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20년 말씀

물욕은 신령한 눈을 멀게 합니다(민 22:21~35).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0. 10. 31.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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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는 이런 말을 합니다. 기도하는 일과 교회 일에 충성을 등한히 하였더니 영적 상태가 닫혀버렸다. 저 사람은 영이 죽었다. 이 사람은 영이 살아있다. 영적으로 너무 갈급하다. 이제부터 영혼의 때를 위하여 살아야 한다.

적절한 말입니까사람은 영혼과 육신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틀린 표현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꼭 맞는 표현도 아닙니다.

같은 조건의 환경일지라도 사람의 기분과 환경에 따라 신령한 면의 컨디션이 좋을 때도 있고 안 좋을 때도 있습니다. 영의 컨디션이 수시로 변하는 것은 그 느낌 자체가 현실 세계가 아닌 보이지 않는 세계에 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먼저 영적이란 단어 하나를 정리하겠습니다. 영적이라 할 때 적()이 중국어의 ~의라는 조사입니다. 영적이라는 말을 영의이렇게 사용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의미로 쓰이는 단어가 많이 있지요. 인간적 경제적 정치적 역사적 현실적 사회적 등을 들 수 있습니다이렇게 적이 붙은 단어를 ~의로 하면 뜻이 더 선명합니다.

영적이란 말도 영의 라고 표현해야 합니다. 그러나 영의 라는 단어를 더 사용하기 편한 신령으로 바꾸겠습니다. 영적 세계라는 말보다 신령한 세계가 더 자연스러운 표현입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느끼는 대부분 현상이 육신의 눈으로 보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좀 더 나아가면 인터넷을 통한 사이버(cyber) 세계가 있습니다사람이 이룬 넓고 광활한 영역입니다.

눈으로 보는 현실과 가상현실보다 더 크고 넓은 영원한 세계가 있습니다. 가상현실이 아닌 분명히 존재하는 신령한 세계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세계에 관한 말씀을 전하려 합니다. 그러나 물욕에 사로잡히면 이 세계는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 발람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안타깝게도 이 사람은 세상에 속한 물욕 때문에 선지자의 가치를 잃고 마지막에는 불행한 죽음을 맞이합니다그래서 제목을 물욕은 신령한 눈을 멀게 합니다로 정했습니다. 은혜의 시간 되기를 축원합니다

 

 

1. 발람이 등장하기까지 과정을 보겠습니다.

 

20 밤에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

 

오늘 말씀을 이해하려면 민 21장부터 펼쳐지는 이스라엘의 광야 시대 막바지 현장부터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부득이하게 아모리인의 땅을 통과하여야 했습니다.

따라서 모세가 아모리 왕 시혼에게 사신을 보냅니다시혼 왕이여 우리가 당신 땅을 통과하기를 원합니다. 어떤 피해도 끼치지 않을 터이니 허락해 주십시오. 밭이나 포도원에도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심지어 우물물까지도 먹지 않고 큰길로 지나가겠다는(21:21, 22) 요청입니다. 그런데 이 요청을 아모리 왕이 거부하였습니다이렇게 되면 전쟁밖에 더 있습니까? 아모리인이 먼저 전쟁을 걸어 왔지만 이내 이스라엘이 아모리인을 깨뜨리고 맙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요단강 동편 모압 평지에 진을 쳤습니다(01).

 

그러자 모압 왕 발락이 번민에 빠집니다(02, 03). 자기네 영토 일부분을 침략하여 주둔하던 아모리인을 이스라엘이 간단하게 물리치고 들어왔기 때문입니다여기서 한번 생각해봅시다.

모압 왕이 고민할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먼저 전쟁을 걸어온 선전포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모압 왕에게도 아모리 왕 시혼에게 요청했던 것처럼 모압 땅만 지나만 가겠다는 요청입니다이스라엘의 목적지는 가나안이기 때문에 모압에 머물 일이 없습니다(02:05~19).

모압 측에서 선제공격하지 않는 한 위험은 없습니다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이 아니니 불안했을 것입니다. 즉시 모압 왕 발락은 미디안 방백들과 연합전선을 구축합니다(04).

 

그리고는 모압 왕 발락이 연합군과 의논하여 전략을 세웁니다. 발람의 고향인 강가 브돌에 거하는 발람을 초청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전략입니다(05~07). 발람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대화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인식할 수 있는 소위 선지자로 불리는 사람입니다(08~12). 

발락은 여호와께서 복을 주신 백성을 여호와의 힘을 빌려 저주하려는 전략으로 사신을 발람에게 보냈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은 발람에게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들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라고(12) 말씀하셨습니다이에 발람은 자기에게 온 사절단의 부탁을 거절합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가기를 여호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신다(13). 그러자 발락은 더 높은 귀족과 더 큰 물질을 보내어 발람을 유혹합니다. 당신을 앞으로 더 귀하게 여길 것이라는 달콤한 유혹의 미끼입니다(14~17).

 

이에 발람이 대답합니다.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명예와 재물을 초월한 것 같은 믿음의 말로 들립니까? 아닙니다. 다음 말을 보십시오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 하실는지 알아보리라(19).

부귀영화의 덫에 걸린 발람은 하나님의 뜻이 변경되기를 은근히 기대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가기는 가되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라고 하십니다.

다음날 발람이 사절단을 따라나서자 하나님께서 진노하십니다. 성경을 깊이 있게 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그들을 따라가라 하고서 왜 진노하시는지 의문점이 생깁니다.

 

20절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발람이 이미 물욕에 빠져 그들을 따라가기를 원하는 자유 의지를 그대로 버려두셨습니다발람은 하나님의 지시에는 관심도 없이 오직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일에 온 신경을 집중시킵니다(벧후 02:15). 그래서 두 종과 함께 조급하게 나귀를 몰고 따라갑니다.

 

 

2.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일이 있습니다.

 

23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간 지라 발람이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채찍질하니.

 

탐욕을 안고 가는 발람의 길은 하나님의 진노가 기다리는 죽음의 길입니다. 이제 발람은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탐욕이 하나님의 뜻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발람은 물욕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진노를 스스로 불러들입니다(22). 발람이 안장을 나귀에게 지우고 출발하자 이내 하나님께서 발람의 길을 막으려고 천사를 보냈습니다.

천사[사자]가 칼을 들고 발람이 타고 가는 나귀를 막아섰습니다. 그러자 나귀가 칼을 빼 들고 있는 천사를 보았습니다. 사람이 보아야 할 일을 하찮은 짐승이 보았습니다.

 

나귀가 하나님의 천사를 본 것은 동물의 감각으로 감지한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나귀의 눈을 특별히 여심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발람을 보십시오. 하나님과 기도로 교통하던 사람 아닙니까? 그러나 물욕에 사로잡히자 그만 그 신령한 눈이 감기고 말았습니다발람은 선지자의 가치를 잃고 복술가의 처지로 추락하였습니다.

발람이 보아야 할 신령한 세계를 그가 부리는 나귀가 보았습니다. 반면 발람은 자기의 가치성을 잃어버린 결과가 되었습니다. 물욕으로 물든 죄의 열매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일은 신령한 사람만이 볼 수 있습니다. 나귀는 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나귀가 천사의 칼을 빼든 모습을 보았으니 어떻게 나귀가 앞으로 계속 나갈 수 있습니까?

 

신령한 세계를 본 나귀는 살기 위하여 천사의 칼을 피해 밭으로 들어갔습니다. 동시에 놀란 발람은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강하게 채찍질하였습니다. 이때의 현장을 보십시오.

발람이 나아가는 길은 포도원 사이의 아주 좁은 길입니다거기다 좁은 길가 양쪽에는 담이 있습니다. 나귀는 살기 위하여 발람의 발을 길옆 담에 대고 짓눌러 버립니다.

그러자 발람은 다시 나귀를 강하게 때립니다나귀는 그만 발람 발밑에 납작 엎드립니다. 발람이 더욱 화가 나서 나귀를 때립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발람의 물욕을 징계하기 위해 나귀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28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

 

발람이 나귀에게 말합니다. 네가 나를 거역하기 때문이다. 내 손에 칼이 있었다면 즉시 너를 죽였을 것이다. 나귀가 발람에게 말합니다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당신을 주인으로 모셨지 않느냐? 내가 언제 당신에게 이같이 하는 버릇이 있었더냐?

그가 말하되 없었느니라. 이 순간 하나님께서 발람의 눈을 열어주심으로 나귀와 발람과의 불편한 대화는 종결되고 말았습니다.

 

31 그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 들고 길에 선 것을 그가 보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니.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일입니다. 이 세계를 다스리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왜 제가 발람을 주제로 말씀을 전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평소에 볼 수 없는 신령한 세계의 일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계를 보는 방법은 마음이 청결해야 합니다(05:08).

 

 

3. 물욕에 사로잡히면 신령한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34 발람이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

 

물욕의 길에 계속 머물면 신령한 세계를 보지 못합니다. 발람은 하나님께서 나귀의 입을 여심으로 인해 신령한 세계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칼을 빼 들고 나타나서 자기를 죽이려 한 장면과 나귀와 의사소통되는 장면도 체험하였습니다발람과 나귀의 의사소통이 사람의 음성인지 아니면 신령한 내면의 귀로 통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초자연 간섭으로 이루어진 대화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보잘것없는 나귀를 발람의 선생으로 삼아 물욕의 길을 심판하십니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발람은 자기를 죽이려 한 천사의 설명을 듣고(33) 자신이 절박한 상황에 부닥쳤음을 깨달았습니다발람은 즉시 자기의 잘못을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이 고백을 받는 대상이 누구입니까?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입니다발람은 하나님을 대신한 천사에게 내가 죄를 지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 죄를 지었다고 고백했으니 다음 행동이 중요합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하나님, 이제 물욕의 길을 완전히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발람에게 이 고백이 전혀 없습니다잘못을 회개한다는 고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내가 발락에게 가는 길을 당신이 좋아하지 않으면 나는 돌아가겠습니다. 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발락에게로 가는 길에서 바로 돌아서면 다 해결됩니다. 그런데도 발람은 발락에게 붙어서 세상 부귀영화의 탐욕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습니다발람은 하나님의 큰 뜻을 알면서도 계속 자유 의지를 통하여 탐욕의 길로 이끌어갑니다. 마침내 천사가 발람에게 말합니다.

 

35… 그 사람들과 함께 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지니라.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러 간 곳에서 이스라엘을 세 번 축복하였습니다(23:08, 19, 20; 24:04, 05). 발람이 발락 앞에서 이 말로 끝을 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인생은 짧고 성경 기록은 영원합니다. 지금 발람이 모든 물욕을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갔다면 그는 저주의 인물로 남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24:25절을 보면 발람이 일어나 자기 곳으로 돌아가고 발락도 자기 길로 갔다고 나옵니다. 이 말은 발람이 돈을 받고 약 640km나 되는 먼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뜻이 아닙니다.

단지 발람이 자기 고향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는 뜻입니다김삼일 가족 여러분, 발람이 고향으로 가지 않았으면 어디에 머문 것 같습니까? 처음 자기를 찾아온 모압의 연합군 미디안 장로들과 함께 미디안 땅에 거하였습니다. 이후 진행된 상황을 보면 발람은 발락의 뜻을 받아 주었습니다.

발락으로부터 돈을 든든히 받은 발람은 발락에게 이스라엘이 우상에 물들도록 한 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모압의 우상에 물들게 한 음란의 꾀입니다(31:16).

발람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 이스라엘이 미디안을 정복할 때 그곳 다섯 왕과 함께 죽임을 당했습니다. 신약성경은 발람에 대한 교훈을 이렇게 전합니다.

 

벧후 02:15 그들이 바른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 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유 01:11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계 02:14…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이 보는 세계는 여러 형태가 있습니다. 육신으로 보는 세계, 지식으로 보는 세계, 상상으로 보는 세계, 믿음으로 보는 세계 등입니다. 이 가운데 믿음으로 보는 세계는 장차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자만이 갈 수 있습니다.

이런 신령한 세계, 우리가 세상 떠나면 바로 가게 됩니다. 너무 조급하게 서두를 필요 없습니다. 꼭 가고 싶으면 오늘이라도 가면 됩니다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일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관심과 함께 믿음의 눈으로 판단하고 감당하여야 합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이것 하나 따라 합시다.

 

탐욕의 길은 멸망의 길이다. 이 길에서 서성이는 사람은 신령한 눈과 판단력이 어두워집니다. 이 사실을 항상 기억하십시오발람은 마지막까지 물욕을 버리지 못해 마지막에 불행한 죽음을 맞고 말았습니다.

발람뿐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 정복 후 아이 성을 정복할 때 아간의 물욕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가 고통당했고 그 집안도 몰락하였습니다

신약 시대는 가룟 유다가 물욕 때문에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넘겼고 자신의 사도 직분도 맛디아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01:26). 오늘날에도 믿음의 길을 잘 가다 탐욕 때문에 삯꾼의 자리로 추락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물욕에 눈이 어두워 그 앞에 죽음의 사자가 서 있음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욕을 제거해야 영안이 열리고 바른 판단도 할 수 있습니다김삼일 가족 여러분, 보이는 세계의 일도 중요하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일은 더 중요합니다. 이 신령한 일을 믿음의 눈으로 보고 사모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