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예상하지 못한 코로나19 사태를 세상 모든 사람이 겪었고 지금도 계속 겪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피해를 많이 본 세대는 노년 세대입니다. 특히 미국과 유럽에서 코로나19로 인한 노인의 잔혹사는 주로 요양원에서 발생하였습니다.
예를 들자면 미국 뉴저지주 북서부 앤도버의 한 요양원은 시신 4구를 수용할 수 있는 영안실에 17구의 시신이 방치되어 있었습니다(4월 16일).
스페인의 한 양로원에서도 참혹한 일이 있었습니다. 100여 명의 노인이 생활하는 이곳에 코로나19가 발생하자 직원들과 상주 의사, 간호사가 귀중품과 기부 물품을 몽땅 서로 나누고 도주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돌보는 이 없는 노인들은 5일간이나 버려진 가운데 나중 발견되었을 때는 사체 다수가 참혹한 광경이었다고 합니다(3월 23일).
미국 LA에 사는 이 모 씨(47. 남)는 한국에 사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겨우 한국행 항공권을 구해서 귀국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2주간 격리되는 일이 생기면서 결국, 모친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가슴 아픈 일이지요. 이에 이 모 씨는 마지막까지 자식 도리를 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며칠간이나 울음으로 지새웠다고 합니다.
이후부터 한국 정부는 해외에서 들어오는 한인 입국자 가운데 부모와 친척 상을 당한 경우는 사망진단서만 확인되면 2주 격리 면제서를 발급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런 아픔의 일들을 말씀드리는 것은 긴급한 일이 발생하니 아무래도 연로한 분들에 대한 효가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더라는 사실입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복을 받고 싶습니까? 예 받고 싶지요. 그러나 복을 받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복 받는 삶을 행하는 일이 잘 안되는 데 우리의 고민이 있습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어버이주일이기 때문에 부모를 생각하고 어버이주일이기 때문에 잘해드린다면 이는 바른 효도가 아닙니다.
반면 이런 날을 아무런 감각도 없이 지낸다면 더욱더 문제입니다. 어버이주일을 통해서 그동안 바르게 섬기지 못한 불효의 일을 회개해야 합니다.
동시에 부모뿐만 아니라 주위의 연로하신 분들은 다 부모처럼 공경하여야 합니다. 이 일이 성경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센머리 앞에서 일어서십시오」로 정했습니다.
1.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
32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우리는 젊어서 머리에 난 흰 머리카락을 새치라고 합니다. 주로 학생 시절에 간혹 한 올씩 보이던 머리카락 말입니다. 더러는 거울 앞에 설 때마다 흰 머리카락 한 올씩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나도 나이가 좀 들었나 봐. 라는 말을 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센 머리의 의미는 젊은 사람들에게서 간혹 보이는 새치를 말함이 아닙니다. 세월이 흘러 자연스레 머리카락이 희게 된 경우를 말합니다.
연륜이 쌓이면서 희게 된 머리카락에 대해 솔로몬은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을 수 있고(잠 16:31), 젊은 자의 영화는 그의 힘에서 나오되 늙은 자의 아름다움은 백발에 있다고 하였습니다(잠 20:29).
나이와 경륜이 무시되어서 안 되는 영광의 흔적임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32절 말씀을 다시 봅시다.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백발이 성성한 어른 즉 나이가 드신 분이 들어오면 즉시 일어서서 예를 갖추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노인을 잘 공경하라는 명령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 외에도 나이가 드신 어른에 대하여 예우를 잘해드리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분들은 우리의 인생 선배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노인이든 그분들의 인생에는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우리의 부모처럼 자녀를 낳고 기르고, 독립시키는 과정에서 수고한 흔적들이 있습니다.
자기 가정에서는 분명히 귀한 분으로 합당한 예우를 받고 있어야 할 분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연로하신 분들은 언제나 우리 앞에 있습니다.
소홀히 넘겨야 할 분들이 아니므로 예의를 갖추는 것이 우리의 도리입니다. 현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무시할 대상이 아니라 그분들에게는 젊은 사람들이 갖지 못한 좋은 지혜가 있습니다.
잠 01:0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센 머리는 인생의 지혜를 상징합니다. 그 지혜는 한 나라의 왕이 쓰는 왕관처럼 가치가 있고 백발에서 인생을 복되게 살 수 있는 지혜가 나옵니다.
우리는 연로하신 분들을 대할 때 장유유서(長幼有序)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더욱 깍듯한 예의가 필요합니다.
다 한때는 나름 한가락 하시던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연로하신 분들이 자식 집에 가는 것보다 교회 오는 것이 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해 드려야 합니다.
어린이는 어린이답게 사랑받고, 젊은이는 젊은이답게 교회의 기둥처럼 기쁨으로 쓰임을 받고, 어른은 어른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 품격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부모를 당연히 공경하듯이 32절은 부모와 같은 어른을 깍듯이 예를 갖추어 대할 것을 가르칩니다. 어쩌면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에게 32절 말씀은 직접 관계가 성립 안 할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32절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으면 됩니다. 인생 경륜과 지혜가 가득하게 들어있는 어른을 인생의 안내자라고 여기면 그 마음 자세가 복이 될 것입니다.
2. 노인의 얼굴을 공경해야 합니다. |
32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지금까지 센 머리 앞에서 우리 모두 일어서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나라는 일인칭의 관점에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32절을 우리 모두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이해하고 받으시면 좋겠습니다.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라고 한 후 노인의 얼굴을 공경할 것을 명령합니다.
공경(הָדַר 하다르)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존경하라는 뜻입니다. 나이가 많다고 무조건 존경하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경건을 잘 지키려는 분을 공경하라는 말씀입니다. 만일 믿음의 길을 이탈하여 비난받을 만한 행동을 할 때는 두둔할 필요가 없습니다(레 19:15).
그러나 현실에서 노인을 공경하는 일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어렵다는 말입니다. 젊은이들은 얼굴을 좋은 화장품으로 가꾸다 보니 혈색도 좋고 탄력도 있습니다. 반면 노인의 얼굴은 탄력도 없고 많이 일그러져 주름의 골짜기입니다.
향수를 치고 화장품으로 가꾸어 향긋함이 나는 젊은이들에 비해 외모도 형편없고 몸에서 향긋함도 나오지 않습니다. 나온다면 향긋함이 아닌 노인 냄새입니다.
물론 나이가 들면 들수록 지혜롭게 얼굴과 몸을 다듬고 가꾸어야 하겠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그렇다고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나이가 좀 드신 분들 너무 무리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부작용만 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우리 교회 연로하신 분들 최고로 알고 최고로 공경합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32절처럼 하면 됩니다.
사도 바울은 겉 사람은 결국 늙어져 가기 때문에 겉 사람 가꾸는 일보다 속사람을 잘 가꾸는 일을 주문합니다. 우리가 비록 나이가 좀 들어도 속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잘 가꾼다면 그것이 노인의 가치를 최고로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속사람을 잘 가꾸는 분의 얼굴은 비록 주름의 굴곡이 심할지라도 공경할만한 삶의 지혜, 믿음의 지혜가 있습니다.
공경받을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성경은 바로 이런 분을 공경하라는 것이지 하나님의 얼굴을 떠난 사람을 공경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고후 0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서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는 일은 부모를 당연히 공경해야 한다는 기본 전제가 들어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사회는 노인을 공경하면서 믿음의 공동체를 훈훈하게 하였고 이 일을 통해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 일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리로 가는 길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나오기 때문입니다.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라는 말씀을 통해서 부모를 공경하고 효를 실천하는 김삼일 가족 됩시다. 부모는 자녀에게 좋은 것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필요한 만큼 넉넉하게 해 주시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때는 그것이 최고였습니다.우리의 기대만큼은 채워지지 않았을지라도 부모는 최선을 주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과 달리 우리 김삼일 가족은 부모를 우선순위로 섬기는 자리에 섭시다. 이제 우리가 부모에게 평안함과 기쁨으로 지낼 수 있도록 섬겨야 할 때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이제부터 부모에게 효도하며 삽시다. |
잠 23:22 너를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김삼일 가족 여러분, 세상 사람은 갈수록 연세 많으신 부모 모시기를 꺼립니다. 오히려 짐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부모는 지금도 자녀를 챙겨주시기를 좋아하십니다.
신앙인은 부모를 최고로 섬겨야 하겠지만 요즘은 부모 공경 시대가 아니라 자식 공경하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주변을 보면 더러 자녀가 부모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자식 마음 상할까 봐 자식 눈치 보고 자식 비유 맞추는 일은 이제 흔한 일입니다.
우리가 부모를 제대로 섬기지 못해서 가슴을 아프게 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부모를 통해서 우리의 생명을 세상에 보내셨고 부모의 사랑을 통해서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부모의 생명을 평안함과 기쁨으로 지낼 수 있도록 섬겨야 합니다.
이 일이 자녀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요즘은 부모보다 자식이 더 섬김받는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자식이 최고입니다. 그야말로 오냐오냐하며 키웁니다.
18세기 영국의 유명한 문필가 Samuel Johnson[1709-1784]이 어느 여름날, 비가 막 쏟아지는 복잡한 장터에서 홀로 몇 시간이고 서 있습니다.
사람이 지나가면서 인사를 해도 받지 않고 말을 걸어도 대답도 하지 않고 그냥 서서 눈물만 흘리고 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왜 그렇게 비를 맞고 서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마침내 새뮤얼 존슨이 말을 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 바로 이 근방에서 아버지가 헌책방 가게를 하셨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몸이 좋지 않으셔서 저에게 하루만 대신 나가 주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릴 적 헌책 장사하시는 아버지의 일을 부끄럽게 여겨 간절한 청을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아버지께서 아픈 몸을 이끌고 장터에 나가신 것이 무리가 되었던 탓인지 몸이 약해져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 후 불효한 일이 생각나서 무덤 앞에 꿇어 엎드려 통곡해도 시원치 않아 그 옛날 불효를 범했던 이 자리에 와 벌을 받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예, 효도는 반드시 때가 있습니다. 때를 놓치면 후회막심입니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 안타까워하기보다 살아 계실 때 그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십시오(잠 23:25, 골 03:20).
효도하는 일에는 복이 있습니다. 물질의 복이 있고, 장수의 복이 있고(신 05:16) 약속한 형통의 비결도 있습니다(엡 06:01~03).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하는 것은 무슨 공경할 만한 일이 꼭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낳아서 키워주신 부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같은 길을 갑니다. 우리의 부모님이 걸어가고 있는 그 인생길을 갑니다. 이제 남은 시간 효도할 때입니다. 자녀에게 효도 받는 분량은 내가 한 만큼 받게 됨을 기억하십시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한 시골에 할머니는 없이 혼자 적적하게 사는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이에 아들이 아버지에게 서울로 올라와서 같이 살자고 설득합니다.
아들이 그렇게도 권하니 아버지는 못 이기는 척 짐을 싸서 서울 아들 집으로 왔습니다. 아들 집에서 지내는데 하루하루가 무료하고 적적합니다.
시골에서는 마음대로 다녔는데 아파트에 그냥 들어앉아만 있으니 얼마나 답답합니까? 이보다 더욱 견딜 수 없는 것이 집안의 위계질서입니다.
집안의 분위기를 보니 위계질서에서 며느리가 1호입니다. 며느리가 최고라는 뜻입니다. 아이가 TV를 보다가도 며느리가 한 번 소리 지르면 단번에 방으로 들어갑니다. 아들도 술을 먹고 떠들다가 며느리가 한마디 하면 꼼짝없이 들어가서 잡니다.
2호는 누구인가 보니 손자입니다. 천하없어도 손자가 최고입니다. 아들 하나 있는 것 세상에 건드릴 사람이 없습니다. 3호는 자기 아들입니다.
또 4호가 누구인가 보니 강아지입니다. 강아지가 대접받고 있습니다. 5호는 가정부입니다. 그리고 6호가 비로소 할아버지 자신입니다.
며느리가 밖에서 일을 보다 들어와서는 가정부에게 묻습니다. 아들 밥은 주었느냐? 또 강아지 점심은 주었느냐고? 그런데 시아버지 진지 드렸냐고 물어본 적이 없습니다.
노인이야 먹든지 말든지 그다지 인정이나 대접받지 못하는 겁니다. 그저 방구석에 얹혀사는 존재입니다. 그러자 이 할아버지는 너무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더는 그곳에서 살 수가 없어서 조용히 짐을 쌌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간단하게 편지를 남기고 시골로 내려왔습니다. 3호야 잘 있거라. 6호는 간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마음에 거하시는 주님은 몇 호에 해당합니까? 1호입니까? 아니면 4호 이상으로 밀려나 있습니까?
우선순위 1호가 되게 하십시오. 그러면 내가 부르기만 하면 도와주십니다. 주님은 내가 힘들어할 때 찾아오십니다. 위로해 주십니다. 풀어주십니다. 그분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며 효도와 더불어 사십시오. 이제부터 교회에서 특별히 어른을 잘 공경하며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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