사람의 평생이 허무합니다. 왜냐하면, 아직 까지는 생명 연한이 백 년도 채 안 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중국 역사상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를 끝내고 대륙을 통일한 진[秦]나라의 31대 왕 영정(贏政 B.C. 259~209)이란 인물이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해서 역사는 이를 시황제(始皇帝)라 표기합니다. 이 왕이 장생불사를 위한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연[燕]나라 출신 노생(盧生)을 삼 신선이 산다는 곳으로 파송했습니다.
한[漢]나라의 무제[武帝 7대, B.C. 156.7.30~87.3.29.] 유철[劉徹]도 영생불사하겠다고 승로반[承露盤]의 이슬을 받아먹었다 합니다. 지금 이들이 살아있습니까? 다 죽어 제 곳으로 갔습니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가 가진 것을 잃지 않고 영원히 가지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 법칙은 그럴 수 없습니다. 솔로몬이 남긴 전도서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전 03:01).
이 원칙은 세상 법칙에서 절대 변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대부분 사람이 이 법칙을 남에게는 적용하되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습니다. 현실의 달콤한 꿈에서 깨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자로 사는 사람일수록 죽기를 두려워합니다. 물질에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소망이 없이 여기까지로 끝나면 그야말로 허무 자체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임시 거처인 세상의 장막집을 접고 옮겨갈 영원한 본향이 있습니다.
2. 바울은 영원한 집을 소개하기 위해 장막집을 비교합니다. |
0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바울이 이 말씀을 기록할 때 직업이 무엇입니까? 로마로부터 추방을 당하여 온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와 함께 생업을 이어간 장막 제조업입니다.
낯설고 물선 곳에서 바울과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는 복음을 더 잘 전하기 위하여 장막 업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일은 밤늦게까지 바느질해야 하는 거친 일입니다.
이렇게 힘든 일인데도 장막 제조업을 하는 것은 바울과 브리스길라 부부의 생계 수단입니다. 동시에 자비량 선교의 재원도 됩니다(행 20:34). 바울이 선교의 무대로 삼은 당시 고린도의 사회 환경을 보겠습니다.
장막을 제조해서 판매하는 일은 사업성이 있었습니다. 고린도에 주둔하는 군인들이 임시 숙소 용으로 사들였기 때문입니다. 장막의 재료는 가죽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화학제품이 없는 시절이니 단단하고 질긴 제품으로는 동물의 가죽보다 더 좋은 재료가 있겠습니까?
이때 사용된 장막 재료는 바울의 출생지 길리기아의 다소 근방에서 생산된 최고의 인기 품목 염소의 가죽이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이 재료를 가지고 임시 집을 만들어 판매하였습니다.
특히 군인들 임시 숙소 용으로 납품도 하였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텐트로 만든 이 장막집은 때가 되면 접어야 합니다. 이 사실에 착안하여 바울은 사람의 삶과 죽음과 영원한 삶을 장막집으로 비교하였습니다.
바울이 장막집을 소개하는 것은 사람은 때가 되면 죽는다는 사실과 이후에 영원한 삶이 있음을 전하려 함입니다. 01절을 잘 보십시오.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는 일에 중점을 두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원한 집이 있음을 안내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바울이 육신의 한계성을 장막 집에 비유한 것은 장막 집을 수도 없이 만들고 팔면서 체득한 경험에 근거합니다.
바울이 기록한 서신서가 몇 권입니까? 13권입니다. 이 서신서를 자세히 보십시오. 죽음으로 상징되는 장막집을 염두에 두고 일하고 전도하고 편지를 쓴 심경의 상태를 읽을 수 있습니다.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천국의 영원한 집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집이 오래되면 재건축을 위하여 철거합니다. 이처럼 사람의 육체 역시도 철거되는데 이 일을 우리는 죽음이라 합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육체가 사라져 가는 일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영원한 집이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이 영원한 집을 바울은 영원히 썩지 않을 부활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 설명합니다(고전 15:38~54). 정해진 시간이 되면 더는 머물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장막집과 육신 생활에 집착하지 말고 옮길 필요가 없는 영원한 집을 위해 살 것을 강조합니다.
고린도는 항구도시입니다. 무역으로 여러 곳을 다니면서 장사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는 본문 말씀이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렸을 것입니다. 01절에 장막집, 하늘의 영원한 집, 무너지면, 02절의 덧입기를 04절의 덧입고자, 09절의 거하든지, 떠나든지 등의 단어는 영원한 집을 비유하는 적절한 말입니다.
바울은 하늘나라에 준비된 영원한 집을 바라보기 위해서 세상의 집에 마음 빼앗기지 말 것을 권고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바울은 직접 하늘나라를 다녀온 경험을 소개합니다.
고후 12:0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0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3. 김삼일 가족은 영원한 하늘의 집이 있습니까? |
0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στενάζω). 한숨 쉬다, 신음한다. 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의 한계성과 무기력으로부터 영원한 해방과 자유를 구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필경 흙으로 돌아갈 육체를 벗어버리게 됩니다. 영원히 썩지 않는 부활의 몸으로 덧입게 됩니다. 이 일을 놓고 바울은 탄식한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여기서 오해될 수 있는 단어가 탄식입니다. 바울은 육체의 고난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속히 죽음을 맞고 싶어 합니까? 이에 대한 대답이 04절입니다.
0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의 탄식은 세상에서의 삶을 마친 후 새로운 세계를 기다리는 탄식입니다. 신령한 몸을 입을 때까지 살아서 그 몸을 덧입기를 바라는 소망의 탄식입니다. 살아서 부활의 영광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안타까운 몸부림입니다.
조금 전 살펴본 01절은 세상의 장막집과 하늘의 영원한 집을 비교한 안내문입니다. 04절은 죽음과 생명의 세계 중 어느 것을 선택할지에 대한 안내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어떤 고난을 만나도 영원한 하늘나라의 소망만큼은 잃지 말라고 권합니다. 그들은 바울의 두 번째 편지 고린도후서의 핵심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 고린도에는 2년에 한 번씩 범 헬라 권의 운동경기가 열렸습니다. 그때 선수들을 응원하고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설치하는 것이 장막집입니다.
경기장 주변에 장막집을 세웠다 접기를 수없이 합니다. 이런 일을 많이 해 보았기에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바울이 전하는 장막집의 의미를 잘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이 장막집을 정확히 이해합니까?
김삼일 가족 여러분, 이내 즐겁게 사용하던 것들을 내려놓고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로 돌아가야 함을 알고 있습니까? 이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살아있는 믿음인가? 아니면 세상의 파도에 떠내려가는 죽은 믿음인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혹 떠내려가고 있어도 구조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천회귀(母川回歸) 어류 연어 이야기 들어보셨지요? 하천이나 강에서 부화 된 치어(稚魚)가 바다로 가서 3~5년 동안 북태평양 일대의 알래스카와 베링해 등을 30,000Km를 회유합니다.
그러다 어미가 되면 태어난 곳으로 돌아와 산란하고 죽습니다. 우리나라는 양양, 남대천 등에서 산란하여 부화한 치어가 바다로 나갑니다. 어미가 되어 돌아와서 산란하고 죽습니다. 그 성공률은 약 0.13%입니다. 믿음의 사람도 이런 회귀성이 있습니다.
히 11:15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영원한 장막이 있는 곳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은 복입니다. 만일 믿음의 길에서 탈락하여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바라보지 못하면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지금은 서로 따뜻한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할 때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가 가까울수록 더욱 챙겨주고 격려하며 살아야 합니다(히 10:24, 25).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행복은 누가 나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만들어 가야 합니다. 하늘나라의 영원한 집에 대한 소망도 내가 만들어 가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 이렇게 안내합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새번역 계 21:03).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하란을 거쳐 가나안까지 약 1,800km 정도의 먼 거리를 이동해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을 건넜고 황량한 사막지대 위험한 땅도 헤쳐 왔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아브라함이 걸어온 길의 마침표를 찍는 표현이 마침내 입니다(창 12:05). 그 길이 무척이나 힘들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한 삶을 마치고 영원한 집에 들어가면 마침내 라는 말이 실감 날 것입니다. 김삼일 가족 모두가 그날을 바라보며 살아갑시다. 이스라엘에서 장막의 뜻은 유목민이 이동하면서 쳤다가 다시 걷어 손쉽게 이동하는 집으로 이해합니다. 동시에 사람의 일생은 나그네의 삶으로 받아들입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세상은 날로 거칠어지고 민심은 삭막해져 갑니다. 반면 우리는 때로는 약하고 흔들릴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어야 마침내 목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 나라까지 가는 동안 서로 격려하고 힘을 실어주는 승리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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