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한 상원의원이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내가 20대에는 세상을 책임지려고 하였다. 내가 30대에는 미국을 책임지려고 하였다. 내가 40대에는 우리 주를 책임지려고 하였다. 내가 50대에는 우리 시를 책임지려고 하였다. 그런데 내가 60대가 되니 내 가정, 자신을 책임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깨달았다.
신앙인은 조국 대한민국을 책임져야 합니다. 세상도 책임져야 합니다. 그러기 전에 먼저 할 일은 가정을 원만하게 책임지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선 가정일부터 원만하게 풀기를 원하십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모세는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데려가는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모세는 완강히 거부했지만, 하나님의 강권에 못 이겨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는 사명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강하게 밀어붙인 결과입니다. 지도자로 부름을 받았으면 가정부터 먼저 허물진 일이 있는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허물진 모습이 있으면 즉각 정리하여야 합니다.
원만하게 해결하지 못하면 고난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의 사명자로 부름을 받고서도 가족들에 관한 일에는 안일하게 여깁니다. 안일한 생각 때문에 그만 큰 위기에 직면하고 맙니다. 바로 아들의 할례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남자의 우선순위가 할례받는 일입니다. 어떤 이유로도 회피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모세는 한 가정의 대표자로서 아들의 할례를 소홀히 여기다 죽음의 위기를 만납니다. 다행히도 아내의 재치있는 행동으로 죽음의 위기를 극복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제목을 「모세가 왜 피 남편입니까」로 정했습니다.
1. 모세는 이드로에게 애굽으로 가겠다고 고합니다. |
18 모세가 그의 장인 이드로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형제들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이 아직 살아 있는지 알아보려 하오니 나로 가게 하소서….
모세가 처음 미디안 광야에 도착했을 때는 오갈 데 없는 도망자였습니다. 애굽에서 살인자로 쫓겨 지명수배를 받는 처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드로는 이를 개의치 않고 일곱 딸 중 장녀(?) 십보라와 결혼시켜 사위로 삼았습니다.
이때부터 모세는 목자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광야 생활 40년을 지내면서 전과 같이 동족을 위하는 마음은(03:01~04:01~17) 서서히 지워졌습니다. 그리고 게르솜과 엘리에셀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18:04).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불타는 떨기나무를 통해 모세를 찾아오셨습니다. 사명자로 부르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사명을 계속 거절합니다. 반면 하나님은 계속 모세를 사명자의 길로 강권하십니다.
마침내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입니다. 동시에 양치는 목자의 삶을 내리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는 사명자의 길로 나섭니다. 하나님이 강하게 밀어붙인 결과입니다. 모세는 목자의 생활을 접어야 할 때를 만나자 40년 세월을 키우고 이끌어준 장인 이드로를 찾아가서 아룁니다.
지금 애굽에 있는 형제들 안부를 알아보기 위해 가야겠습니다. 일종의 통보입니다. 40년 세월을 광야에서 생활하던 모세 아닙니까? 장인에게 본심을 감추고 평소에 입밖에도 내지 않던 형제들 안부 물으러 간다 하니 과연 이해가되는 말입니까?
모세가 애굽으로 가려는 목적은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배경으로 애굽 왕 바로와 치열한 협상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이드로는 모세의 그 본심을 눈치챘을 것 같습니까?
4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갑자기 애굽으로 간다는 말을 잘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이드로가 모세의 그 마음 나름 파악하였을 것입니다. 미디안 현직 제사장인 만큼 당시의 시대 흐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디안이 어떤 곳입니까? 출애굽기 02:11~25절을 강론할 때 말씀드렸습니다만 다시 말씀드립니다.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가 낳은 넷째 아들 미디안(창 25:02)이 이룬 넓은 지역입니다. 오늘날 아카바만 동해안 북부 아라비아와 이집트 사이의 넓은 광야에 해당합니다.
이들은 목축업으로 생업을 이어가는 유랑민 베두인입니다. 이들 가운데서 갈라져 나온 일부가 시나이반도에 자리 잡았는데 그 무리의 수장이 이드로입니다(출 02:18 르우엘).
그런데 80세 된 모세가 장인에게 애굽의 형제들 안부 물으러 간다고 할 때 그 중심을 이드로가 파악 못 하겠습니까? 다 압니다. 아는 이상 만류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드로는 모세의 뜻을 존중하고 평안히(שָׁלוֹם 살롬) 가라고 허락합니다. 몸조심하라는 뜻입니다.
모세가 애굽으로 가는 길은 위험의 길입니다. 40년 세월이 흘렀어도 그 시절 모세는 살인자로 쫓겨 광야로 도망을 한 지명수배자입니다. 이드로에게는 모세의 애굽 행이 딸과 사위와 손자를 한꺼번에 잃어버릴 수 있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만류해야 할 처지입니다. 그런데도 허락합니다. 자기의 영역을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가는 모세를 죽이려 하십니다. |
24 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 지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 하신 일이 천사의 모습인지 아니면 다른 무시무시한 모습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24절을 놓고 70인 역은 너무 곤혹스러워 여호와의 사자라고 둘러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어지는 25, 26절에서 그 이유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아들을 낳으면 생후 8일째 되는 날에 반드시 할례를 행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자손손 지키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창 07:10~12).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그 날 아브라함은 99세였습니다. 그런데도 할례를 하였고, 하갈이 낳은 아들 13세의 이스마엘도 할례를 받았고, 아브라함의 가문 중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았습니다(창 17:23).
할례(מוּל 물). 어떤 의식입니까? 음경 포피를 잘라내는 것으로 오늘의 포경수술에 해당합니다. 이 의식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은 언약의 표징입니다. 거룩한 성례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특별 관계를 인(印) 치는 표시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성례인 세례와 같은 의미입니다. 모세가 두 아들 게르솜과 엘리에셀을 생후 8일째부터 지금까지 할례를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모세가 그 중요한 할례의 의미를 몰라서 안 했겠습니까? 우리는 모세의 가정사인 남편과 아내 사이에 일어났을 하나의 일을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게르솜과 엘리에셀의 할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모세가 생후 팔 일째 되는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려고 의논하자 십보라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당신은 애굽에서 겪은 일 모두 잊어라. 당신이 히브리인이라는 것도 잊어라. 당신은 이미 우리 미디안 사람이 되었으니 우리 가족 모두 미디안 사람으로 살자.
이런 식의 대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십보라의 진심이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두 아들이 철저한 미디안의 생활 방식으로 살기를 원했을 것은 충분히 짐작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는 이 사건을 놓고 또 하나의 가능한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할례를 받았을까? 받지 않았을 까입니다. 당연히 받았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레위 지파 출신 아므람과 요게벳의 믿음으로 보아 할례를 받았을 것이라는 짐작입니다. 모세 자신도 언약의 자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젊은 시절 한때는 이스라엘 구원하는 일에 나섰습니다.
그런 모세가 할례를 경히 여깁니다. 하나님의 진노 대상입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고 나타나실 만합니다(참조, 민 22:31). 이 살벌한 현장은 무엇을 깨닫게 해 줍니까?
모세가 사명자로 나서기 전 자신의 가정부터 하나님의 신령한 법을 실행하라는 뜻입니다. 믿음의 자리에 서지 않고 신령한 공동체를 지도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일에 걸림돌이 됩니다. 하나님을 우습게 보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적대 관계를 이루는 일입니다. 모세가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않은 체 애굽으로 가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도 남을 일입니다. 죽음의 위기를 만난 것도 당연합니다.
반면 모세에게는 이번 일로 흔들리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다시 세워야 합니다. 앞으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확고한 정체성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모세의 아들부터 할례받으라고 하십니다.
그렇지 않고는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의 구원에 모세를 들어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애굽으로 가는 길에서 나타나 모세를 죽이려 하십니다.
3. 십보라가 모세를 왜 피 남편이라 부릅니다. |
25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모세가 미디안으로 도피해 올 때 그는 이스라엘인도 아니고 애굽인도 아니었습니다. 4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 이스라엘인도 아니고 미디안인도 아닙니다. 적당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상 이제는 진정한 이스라엘인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사명자로 부르실 때는 언제고 이제는 아들 할례를 하지 않았다고 죽이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세를 부르실 때 모세야! 집으로 돌아가서 두 아들에게 할례를 하여라. 이렇게 하셨으면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짐작을 해 보자면 애굽 행을 앞두고 모세가 할례를 하자는 말에 십보라의 반대가 심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이런 짐작 거리는 차치하고 모세에게 당장 생명의 위기가 닥쳤습니다. 이 일부터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발등에 떨어진 불과 같은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 아내 십보라가 해결자로 나섭니다. 즉시 돌칼로 아들에게 할례를 합니다. 이 할례의 현장을 상상해 보십시오. 요즘은 높은 의학 수준에다 기구도 얼마나 좋습니까? 마취제도 있고 상당한 기술도 뒷받침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옛날 긴급하게 차돌(수 05:02, 03) 칼로 할례를 시행하였으니 통증이 얼마나 심하겠습니까? 모세의 두 아들이 어릴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믿음의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십보라는 미디안 출신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갑자기 나타나셔서 일을 벌이니 이 상황이 얼마나 당황스럽습니까? 두 아들도 이제 갓 태어난 것이 아닐 텐데 말입니다. 십보라가 두 아들 할례를 한 후 그 포피 조각을 그 발에 갖다 댑니다. 여기서 그라는 대명사가 누구인지 정확히 구분 안 됩니다.
그래도 짐작한다면 남편일 것 같습니다. 그의 발에 댔다는 말은 성기에 댔다는 말의 부드러운 표현입니다. 이 일로 인해 하나님께서 모세를 풀어주셨습니다.
이어서 십보라가 모세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아들의 할례를 통해 피를 흘림으로 죽임을 모면했다는 뜻입니다. 모세가 직접 할례를 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니 십보라가 대신하였습니다.
결과는 남편의 목숨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에서 주연 역할이 누구입니까? 25, 26절을 보면 모세도 아들도 아닙니다. 이들은 실명이 없이 그저 대명사로만 취급되는 엑스트라입니다.
하나님은 일의 연출자이고 그 주연 역할은 십보라입니다. 직접 실명자는 여호와 하나님과 십보라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부분의 초점이 무엇입니까?
모세를 죽이시려는 하나님 앞에 민첩한 반응을 보이는 십보라의 담대함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생명을 놓고 하나님과 겨루는 진정한 여장부 십보라를 소개합니다.
이 충격 사건이 일어난 후 모세는 아내 십보라와 두 아들의 생명이 염려되어 친정으로 돌려보냅니다. 애굽으로 가는 일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의 날이 흐른 후 이드로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출애굽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딸과 두 아들을 데리고 모세를 찾아 왔습니다. 이때의 일을 모세는 이렇게 남겼습니다.
출 18:05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의 아들들과 그의 아내와 더불어 광야에 들어와 모세에게 이르니 곧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진 친 곳이라.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경건한 어머니 품에서 자란 이스라엘 남자 모세, 한때는 애굽 왕궁의 왕자 신분이었던 모세, 그에 비해 십보라는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딸입니다. 여자 목자입니다.
믿음의 주체와 삶의 환경이 다른 두 사람 결혼생활이 원만했을 것 같습니까? 불편한 일이 더러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 모세가 믿음 줄을 내려놓고 살았다면 가정생활은 혹 편했을 수도 있으나 그렇지 않은 이상 불편이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가정생활에 대하여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 원리와 당시 모세와 십보라의 미디안 생활 환경을 짐작 정도만 합니다. 사실 순탄이야 했겠습니까?
그런데 지난 40년 동안을 양이나 돌보는 목자 일 외는 달리 한 일이 없는 80세 노인 모세가 어느 날 폭탄선언을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명자다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애굽으로 간다.
그리 알고 당신도 아들도 준비해라. 이 말이 쉽게 받아들여지겠습니까? 아마 모세와 십보라가 며칠 동안 잠도 못 자면서 가자, 못 간다, 꼭 가려면 당신 혼자 가라, 나와 아이들은 여기 있겠다. 하며 부부 싸움을 좀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명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십보라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낯설고, 물설고, 살아가는 방법과 법도가 달라도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로 들어오려면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호와의 신앙에 대한 믿음이 정리되어 있지 못해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구원의 자리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일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의 길입니다. 마침내 십보라는 남편을 믿고 따라나섰습니다. 영원한 복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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