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시대의 선지자 가운데 눈물의 선지자로 불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레미야입니다. 이 예레미야가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의 말하는 것과 행동을 보면 하나님의 사명자로 부름을 받은 모세의 행적과 흡사합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내용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가 선지자 사역을 할 때 중요 대상이 바벨론, 애굽 등과 같은 대제국입니다. 이들을 상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심히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하는 말이 하나님 너무 슬픕니다. 나는 아이(נַעַר 나아)라 말도 제대로 할 줄 모릅니다. 하고 고백하였습니다(렘 01:06). 경험도 없고 선지자로서 갖추어야 할 지식도 별로 없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그런 핑계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렘 01:0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하나님 일에 부름을 받은 모세를 봅시다. 애굽으로 가라는 사명 앞에 나는 무능한 자입니다. 적격자가 아닙니다. 하고 핑계합니다. 모세가 선대의 사람이니 아마 예레미야가 모세의 핑계를 본받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 나는 할 수 없다고 하는 그 시점이 하나님의 능력이 시작되는 시점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자로 부름을 받았으면 그 사역지가 어디이든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서 담대하게 전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모세가 하나님의 일에 부름(召命)을 받고서도 계속 핑계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모세를 끝까지 밀어붙여 사명의 장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래서 말씀 제목을 사명자는 핑계하면 안 됩니다. 로 정했습니다. 은혜의 시간 되기를 축원합니다.
1. 하나님 앞에서 핑계하는 모세의 모습입니다. |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의 사역자로 부름을 받은 모세, 이제 모세는 특별한 사명을 띤 사명자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할 수 없다고 핑계합니다. 04장까지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한두 번이 아닌 여러 차례 핑계합니다. 어떻게 핑계를 하는지 그 일을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מִי 미). 이제 모세는 40년 전의 모세가 아닙니다. 그때는 자기가 자신만만한 구원자 역할을 할 줄 알았습니다(02:14). 그런데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자기의 모습이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정말 볼만한 게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모세이기에 하나님, 내가 누구이기에 애굽으로 간다는 말입니까 하고 답합니다. 자신에 대한 무능을 아는 모습입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연단 받은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부인하는 자를 들어 귀하게 쓰십니다. 하나님은 무능함을 아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가며(יָלַך 얄라크). 모세가 바로 왕을 만나러 가는 일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애굽에 가서 이스라엘을 해방하라는 명령을 합니다.
이에 모세가 하나님, 내가 무슨 능력으로 이런 일을 하겠습니까 하고 거절합니다. 자기가 앞장을 서서 일할 것을 생각하니 걱정이 앞섭니다. 거절하는 것도 이해는 갑니다.
그래서 하나님, 도대체 왜 나입니까? 왜 내가 가야 합니까? 내가 그 일 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하나님, 이건 말도 안 됩니다. 내가 40년 전에 한 번 시도해 보았는데 실패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아시지 않습니까?
이제는 모든 일 내려놓고 광야에서 40년을 은둔하였습니다. 왜 하필 나입니까? 안 됩니다. 하고 핑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의 강한 자보다 약한 자를 들어 사용하시기를 좋아하십니다.
고전 0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김삼일 가족 여러분, 자기 확신과 자기 불신이라는 두 마음을 잘 조화시켜야 합니다. 지도자의 길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길입니다. 지도자는 두 마음 때문에 갈등합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과 나는 할 수 없다는 자기 불신입니다. 확신과 불신 두 마음이 충돌하면 갈등에 빠집니다.
두 마음에는 각기 기능이 있습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찬 진정한 용기와 함께 만용이나 허세를 부리는 기능입니다. 반면 나는 할 수 없다는 불신에는 겸손함과 함께 무능함의 기능이 있습니다.
지도자는 이 두 마음을 잘 조절하여야 좋은 기능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안타깝게도 할 수 없다는 부정의 생각을 앞세웁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할 수 있다 하시며 힘을 실어줍니다. 그 힘이 바로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입니다(12).
2. 여호와를 배경으로 사명의 현장에 가야 합니다. |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모세가 엄중한 하나님의 사명 앞에 처음에는 내가 누구기에 가겠느냐며 핑계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에 모세가 사명자로서 한풀 꺾입니다. 그러면 일이 일사천리로 해결됩니까? 아닙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묻습니다.
내가 애굽에 가서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파송하셨다. 곧이스라엘은 애굽에서 해방을 받는다. 그대들은 이제 준비해라. 하면 그들이 하나님이 너를 보냈다고? 그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때 뭐라고 해야 합니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היהא רשׁא היהא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I am who I am). 세 글자로 되어있는 이 말이 모세의 물음에 대한 하나님의 답입니다.
모세에게 건네주신 하나님 명함입니다. 나는 나다. 시작과 끝이 없어서 언제나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지음을 받은 존재와는 달리 영원까지 계신다는 뜻입니다.
한계가 있는 존재는 시간 속에서 자신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시간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만일 자신을 증명할 수 있다면 그 존재가 바로 하나님입니다.
나는 스스로 있다는 말을 다시 정리합니다. 절대 완전하심과 모든 인과 법칙을 초월한 존재입니다. 모든 기반이 되는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입니다.
계 01:0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여호와, 이스라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칭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이 이름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름 여호와, 구약성경에 무려 6,823번이나 나옵니다.
구약은 여호와의 책인 셈입니다. 이 여호와가 처음 등장한 곳이 창 02:04입니다. 이어서 창 04:26을 보면 여호와라는 이름을 최초로 부른 것은 셋이 에노스를 낳은 후였습니다. 아브라함도 창 15:02에서 하나님을 여호와로 부릅니다.
그런데 출 06:03을 보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이렇게 나옵니다.
이전의 족장들도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과 출 06:03에 의하면 여호와의 이름이 모세에게 처음으로 계시 되었다고 나옵니다.
서로 엇박자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예, 이 말의 의미는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몰랐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이름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모세야, 이제는 가라. 이미 12절에서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셨지 않았느냐?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는 언약의 하나님이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는(15) 말만 해도 된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하나님이 배경 되시면 얼마든지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가정에 은혜가 임합니다. 얼마든지 직장과 사업에 능력이 임합니다. 얼마든지 복된 터전이 됩니다. 이런 삶이 우리 김삼일 가족의 목적이어야 합니다
3. 하나님께 맡기면 길을 자세하게 알려주십니다. |
18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신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사흘 길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 하라.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שָׁמַע 쉐마). 순종하다, 경청하다. 라는 뜻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말에 분명히 순종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애굽의 강력한 억압 아래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장로들이 초라한 한 망명객의 말에 순종할 것 같습니까?
정말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완악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마음에 감동을 주시고 마음을 흔들면 그때는 상황이 바뀝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고 된다고 하시고 가라고 하시면 그때는 무조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뭐가 문제입니까?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 때입니다. 함께 하시지 않는데 함부로 밀고 나가면 일을 그르치기 알맞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실패의 길입니다.
사 55:0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모세는 여호와를 배경으로 애굽에 가야 합니다. 애굽에 도착하면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의논하여 바로 왕을 만나러 가야 합니다. 만나면 다른 말 하지 않고 이렇게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여호와께 희생 제사를 지내려 합니다. 그 장소는 사흘 길쯤 되는 광야입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여기서 제사는(זָבַח 자바흐) 희생 제사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이 제사는 온 민족이 여호와의 신앙으로 모이는 구심점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제사를 지내겠다는 요청은 민족이 대이동 하는 엄청난 일입니다. 거기다 제사 지내는 장소의 거리가 사흘 길쯤 되는 광야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거주지인 고센에서 하나님의 산 시내산까지 이를 수 있는 거리입니다. 애굽의 속박과 추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리입니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정말 희생 제사를 지내려 시내산 자락까지만 가려고 합니까? 당연히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생략된 부분을 잘 보아야 합니다.
앞뒤 문맥을 잘 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흘 길 되는 광야로 가서 하나님께 제사하고 다음은 가나안으로 간다는 뜻입니다. 바로 왕에게는 사흘 길쯤 광야로 가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겠다는 말만 하면 됩니다. 그다음 일정을 말해 주면 자극과 충격을 크게 받고 더욱 이스라엘을 괴롭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 반대하는 자에게는 신앙의 비밀에 대해 너무 자세히 말해 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역이용되어 지장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반대하는 자에게 다 말해 주는 것은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는 것과 같고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는 것과 같습니다(마 07:06).
모세가 바로 왕을 만나서 이런 요청을 해도 바로 왕이 허락하지 않을 것을 하나님도 아십니다. 그런데도 모세에게 이런 주문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왕을 시험하는 일정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왕과 애굽을 어떻게 해야 항복을 하고 이스라엘도 해방될 것인가의 답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답이 19, 20절입니다.
19 내가 아노니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애굽 왕이 너희가 가도록 허락하지 아니하다가 20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실패하는 사명자」라는 글 제목이 있습니다.
결코, 부드러움을 못 가진다. 나약하든지 폭군의 허세를 부린다. 갈수록 태산일 것으로 생각한다. 자기보다 우월한자를 보면 질투하고 그 사람의 갑옷에 구멍 난 곳이 없는지 찾으려 한다.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하게 군다. 남의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다가 자기를 상실한 채 모든 책임을 남에게 전가한다. 계속 문제의 변두리에서만 맴돈다.
성공을 휴지로 삼는다. 바람을 보면 돛을 거둔다. 머릿속에는 욕심이 있다. 자주 쓰는 말은 해봐야 별수 있나? 이다. 끝까지 비겁한 의인이 되려 한다. 요행을 믿는다. 변명으로 행위를 증명한다.
실수하였을 때 너 때문에 하고 말한다. 입에는 핑계가 가득하다. 노인에게 고개를 숙일 줄 모른다. 승자보다 게으르지만 늘 바쁘다고 말한다. 허겁지겁 일하고 빈둥빈둥 놀고 흐지부지 쉰다. 시간에 쫓겨서 달린다. 자기의 재능을 자랑한다. 성공을 독점하려 한다. 말로만 훈계한다. 그와 함께 있으면 힘이 빠진다.
자기 주관으로 결론 내린다. 남의 허물을 보면 입을 참지 못한다. 자기에게 너그러우며 남에겐 엄격하다. 돈 앞에서 무절제하다. 세상과 쾌락을 즐긴다. 위선이 체질이다. 백성을 이용한다.
사명(使命)과 사명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명이란 지워진 의무나 책임을 말합니다. 사명감이란 거기다 느낄 감(感)자 하나를 더한 말입니다. 감자 하나가 더하여 지면 굳은 결심과 의지로 의무와 책임을 투철하게 수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행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받들기 위해서는 자기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사명감에 대한 투철함의 고백입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치시면 다 무너집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원수는 강하게 보이고 자신은 약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을 배경으로 나가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성공의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그 길에는 하나님의 은혜(חֵן 헨)가 있습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자원(資源) 입니다(21, 22). 이 은혜가 임할 때는 노예처럼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귀한 손님처럼 극진한 대접을 받고 나갑니다. 핑계가 아니라 순종하면 이 은혜가 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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