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20년 말씀

[어린이 주일] 자녀교육 믿음으로 합시다.(삼상 08:01~05)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0. 5. 2. 06:20
728x90

고대(古代)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Σωκράτης B.C. 469~399.5.7)가 늙고 병들었을 때 제자들로부터 한 가지 부탁을 받았습니다. 선생님, 마지막으로 가장 소중한 메시지 하나만 들려주십시오.

이에 소크라테스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말합니다. 아테네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시민을 향해 간절히 외치고 싶은 말이 하나 있다네. 제자들이 다시 물었습니다. 선생님, 그 말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큰 소리로 말하기를, 사람들이여, 재물을 모으는 일에만 충실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물려받을 아이들에게 좀 더 많은 사랑과 정성을 쏟으십시오. 이것이 내 일생을 통해 얻은 가장 귀한 교훈입니다.

 

자녀를 잘 양육하는 것은 부모에게 맡겨진 최고의 사명입니다.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이 사명을 잘 모릅니다.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양육해 보지만 자녀교육만큼은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사사요 대제사장이었던 엘리 가정의 불행한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엘리는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다 마지막 삶을 불행으로 마쳤습니다. 엘리의 뒤를 이은 사무엘 역시 자녀교육에 실패하였습니다. 경건과 믿음의 본을 보였는데도 자녀들은 이스라엘의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사사요 선지자요 제사장입니다.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도 경건한 믿음의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믿음을 따르지 않았으니 여지없는 자녀교육 실패입니다.

사무엘의 인생을 보십시오. 자녀교육을 제하고는 어디 흠잡을 데 없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자녀교육만큼은 사무엘에게 큰 흠()이 되었습니다. 엘리와 사무엘만이 아니라 우리는 이와 같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내 가정의 교육은 잘 이루고 있는가를 돌아보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말씀 제목을 자녀교육 믿음으로 합시다.이렇게 정했습니다. 믿음의 가정 잘 꾸리는 은혜 받기를 바랍니다.

 

 

1. 자녀에게 믿음의 전통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01 사무엘이 늙으매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 사사로 삼으니 02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 때 믿음의 어머니 한나의 서원 기도로 태어났습니다. 특별 기도로 태어났기에 일찍 나실인으로 드려졌습니다(삼상 01:24). 이 사무엘이 자라서 이스라엘의 사사와 제사장으로 활동하였고 선지자의 원조가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탁월한 카리스마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기도로 자신을 무장하였습니다. 그가 늙어 머리가 희어졌을 즈음에 남긴 기도의 교훈이 있습니다.

 

삼상 12:23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사무엘이 두 아들을 사사로 세울 때 나이가 많고 늙었습니다. 그러면 그때 사무엘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을 것 같습니까? 50세 정도입니다.

그 근거로 사무엘이 소명 받은 때가 열두 살(삼상 02:26; 03:01~14)B.C. 1088년으로 보고 사울이 왕으로 취임한 해를 B.C. 1050년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또 미스바 전투가 일어난(삼상 07:05~14) 지 약 5년 후쯤입니다.

 

탈무드(Talmud)는 당시 사무엘의 나이를 52살로 추정하였습니다. 그렇게 장수 시대가 아닐 때 사무엘은 나이가 들자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를 사사로 세워 일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사로 일하는 곳이 브엘세바입니다.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브엘세바(Beersheba)는 맹세의 우물이란 뜻으로서 족장 시대부터 유서 깊은 터전입니다(21:31). 이곳은 이스라엘의 최남단으로 사무엘의 활동지인 라마로부터 약 80km나 떨어진 아주 먼 곳입니다. 브엘세바는 근동과 애굽의 교역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요충지입니다.

사무엘이 이곳에 두 아들을 파송한 것은 자신이 직접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고 또 이곳에 사사를 둠으로써 인접국인 블레셋의 간섭을 배제 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두 아들을 브엘세바에 사사로 보냈는데 안타깝게도 직분을 감당한 일의 평판이 좋은 결과로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사사 직분은 신령한 일입니다. 일꾼을 세우는 일은 더욱 간절한 기도와 신중한 생각과 체계 있는 신앙훈련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좋은 교육환경과 좋은 믿음의 가정에서 자랐을지라도 하나님 앞에나 신령한 공동체에서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직분을 세우는 일은 복된 일이고 동시에 어려운 일입니다.

요즘은 의학이 발달하면서 어머니의 배 속에 있는 태아가 어떻게 성장하는지 그리고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초음파를 통해서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그래서 태아에게 좋은 음악이나 좋은 말을 들려주는 태교가 중요합니다. 아이는 태어나기 전부터 교육을 제대로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는 것은 부모에게 주신 교육의 사명입니다. 가르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단순히 지식으로 알려 주는(Teaching)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아는 것을 실제 생활에 적용하는 훈련입니다(Training). 사무엘은 이 부분에서 믿음의 전통을 물려주지 못하였습니다. 사무엘의 인생에서 이 부분이 큰 흠입니다.

 

 

2. 사무엘의 두 아들은 아버지의 길을 저버립니다.

 

03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엘리 가정과 같은 비극의 모습이 복사판처럼 비치고 있습니다(삼상 02:12). 엘리나 사무엘의 두 아들이 하나님 중심에서 이탈한 것은 거의 비슷합니다.

그 신앙교육의 모습은 완전히 다릅니다엘리는 두 아들의 신앙교육을 분명히 게을리하였습니다(삼상 02:29). 반면 사무엘의 경우는 두 아들을 위한 신앙교육을 게을리 한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교육을 열심히 한 모습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의 두 아들은 아버지가 가르친 그 신앙교육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왜 순종하지 않았습니까?

물욕 때문에 사사의 직분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특별히 지도자에게 금지한 조항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금지가 물질()의 추구(18:21)와 뇌물수수(23:08; 01:23; 05:23; 05:12)입니다.

 

출 23:08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사무엘이 브엘세바로 보낸 두 아들의 행적이 매우 안 좋습니다. 사사의 직을 감당한 일의 평판이 죄악으로 나타났습니다. 평판 내용이 뇌물에 의한 굽은 판결입니다. 사무엘의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의 모습을 보면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하나님 중심의 아버지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사무엘의 두 아들에게 어찌 이런 부정이 일어납니까? 대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물욕으로 제사장직을 잘 못 행하여 저주의 죽임 당한 일을 사무엘은 가까이서 보았습니다(삼상 04:16~22).

 

자녀교육에 대한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무엘입니다. 그런 사무엘이 자기 두 아들의 앞날을 이렇게까지 짐작 못 합니까? 물욕에 사로잡혀 굽은 판단하는 것을 짐작 못 합니까?

김삼일 가족 여러분, 자식을 통해서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 수 있습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자녀교육에 대하여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면 늙어서도 그 교육을 떠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22:06).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단순히 지식으로 알려줄 것이 아니라 실제 생활에 적용하도록 훈련을 하여야 합니다.

진리를 가르칠 뿐 아니라 진리를 행하도록 자녀의 의지를 다루어서 자기 의지로 진리를 행하겠다는 결단을 내릴 수 있게 해 주어야 합니다. 사람은 별다른 직분 없이 평범하게 살면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도자 위치에서 하나님 뜻을 거스르면 그때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가 됩니다. 사무엘의 두 아들 이름을 보겠습니다.

 

큰아들 요엘 이름 뜻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라는 의미입니다. 둘째 아들 아비야 이름 뜻은 여호와는 아버지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친숙한 관계를 나타내기 위한 어휘입니다.

이 두 아들이 이름 뜻과는 다르게 살아갑니다. 아버지의 모습과는 반대로 개인의 물욕을 채우기 위해 뇌물을 받습니다. 공의를 무너뜨립니다. 아름다운 이름값도 못 하는 인생길을 갑니다.

 

딤전 0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3. 지도자의 허물은 하나님을 저버리는 길입니다.

 

0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의미의 요엘, 여호와는 나의 아버지라는 의미의 아비야. 요엘과 아비야 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이름입니다. 두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간절한 신앙의 바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 아들이 이름값을 못함으로 인해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을 등지는 자리에 들고 말았습니다. 04절을 보면 개역판에는 안 나오나 히브리 원문에는 그래서가 나옵니다.

접속부사 그래서(יח )가 왜 나옵니까? 사무엘의 두 아들이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한 일이 빌미가 되어 이스라엘 각 지파 장로들이 사무엘을 찾아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들이 사무엘에게 나아와서 요구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두 가지 이유를 내세웁니다. 첫째는 사무엘의 노쇠에 따른 불안감이고 두 번째는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의 악행과 무능함에 대한 불신감입니다. 이에 이스라엘 장로들은 주변 나라들 즉 모압, 암몬, 에돔 등과 같은 정치 체제를 사무엘에게 세워달라고 요구합니다.

지금까지의 지파라는 동맹 체제에서 벗어나 왕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왕정국가(王政國家) 체제의 요구입니다. 그러면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의 요구가 악한 일입니까? 선한 일입니까?

이 일에 대해서 성경이 어떻게 답을 내리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정 제도는 이미 광야시절 모세가 발표하였습니다(17:14, 15). 이스라엘도 때가 되면 왕정 제도로 전환할 수밖에 없는 형편입니다.

 

왕정 제도로 바꾸는 일의 진행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방법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섭리를 전혀 무시합니다.

오직 인본주의 욕구를 따라 자신들이 원하는 방법으로 왕 세우기를 요청합니다이 부분이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의 문제점입니다. 이에 대한 지도자 사무엘의 뜻과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지를 보겠습니다.

 

06….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0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청을 허락하심은 기쁨의 허락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불신앙을 심판하시려는 허용입니다(13:11).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요구가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사무엘에게 받아주라고 하십니다. 왕정 제도의 온갖 폐해를 깊이 체험한 후에 마침내 하나님만이 참된 왕이심을 깨우쳐 주시려 함입니다이스라엘이 신정 국가에서 왕정 제도로까지 발전하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사무엘의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의 탈선 때문입니다. 이들이 더러운 이권 때문에 굽게 재판한 결과는 이스라엘 전체의 원성을 가져왔습니다. 믿음의 길을 벗어난 종착점은 복이 아니라 불행입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좋은 부모 되기를 원하십니까? 자녀들에게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십시오. 그러면 늙어도 그 길을 떠나지 않습니다. 주님 안에서 거하게 하십시오. 말보다는 본을 보여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부모가 자녀에게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고서는 돌아서서 바로 거짓말을 가르치는 일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받기 싫은 전화가 올 때 자녀들에게 아빠, 엄마 없다고 해라. 여러분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양심의 찔림이 없는 이런 거짓말은 자녀를 탈선하게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를 보십시오. 흠잡을 데가 없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경건한 가정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나 그의 두 아들은 아버지의 길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요엘과 아비야의 이야기는 경건한 집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의 본보기입니다. 이것 하나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가 내 앞에서는 천사처럼 보일지라도 내가 모르는 곳에서는 얼마든지 사고뭉치일 수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런 사실 알고 신앙교육 하여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아보려는 분들은 나름 자녀에게 신앙의 의미가 있는 이름을 지어주거나 성경 인물의 이름을 차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런 부모는 이름에 합당한 생활 하도록 믿음으로 자녀의 길을 인도하여야 합니다. 만일 좋은 이름처럼 살지 못하면 이름을 바꾸십시오. 사무엘의 두 아들 이름처럼 살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습니다그들은 경건한 신앙의 토양 위에 자라난 독버섯과 같은 삶이었습니다.

부끄러운 이름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과 가르침이 있어도 더러운 물욕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을 저버리는 길에 들어서고 맙니다. 아무리 좋은 말과 교훈으로 그들을 가르칠지라도 부모가 본을 보이지 않으면 자녀는 좋은 신앙의 사람으로 자라날 수 없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가정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가정에 들어오면 예수님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그런 가정을 꾸리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신앙의 향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고, 그저 학교 공부만 강조하는 가정의 분위기는 아닙니까?

공부 잘하는 것 중요합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앙의 교육과 훈련입니다. 말씀의 훈련입니다. 디모데가 어릴 때부터 믿음으로 교육을 받은 현장을 전하며 말씀을 마칩니다.

 

딤후 01:0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