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9년 말씀

나도 터진 웅덩이와 같습니까? (렘 02:04~13)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9. 11. 2.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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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일 전 조국 법무부 장관이 사임했습니다(1014). 야당에서는 자기들이 승리했다고 하고 여당에서는 정부가 양보했다고 합니다. 정치는 명분이 있어야 주도권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를 쓰고 촛불집회 태극기집회를 계속하였습니다. 큰 대중 집회를 한번 하는 데 약 40억 원 정도의 비용이 듭니다. 문제는 교회입니다. 사회는 물론이고 교회도 두 진영으로 나누어져 대립과 갈등 구도가 되었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은 이런 정치 현상을 보면서 무엇을 느낍니까? 여러분은 조국 전 장관과 특별한 관계가 있습니까? 없잖습니까? 이럴 때는 조금 물러서서 보아야 합니다. 각자의 성향을 따라 어느 쪽을 지지하든지 간에 믿음의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남의 일로 내가 믿음 손상을 입지 말자는 뜻입니다.

 

오늘 저의 설교를 녹화해 놨다가 백 년쯤 지난 22세기에 듣는다고 가정(假定)해 봅시다. 그때까지 주님께서 재림하시지 않는 전제 아래서 말입니다. 설교를 듣는 사람이 정확하게 이해를 할 것 같습니까? 아무래도 안 될 것입니다. 일단 설교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201910월 현재의 대한민국 정치 상황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어떻게 시간을 되돌릴 수 있습니까? 인터넷 열람으로 가능합니다.

오늘 말씀도 이런 원리를 따라 연구하고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전하시는 당시의 사회 상황을 잘 살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레미야가 유다 백성의 신앙관을 터진 웅덩이에 비유합니다. 터진 웅덩이는 다른 곳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 좀 재미있는 용어입니다. 왜 이런 용어가 나왔으며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래서 설교 제목을 나도 터진 웅덩이와 같습니까? 로 정하고 오늘 말씀을 강론하겠습니다.

 

 

 1. 터진 웅덩이가 된 당시의 사회 상황입니다.

 

08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율법을 다루는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에게 반역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제사장, 율법을 다루는 자, 관리, 선지자 이 네 부류의 직책은 유다 왕국의 핵심 기득권층입니다. 소위 백성의 인도자그룹입니다. 제사장(כּוֹהֵן 코헨).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자로서 율법 해석도 하였고 또 우림과 둠밈을 적절히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자입니다(28:30; 27:21). 

율법을 다루는 자(תָּפַשׂ 타파스). 율법 교사를 말합니다. 관리(רָעָה 라아). 목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인도자요 통치자로서 주로 행정을 맡아 집행하는 정치 지도자입니다. 선지자(נָבִיא 나비). 선견자 혹은 예언자로서 하나님에 의해 부름을 받았고 하나님이 보낸 자로서 하나님 말씀만 전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대부분 제사장은 이런 직무에 태만하였고 또 직분을 남용하였습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재판하는 소위 율법 전문가도(02:05~08) 하나님 말씀을 기준하지 않고 사사롭게 판단하였습니다. 사회주도층 대부분 사람이 곁길로 나간 셈입니다. 

이에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떠나 우상의 길로 나간 지도층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엄중히 경고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봅시다. 어떤 인물입니까? 유다 왕국 요시야 왕 때(01:02) 21세의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후 예루살렘이 함락된 시드기야 왕 11(52:01)까지 50여 년간 선지자 일을 하였습니다(B.C. 627~586). 그 시절 북쪽에는 바벨론 남쪽에는 이집트 두 강대국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지도자들은 바벨론파 이집트파로 분열이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깊은 통찰력을 바탕으로 왕에게 바벨론 편에 서야 국가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건의하였습니다. 반면 거짓 선지자들은 이집트의 보호를 받자고 하였습니다. 유다 왕국이 큰 혼란에 빠진 이유를 예레미야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을 멀리하였기 때문이다. 정확한 진단입니다. 05절을 보십시오.

 

05 나 여호와가 이와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헛된(הֲבֵל 헤벨) 것을 따라 헛되이 행했다는 말은 일종의 언어유희(言語遊戲)입니다. 원문으로 읽으면 공허한 것을 따라갔기 때문에 결국 공허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사회지도층 모두가 하나님을 향한 관심이 단절되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는 풍요, 바알이 제공한다고 여기는 풍요에 유다 백성의 마음이 옮겨진 셈입니다. 예레미야는 지도층의 불신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지름길이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유다 백성의 허물을 지적하는 모습이 07절에 또 나옵니다.

 

07 내가 너희를 기름진 땅에 인도하여 그것의 열매와 그것의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거늘 너희가 이리로 들어와서는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기업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으며.

 

과거의 선조들이 광야에서 누리던 복에 비하면 가나안에서 누리는 복이 얼마나 큰데 이러느냐고 묻습니다. 무엇이 부족해서 하나님을 떠나 사는 일에 욕심을 채우려 하느냐고 묻습니다. 이집트를 의지하다가는 나라 전체가 파선한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도 지도층 인사 대부분이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바벨론이 아닌 이집트의 보호 아래서 장래를 보장받으려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바로 깨닫지 못하므로 결국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유다 왕국은 막을 내리고 맙니다.

 

 

 2. 회개의 경고를 받고 돌아와야 살길이 열립니다.

 

12 너 하늘아 이 일로 말미암아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큰 위기를 맞았을 때 하나님의 뜻을 유다 백성에게 전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메시지에 오히려 거부감만 더 드러냅니다.

예레미야를 욕하고 때리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동시에 달콤한 미래를 선포하는 거짓 선지자들 말에 더 귀를 기울였습니다. 유다 왕국은 멸망으로 가는 길에 들어섰습니다예레미야는 이런 상황을 맞자 다시는 유다 왕국을 향해 예언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집에 들어앉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불타오르는 사명감은 예레미야를 다시 거리로 내몰아 갑니다.

 

20:0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예레미야가 살던 곳은 베냐민 땅 아나돗입니다(01:01).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지역입니다. 그러다 보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국내외 정치 상황을 보고 들을 기회가 많았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 부름을 받은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선지자입니다. 거짓 선지자와는 다른 시대를 일깨우는 선지자입니다. 유다의 멸망이 다가오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서 우리나라는 망합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라고 외치는 선지자입니다.

 

그런데도 이 예언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습니다. 남방의 강대국 이집트와 동맹을 맺으면 그들이 나라를 지켜 줄 믿고 왕을 비롯한 모든 사회주도층이 남방으로 달려갑니다. 12절 말씀을 잘 보십시오

너 하늘아 이 일로 말미암아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라고 나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을 보아야 합니다. 10, 11절입니다. 깃딤(키프로스) 섬은 지중해 연안과 소아시아 연안의 여러 섬을 말합니다. 유다 왕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좀 미개한 나라라는 뜻입니다.

게달에도 사람을 보내어 살펴보라고 합니다. 게달은 팔레스타인 동쪽 사막 지역에 거주하던 아랍 부족으로서(49:28~33) 깃딤 섬의 민족들처럼 좀 미개한 민족입니다. 그들에 비해 유다 백성은 조상 때부터 전능하신 하나님을 섬겨오는 민족 아닙니까


헛된 우상을 섬기는 민족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에 예레미야가 하나님 말씀으로 경고합니다. 어떻게 유다 백성이 우상 섬기는 헛된 일을 할 수 있느냐는 지적입니다. 이런 일은 멸망의 길이라고 경고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일이 허무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그 마음에 경고합니다.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 때로는 손해를 볼 수 있고 박해도 받을 수 있는데 이 일을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유다 백성에게 경고합니다.

 

그러나 완악한 왕과 사회를 주도하는 권력자들은 자기들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예레미야를 감옥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반면 자기들 귀를 즐겁게 하는 거짓 선지자의 말을 더 가까이하였습니다. 예스맨의 소리를 더 좋아하였습니다. 사악한 왕 여호야긴은 예레미야가 쓴 두루마리를 읽고 코웃음을 치면서 불쏘시개로 쓰라고 명했고 제사장 바스훌은 예레미야에게 매질을 가하고 나무에 매달기도 했습니다(20:02). 

김삼일 가족 여러분, 이 시대가 바로 예레미야가 예언하던 그때와 매우 흡사합니다. 오늘 말씀의 메시지를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기를 바랍니다.

 

 

 3. 결국 터진 웅덩이가 되었습니다.

 

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터진 웅덩이가 된 첫째 이유는 생수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생수란 사람을 비롯한 만물이 살아가는데 절대 필요한 물질입니다. 사람의 몸은 대략 수분이 70% 정도 됩니다. 사람에 따라 70%를 기준으로 오차범위는 약 5%입니다. 이 가운데 10% 내의 수분이 빠지면 탈수 현상으로 죽습니다.

만물은 물을 절대 필요로 합니다. 다행히도 우리가 사는 지구에는 인류 전체가 먹을 수 있는 물이 충분히 있습니다. 다만 사람 욕심으로 인한 전쟁 때문에 아프리카 등 여러 지역에서 심각한 물의 곤란을 받고 있습니다. 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영과 육으로 구성된 줄 아시지요. 생명 유지를 위하여 생수가 절대 필요하듯이 영의 생명을 위하여도 생수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생수는 H2O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광야를 지날 때 신령한 생수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08:03.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 공생애 초기 사탄의 시험을 받을 때 영의 생명 유지를 위한 생수를 놓고 신 08:03 절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04:04). 예수님은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서 여자와 대화를 나눌 때 먼저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04:13, 14).

다음으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서 영생에 이르는 샘물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다 왕국의 네 부류 지도층 인사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지금 이 사실을 지적합니다.

 

터진 웅덩이가 된 둘째 이유는 스스로 웅덩이를 팠기 때문입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물이 귀했으므로 우기 때 물을 저장하기 위한 갖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 공동체 저수지를 만드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그리 만만하게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럴 때 가장 지혜로운 일이 무엇일 것 같습니까? 물이 귀한 지역에서 가장 지혜로운 일은 각자가 빗물을 저장하기 위해 웅덩이를 파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웅덩이 판 일을 악한 일로 규정합니다. 아니 당연한 일을 놓고 악을 행하였다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의 기후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팔레스타인은 지역 전체가 일 년을 놓고 볼 때 건기와 우기로 나누어집니다. 우기는 또 이른 비와 늦은 비로 나뉘어 이른 비는 10~11월에 내립니다. 우리나라 봄비에 해당하는 파종의 비입니다. 늦은 비는 3~4월에 내리는 곡물 결실비로서(11:14) 우리나라 가을비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이런 비가 가끔은 안 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를 대비하기 위해 빗물을 받아두는 웅덩이를 파는 일입니다. 그러나 문화가 그렇게 발달하지 못한 구약시대 아닙니까? 웅덩이를 파도 그렇게 든든하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웅덩이를 판 후 물이 새지 않도록 석회를 발라 놓습니다. 이마저도 우기가 끝나고 건기가 되면 대부분 웅덩이에 바른 석회에 균열이 생깁니다. 결국 터진 웅덩이가 되어 빗물을 저장한 물은 다 새어 나가고 맙니다. 허사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가 터진 웅덩이를 거론하는 근본 이유가 무엇일 것 같습니까? 사회지도층이 하나님을 버리고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우상의 길로 갔음을 깨우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오늘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들으면서 시대의 흐름을 보아야 합니다. 동시에 건강한 국가관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우상의 길로 나간 유다 왕국의 사회주도층,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다고 하면서도 순종하지 않은 그들의 앞날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생명 주시는 은혜 역사가 중단되었으며 마지막은 멸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성도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를 마시는 생명 역사가 날마다 일어나야 합니다. 아직도 기도할 때 감동이 없다면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 돌아오지 못한 결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리로 나아와야 합니다.

형식으로만 하나님을 섬길 것이 아니라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 말씀으로 자신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그 생명 역사를 이웃에게 흘러내려야 합니다. 터진 웅덩이 같은 심령으로는 이웃의 구원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신령한 만족은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만족을 누리는 것이 곧 생수를 마시는 일입니다. 세상에서 화려한 생활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하게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삼읍시다

이런 일에 에너지를 기울일 때 마르지 않는 생수가 임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터진 웅덩이와 같습니까? 영원히 생수를 저장할 수 있는 든든한 웅덩이와 같습니까? 각자가 믿음으로 판단하셔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자리를 지키며 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