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을 짓누르는 가장 무거운 짐이 무엇입니까? 스트레스입니다. 스트레스는 사람을 쉽게 지치게 하는 생명파괴 요소입니다. 스트레스는 사람이 사소한 일에 짜증스러운 반응을 일으키게 합니다.
스트레스는 사람에게 심각한 질병을 안겨 주는 선봉장입니다. 스트레스는 정신분열증을 유발하는 발병인자입니다. 스트레스는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앞잡이입니다. 스트레스는 행복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불행 바이러스입니다.
모두가 이런 스트레스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안간힘을 씁니다. 다양한 활동과 문화생활을 하는 이유도 이런 스트레스로부터 탈출해 보려는 의도가 깊게 배어 있습니다. 또 이런 활동이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됩니다.
많은 사람이 병원 문을 두드리지만 병원에서 스트레스 해방을 선언해주지 못합니다. 그러니 스트레스 내게서 완전히 떠난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그러면 온갖 스트레스에서 우리가 해방되어 진정한 안식을 누리는 길은 없습니까?
온갖 무거운 짐을 벗고 솜털보다 더 가볍게 살아갈 방법은 없습니까? 세상 짐이 아닌 예수님의 짐을 지면 됩니다. 주님께서 내 멍에를 메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스트레스를 풀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나의 모든 문제를 풀어주시는 말씀으로 믿으면 복이 됩니다. 그래서 설교 제목을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삽시다」 로 정하고 말씀을 강론하겠습니다.
1. 예수님께서 멍에를 메라 하십니다. |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우리가 아주 잘 아는 말씀입니다. 자주 인용하는 말씀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습니다. 28절의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말씀입때문입니다. 휴식을 주신다는 말씀 때문에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의미를 잘 헤아리지 못합니다.
멍에(ζυγός 쥐고스)가 무엇입니까? 멍에는 주로 소나 나귀가 밭을 갈 때나 짐을 실은 수레를 끌고 갈 때 등에 얹는 도구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소가 능률 있게 일을 하느냐의 유무는 멍에를 얼마나 잘 만드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멍에를 만들 때 소의 사이즈를 잘 측정해야 합니다.
팔레스타인의 농부들은 두 마리의 소가 함께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나의 멍에에 구멍을 두 개로 뚫어서 연결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멍에는 항상 짝을 이루어 메게 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두 마리의 소 중 어느 한 마리가 빨리 리더를 결정합니다.
리더가 결정되면 다른 한 마리 소는 그저 따라만 갑니다. 이렇게 서로의 역할이 정해져야 일이 잘 진행되지 그렇지 않으면 채찍질이 기다립니다. 이런 현상을 보면 소가 우둔한 동물이 아니라 매우 지혜 있는 동물입니다.
주인은 대개 두 마리의 소 중 한 마리는 크고 한 마리는 작은 소로 배치합니다. 큰 소와 작은 소가 함께 하나의 멍에를 멘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아무래도 멍에를 같이 메고 가면 작은 소의 멍에가 가볍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멍에를 메라 하심은 가까이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넓게 적용하면 일종의 은유법(隱喩法)으로서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밭을 가는 소에게 멍에를 지우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당연히 소의 주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멍에를 메라 하심은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나는 그분의 종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찬양할 때, 말씀을 들을 때 나의 생명의 주님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바로 이 표현이 멍에를 질 수 있는 기본 자격입니다. 예수님께서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하신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몸과 사랑으로 움직이는 실천입니다.
28절 말씀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말씀이잖습니까? 28절로 끝나면 우리에게 너무 행복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조건이 하나 붙습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야 쉼을 얻는다는 조건입니다. 28절과 29절을 놓고 보면 완전히 상반되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생 짐을 내려놓으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멍에를 메라고 하시니 이것은 짐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짐을 더 지는 셈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나의 멍에를 메라 하였으니 이 멍에는 무엇을 말합니까? 율법과 세상의 멍에가 아닌 주님께서 제시하시는 새로운 멍에입니다. 우리의 인생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멍에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멍에는 세상의 짐과 같이 질 수 없습니다.
고후 0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2. 예수님께서 메라 하신 멍에는 쉽고 가볍습니다. |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지라고 하신 멍에를 지는 삶입니다. 세상 짐을 내려놓고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따라 사는 생활이 멍에를 멘 삶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은 예수님께서 지라고 하신 멍에를 잘 메려 하지 않습니다. 메기는 하되 자기의 생각과 방법을 따라 멍에를 메려고 합니다.
30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지라고 하신 멍에는 쉽다고 하십니다. 소가 멍에를 멜 때 짐이 너무 무겁다고 탄식합니까? 그저 묵묵히 받아들입니다. 그러면 쉽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쉽고'(χρηστός 크레스토스). 부드럽다, 좋다, 친절하다 등의 다양한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메라고 하신 멍에는 다양한 의미가 있습니다. 어거스틴(Augustine)은 예수님의 멍에를 새의 깃털에 비유하면서 그 깃털이 창공을 자유롭게 날 수 있을 만큼 가볍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십자가의 짐과 계명은 사람의 계명과는 달리 무겁지 않습니다(요일 05:03). 예수님께서 메라 하신 멍에는 복 받는 세계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지라고 하신 멍에는 나 혼자 지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다지 무거운 멍게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져야 할 죄와 율법의 짐을 다 지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매고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과 같이 멍에를 메면 얼마든지 질 힘이 나옵니다. 혼자 짊어지는 멍에는 힘이 들지만, 예수님과 함께 지는 멍에는 얼마든지 질 수 있습니다.
가벼움이라(ἐλαφρός 엘라프로스). 구원받은 성도는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졌으면 무겁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면 가고 오시면 오고 멈추시면 멈추고 돌아서시면 돌아서십시오.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잘 몰라도 예수님이 이끄시는 대로 가면 됩니다. 소를 제대로 부릴 줄 아는 주인은 소를 무조건 일 가운데로 몰아넣지 않습니다. 적당한 휴식과 일로 균형을 맞춥니다.
여러분은 세르파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티베트에서 살다가 네팔로 넘어와서 사는 부족 이름입니다. 동쪽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네팔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최하층민입니다.
이들은 세계에서 제일 높은 에베레스트산(공인 8848m)을 정복하려고 오는 사람을 안내하여 버는 돈으로 생활합니다. 세르파는 고산 지대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산을 오르내리는 전문가입니다. 에베레스트산을 오르는 데에는 산 밑에서부터 정상까지 약 한 달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바로 이 위험한 곳을 세르파가 잘 안내해 줍니다. 세르파가 없는 등산은 불가능입니다.
이들이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고 먼저 높은 곳에 올라가서 로프를 걸어 주면 그 로프를 타고 올라갑니다. 가끔은 세르파가 악천후를 뚫고 먼저 나아가다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 때문에 결국은 에베레스트산을 정복할 수 있고 이들 때문에 그 길을 가볍게 갈 수 있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주님의 멍에를 메고 믿음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까? 세르파와 같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무거운 짐을 대신 져 주시고 앞날의 인도자가 되실 때 천국까지 갈 수 있습니다.
3. 나는 혹 종의 멍에를 메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
갈 05:0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율법의 멍에에서(롬 08:01~11) 해방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메어 있는 죄의 멍에를 벗겨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율법의 자리로 돌아가려 합니까? 왜 옛 생활로 돌아가려 합니까? 그러면 다시 종의 멍에를 메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이미 신령한 자유를 받아 누리는 자리에 심어졌습니다. 비록 육체가 고달픔 속에 있어도 영혼은 죄에서 벗어난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은혜의 멍에 아래서 지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멍에를 메고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자유를 누리는 자리를 사수하여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예수님께서 메라고 하신 멍에를 성경 원리를 따라 메고 가면 됩니다. 제자의 길을 가는 성도는 그 메고 있는 멍에가 가볍습니다. 주님과 함께 지고 가는 인생 짐은 가볍습니다. 이 짐을 지고 가는 길에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 짐을 때로는 십자가의 멍에라고 하고 십자가의 짐이라고도 합니다. 이 짐을 메고 가는 믿음의 길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누립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김삼일 가족 여러분, 나를 이곳에 심어주신 이가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까? 믿음의 눈으로 보면 수고와 봉사의 길에는 심령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영혼의 안식이 있습니다. 교회생활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편한 것 같습니까? 오히려 스트레스입니다.
쉬어도 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괴로움입니다. 교회생활은 누구든지 자기에게 맞는 적절한 일을 찾아서 믿음으로 감당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기도하고 믿음으로 나가는 길은 혹 힘들고 어려울 것 같아도 예수님이 다 담당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칭찬과 상급도 따르고 은혜와 기쁨도 따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멍에를 메라고 하셨는데 아직도 나는 세상 멍에 메는 일이 더 즐겁습니까? 신령한 멍에를 벗고 살면 불행만이 기다립니다. 이것 하나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독교는 짐을 벗는 쉼터입니다.
세상의 멍에를 벗고 주님 안에서 믿음의 멍에를 메는 곳입니다. 그때 행복의 길이 보입니다. 사람의 살아가는 첫째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우선으로 삼고 주님 안에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섬기는 삶입니다.
롬 14:0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가는 사람은 공동체를 살리는 가치관을 품고 있습니다. 자기를 내려놓고 공동체 중심, 하나님의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혈육을 같이하는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조금도 한이 없겠습니다(공동번역 롬 09:03).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인간과 가장 흡사한 동물은 무엇입니까? 침팬지입니다. 1975년 킹과 윌슨이라는 생물학자가 사람과 침팬지를 비교 연구한 결과 생물학으로 볼 때 99%가 같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침팬지를 사람처럼 가르칠 수 있습니까? 미국 오클라호마 주립대의 한 연구팀이 동물의 지능 한계를 알아보기 위해 15살 된 침팬지에게 수화를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노력을 기울였고 침팬지가 단어를 익히면 그 단어를 어떻게 언어로 의사 표현하는지를 실험하는 연구입니다. 4년 후 그 침팬지는 약 140여 단어를 외워 수화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연구팀은 그 단어를 사용해 어떤 문장을 만드는지 기대를 하였습니다. 연구팀은 바나나를 먹고 싶다든가 물을 마시고 싶을 것이라는 단순한 욕구를 나타내는 문장을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그 침팬지가 조합한 첫 문장은 Let me out(나를 놓아 달라)이었습니다.
침팬지는 먹을 것이 아닌 자유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였습니다. 침팬지 역시 무엇보다 자유를 원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모든 생명이 결국은 자유를 갈망합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기본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고 누리게 하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예수님은 이 시간 우리에게 주님의 멍에를 메라고 하십니다. 그 멍에를 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삶을 김삼일 가족은 잘 감당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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