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이 휴대폰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각자가 사용한 휴대폰에는 어디로 전화했는지, 어디서 전화가 왔는지 언제 전화했는지가 자세히 기록됩니다. 또 GPS 장치가 설정돼 있어서 통화 여부와 그에 따르는 모든 정보도 기록됩니다.
자동차도 마찬가지입니다. 내비게이션 시스템을 가진 차량은 대부분 그 차가 어디 있는지 또 어디로 이동했는지 등을 자세하게 남깁니다. 우리가 즐거이 사용하는 인터넷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용했다면 접속한 인터넷 사이트들이 차곡차곡 흔적으로 남습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컴퓨터는 우리가 언제 어느 병원에 들렀는지, 어떤 진료를 하였는지 또 약국에서는 어떤 약을 내어 줬는지 등을 기록해 놓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처가살이하며 40년간 양치기 목자로서 지냈습니다. 이제 모세의 나이 80세입니다. 젊을 때의 혈기왕성한 시절 다 지나갔습니다.
모세는 지난 40년 세월 돌아보면서 자신은 별것 아닌 존재임을 확인하였을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모세의 왕궁 생활 40년, 동족의 싸움에 본의 아니게 심판자로 끼어들었던 일, 광야에서의 40년 행적을 들추기 시작하십니다.
내비게이션에 저장된 기록, 슈퍼컴퓨터에 저장된 기록, 휴대폰에 저장된 기록처럼 하나님은 모세의 인생 흔적을 다 들추기 시작하십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은 큰일을 위하여 모세의 80년 흔적을 떠올리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는 일에 모세가 사명자로 부름을 받는 출발점입니다. 이 현장을 따라서 말씀 제목을 「사명자로 부름을 받는 모세」로 정하고 말씀을 강론하겠습니다.
1.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 전의 환경입니다. |
0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01절을 보면 모세는 광야 깊숙한 곳에서 양 떼를 치고 있습니다. 젊은 모세가 아닌 80세 된 초라한 노인의 모습입니다. 별로 가진 것 없는 모세입니다.
양을 치고 있는 것도 다 장인의 것이고 자신이 모아놓은 것은 별로 없습니다. 모세의 성향을 보면 재산이 좀 있으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기 위한 용병 모집도 할 만한 스타일입니다.
그러나 그럴 재산이 없습니다. 젊고 혈기 왕성한 40세 때는 민족 해방의 꿈을 품었습니다. 작은 일이지만 의욕을 품고 시도도 해보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광야로 도피해야 했고 지금의 처지에 놓였습니다. 광야 생활 40년을 지내다 보니 지난날 왕궁에서의 화려했던 시절 다 지워졌습니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꿈을 품을 수 있는 의지도 다 무너졌습니다.
현재의 환경이 과거의 그런 의욕을 다 묻어버렸습니다. 이런 처지에서 모세가 집으로부터 좀 떨어진 서쪽으로 양 떼를 이끌고 갔습니다. 이동하다 보니 하나님의 산 호렙산 자락까지 왔습니다. 모세의 눈앞에는 광야에서 흔히 발견되는 떨기나무가 있습니다. 말라비틀어져서 가시만 가득한 앙상하고 아주 볼품없는 나무입니다.
이 나무는 주위의 당당한 나무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나무입니다. 생기도 별 없는 나무입니다. 이 떨기나무는 노예로 전락하여 고난과 고통을 겪는 이스라엘의 처지를 상징합니다.
힘겹게 생활하는 이스라엘의 생활상을 말해 줍니다.
문학가 성향이 짙은 모세가 그 떨기나무를 보고 이런 생각을 하였을 것 같습니다. 오 사랑하는 이스라엘이여, 너는 광야에 있는 이 가시덤불과도 같구나. 너는 아주 비천하며 너를 보는 사람들이 모두 피하는 처량한 신세구나.
이렇게 이스라엘의 고통을 생각하며 안타까움에 젖어 있을 때 갑자기 떨기나무가 불길에 휩싸입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광경입니다. 불은 붙으면 다른 나무로 옮겨붙어 점점 불길이 번져 갑니다.
그런데 이 불은 이상한 불입니다. 불이 났는데도 나무는 타지 않습니다. 다른 나무로 옮겨 가지도 않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타지 않는 떨기나무의 불에 대한 궁금증이 생깁니다.
어떻게 떨기나무에 불이 더는 번지지 않는가 하는 호기심을 가지고 떨기나무 가까이 다가갑니다. 구경치고는 아주 멋진 불구경입니다. 그 순간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과 모세가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입니다. 모세 하면 한때는 민족의 해방을 위해 열정을 품은 사람 아닙니까? 이제는 그런 생각이 다 무너져서 무기력한 처지에 놓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무기력한 모세를 찾아오셨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길 그때 찾아오셨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명자로 삼으시려고 찾아오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올 지도자로 삼으시려고 찾아오셨습니다.
왜 이 떨기나무에 전능자 여호와께서 임재하셨습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애굽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스라엘의 고통을 끊고 해방을 주시겠다는 상징입니다.
2. 하나님 앞에 모세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고백합니다. |
0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 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יהוה). 여호와는 출애굽기에서만 419회 나오는 호칭입니다. 그 뜻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입니다(출 03:14). 04절을 보면 여호와라는 이름과 함께 전능자 하나님(אֱלֹהִים 엘로힘)도 나옵니다. 이는 모세에게 계시 된 신이 절대 유일하신 분임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전능자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모세야 모세야 하고 부르십니다. 모세의 80년 삶에서 처음으로 듣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왕궁 생활 40년 동안에도 듣지 못한 음성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양을 치는 초라한 모습으로 지낼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이름을 반복해 부르십니다. 일단 이름을 부르시기 전 상황부터 봐야 합니다. 그가 보려고(רָאָה 라아)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רָאָה 라아) 지라. 여기 보려고, 보신 이 두 단어의 의미가 같습니다.
모세는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음에도 더는 타지 않음을 주목하였습니다. 신기한 현상이니 주목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떨기나무 가까이 오는 모세를 주목하십니다.
모세의 실패한 흔적을 아시면서도 주의 깊게 관찰하십니다. 왜냐하면, 지난날의 일은 이미 지난 일이고 현재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려고 주의 깊게 보십니다. 모세의 미래 일을 계획하셨기 때문입니다.
휴대폰에 저장되어있는 통신 명세서처럼 모세에 관해 잘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일을 맡기려 하심을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십니다.
모세야 모세야(מוֹשֶׁה). 하나님께서 모세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십니다. 상황의 긴박성과 사명의 중요성 때문에 반복해서 부르십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 쓰려 하십니다. 성경에는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는 예가 가끔 나옵니다. 긴급한 상황에서 이름을 반복해서 부른 예가 아브라함과 야곱과 사무엘입니다.
창 22: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창 46:02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삼상 03:10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실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였습니다(창 22:0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실 때도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였습니다(창 22:11).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실 때도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였고(삼상 03:04), 하나님께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할 때 이사야 선지자도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였습니다(사 06:08).
내가 여기 있나이다. 모세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들리는 음성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직감합니다. 이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바로 반응합니다.
모세는 전능자의 음성에 압도되어 자신의 현주소를 밝힙니다. 그만큼 자신이 낮아졌음을 고백하는 표현입니다. 이 고백이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길목입니다.
모세가 떨기나무 불꽃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남으로 삶의 가치관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때부터 40년간 위대한 출애굽 지도자의 길이 열렸습니다.
3. 하나님은 사명자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 하십니다. |
0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모세에게 왜 신을 벗으라 하십니까? 이제부터 새로운 삶의 길을 가기 위해서입니다. 지도자에게는 성별의식이 필요합니다. 신을 벗으라는 이 음성은 과거와 단절하라는 뜻입니다.
세상 인연과의 단절입니다. 하나님 없는 세속 문화와 단절입니다. 이 단절을 통해서 새로운 길을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미디안에서 모세를 부르십니까? 새로운 길을 가게 하십니까? 광야는 죽음의 땅입니다.
광야에서 혹 만나는 오아시스는 기적의 땅일 뿐이고 실제 광야는 어떤 생명도 살 수 없는 곳입니다. 육신이 시들고 죽어가는 장소입니다. 광야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곳입니다. 적응하여 살아가는 사람은 그곳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유목민입니다. 그래서 적응하기 힘든 모세는 첫아들 낳고 이름을 게르솜이라 했습니다.
출 2:22 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이르되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음이라 하였더라(출 18:03).
자신이 나그네임을 확인한 이름입니다. 자신의 신세 한탄입니다. 광야에는 아무리 정을 붙여도 결국 살만한 곳이 못 된다는 뜻입니다. 아내나 장인처럼 광야에서 태어나지 않았기에 자식이 있어도 외로웠습니다.
애굽의 궁중에서 40년간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기에 더욱 고립감을 느꼈습니다.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은 신을 벗으라 하십니다. 과거를 버리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특별한 초청입니다.
새로운 신을 신겨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양 떼를 이끌고 이곳저곳 다니던 정처 없는 삶을 마치라는 음성입니다. 젊을 때는 자기 힘으로 민족을 구원하려 한 그 열망을(출 02:11~13) 하나님 방법으로 꽃피워 주시겠다는 음성입니다. 이제부터 모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그 목적을 08절이 밝힙니다.
0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데려가려 하노라.
모세가 세상에 속한 신을 벗어야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사명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 길에는 기적이 있고, 하나님의 능력이 있고, 만나와 메추라기가 있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우리 모두 모세야, 모세야 하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신령한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은 모세가 아니라 여러분을 부릅니다.
오늘 모세의 일을 통하여 중요한 신앙의 원리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모세에게 요청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신을 벗으라. 하나님은 현재 이스라엘의 형편을 잘 아십니다.
이제 애굽에서 나올 기간이 찼음을 잘 아십니다. 드디어 모세를 세워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와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려 하십니다. 네 신을 벗으라는 음성은 굉장한 목적을 담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시려는 목적 있는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가던 길을 멈출 때입니다. 세상의 신을 벗을 때입니다. 그러면 나는 세속의 신을 신고 어디를 다녔습니까? 어디에 머물렀습니까? 혹 방탕의 길이었습니까? 잘못된 길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네 신을 벗으라는 음성을 우리가 새롭게 들읍시다.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려 한다는 목적 있는 메시지도 들읍시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미디안 광야에서 모세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살아난 그 인격을 통하여 일하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완전히 죽이고 비운 사람의 심령에 능력과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무엇인가 좀 가졌다고 힘을 주는 사람, 무엇인가 세상 자격과 조건을 갖추었다고 좀 거들먹거리는 사람을 통해서는 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그 사람이 더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40년 전 모세의 세상 기반이 갖추어 있을 때는 그 열정과 중심이 아무리 좋아도 외면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40년 세월 지내며 세상 가능성이 완전히 비워졌을 때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시간표와 우리의 시간표가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공주 아들로서 권력과 명예와 부를 가지고 있던 모세는 쓰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지혜와 강함을 통해서 일하시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사람의 수단과 방법으로 되지 않습니다. 자기의 잘남과 거만함을 내세우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쓰임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완전히 죽어서 나는 무능한 자다. 아무것도 아닌 자다. 라고 깨달아질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처분을 구할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이런 시간을 연단이라 합니다.
고전 0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김삼일 가족 여러분, 무엇을 할지라도 세상 사람과 같은 방법을 따르지 맙시다.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는 말씀을(슥 04:06) 붙잡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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