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9년 말씀

그때에 아버지께 복을 받을 자들(마 25:31~46)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9. 10. 19. 16:50
728x90

성경에는 양()을 여러 형태로 비유하였습니다. 가령 하나님의 백성을 양으로(09:26), 의인을 양으로(25:23), 성도를 양으로(21:16) 말입니다. 오늘 말씀은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처럼 주님께서 마지막 심판 때 구원받을 자와 받지 못할 자로 구분하신다는 선언입니다

우리 모두 그때는 오른편 양과 같은 무리에 있던지, 아니면 왼편의 염소처럼 구원받지 못한 무리에 있던지 구분이 될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 오른편의 양과 같은 성도에게는 놀라운 복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

어떤 복입니까?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34). 이 선언보다 더 복된 선언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오늘 마지막 그때에 될 일을 강론하려 합니다. 그래서 제목을 그때에 아버지께 복을 받을 자들이렇게 정했습니다.


  

 1. 양과 염소의 구분 원리는 종말의 심판 원리입니다.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하여 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팔레스타인에서 양과 염소는 성격이 다른 가축입니다. 염소는 옥내에 해당하는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을 좋아하고 양은 들판에 방목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가뭄을 만나면 염소를 울타리 안에서 키우기가 어렵습니다.

그때는 목자가 염소를 양과 같이 섞어서 방목하여 키웁니다. 양의 특성은 흰색의 긴 털을 가지고 있어서 추위에 매우 강합니다. 염소는 대부분 검은색 짧은 털을 가지고 있어서 추위에 약합니다. 양과 염소가 섞여 지내도 성격이 매우 달라서 잘 어울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목자는 양과 염소를 함께 방목할 때도 상당한 신경을 씁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목자는 양과 염소를 구분하여 우리로 들입니다. 양은 특성상 시원한 곳을 좋아하고 밤의 한기에 약한 염소는 따뜻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일교차 심한 팔레스타인에서 염소를 밤에 추운 곳에 방치하면 감기에 걸리거나 자칫 죽는 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잘 따르지만, 염소는 목자의 소리를 잘 외면하는 기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자가 저녁이 되면 양과 염소를 분리하는 일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주님은 목자가 저녁이 되면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원리를 잘 아셨습니다. 바로 이 원리를 마지막 심판 때 구원받을 자와 심판받을 자를 구분하는 일에 적용하십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심판 때 진행하실 일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같이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은다는 말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민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24:14, 28:19; 17:26). 믿든지 안 믿든지 모두가 심판의 대상입니다. 복음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기 때문에 모든 민족은 심판의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 앞에 모으고(συνάγω). 소집하다, 모으다 의미로서 모든 인류를 주 앞으로 모으는 천사의 추수꾼 역할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24:31).

 

24:31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양과 염소가 한 곳에서 섞여 풀을 뜯지만, 저녁이 되면 서로 갈라집니다. 목자가 각각의 우리로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처럼 주님은 마지막 심판 때 의인과 악인으로 구분할 것을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한데 얽혀 자라고 있으나 마지막 그날에는 반드시 나누어집니다(13:30). 주님의 심판 때는 중간 지대가 없습니다. 최후의 심판에는 틀리는 일이 없다는 사실과 그 앞에서 누구라도 피하여 갈 수 없음을 우리 김삼일 가족은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날에 두 여자가 맷돌을 갈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림받는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24:41). 버림당하는 대상에 내가 들어가지 않도록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마지막 때에 실제 일어날 일이기 때문에 이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2. 그때에 복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34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1절을 보면 심판의 주체가 인자(υἱός)입니다. 그런데 34절을 보면 심판의 주체가 임금으로 바뀌어 나옵니다. 왜 인자를 임금으로 표현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심판의 주님뿐만 아니라 만왕의 왕으로 오셨음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이런 비유는 여러 곳에(02:02; 21:05; 27:11) 나타나며 보좌에 앉으신 인자의 통치권을 강조합니다. 모든 민족의 통치권과 심판의 권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그때에(τότε at that time). 시간 지시부사로서 과거나(벧후 03:06) 미래의(13:43) 특정한 시기나 순간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그때는 미래 종말론의 어느 특정한 시간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 단어가 마 24, 25장의 주님 오심을 열어가는 키워드입니다. 우리는 장차 다가올 종말론의 그때를 내다보고 살아갑니까? 종말론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말입니다

믿음이 건강한 성도는 마지막 심판 때를 준비하며 살아갑니다. 종말론에 빠져서 무위도식하는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처럼 살지 않습니다. 잘못된 종말론에 빠진 자들은 주님께서 이제 곧 오실 것인데 지금 육신의 일을 하고 있을 때인가 하며 일상생활을 거부합니다

그들만의 도피처로 잠입하는 일도 있습니다. 믿음이 건강한 성도는 마지막 때를 믿음의 눈으로 내다봅니다. 그때 복을 받을 주인공,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을 성도는 신랑 맞을 등과 기름을 준비하여 참여합니다.

 

01:14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애곡 하는 도다.

 

(εὐλογέω) 받을 자들이여. 오른편에 선 사람을 향한 호칭으로써 41절의 저주를 받은 자들과 완전히 대비되는 문구입니다. 복을 받는다고 할 때 그저 축복의 말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복을 받는 오른편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35, 36절이 바로 기준입니다. 35 주님께서 주릴 때, 목마를 때, 나그네 되었을 때, 36 헐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옥에 갇혔을 때의 여섯 가지 상황에서 따뜻하게 돌아보신 일을 기준으로 제시하십니다.

그러자 오른편에 있는 자들이 언제 우리가 주님을 이렇게 돌아보았느냐고 반문합니다. 이에 주님께서 다시 35, 36절을 40절로 압축해 주십니다.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심판의 기준은 사람의 예상과는 전혀 다릅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어떻게 대했느냐에 따라 오른편과 왼편으로 구분이 됩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믿음을 말할 때는 행동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신앙고백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의 실천을 일으키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사랑이 전제되지 않은 믿음은 하나의 열정이지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사랑의 실천이 있는 믿음을 원하십니다.

 

02: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3. 그때에 영원한 불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영원한 불에 들어갈 사람이 누구입니까? 왼편에 있는 사람입니다. 33절을 보면 목자는 양을 오른편에 두고 염소는 왼편에 둡니다. 왜 오른편이고 왜 왼편입니까?

이 말의 의미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앞쪽을 동쪽으로 정합니다. 태양이 밝게 빛나는 때는 남쪽에서 비췰 때입니다. 따라서 남쪽은 자연히 오른편이 됩니다. 반면 북쪽은 태양을 작게 비추는 왼쪽이 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오른편에 양을 세우고 복 받은 자를 상징하게 하시고 왼편에 염소를 세워 저주받은 자로 상징하십니다


예수님도 구약시대의 사상을 그대로 도입하셨습니다. 구약시대는 오른편을 위엄과 영광과 생명의 자리로 이해했고(15:06; 왕상 02:19; 45:04), 왼편은 저주와 사망과 힘의 상실 자리로 이해했습니다(03:15; 10:02). 

심판 때에 오른편에 서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다는 말이고 왼편에 선다는 것은 영원한 멸망에 떨어지게 됨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면 염소가 왼편에 서는 것과 같은 심판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조금 전 그때에 복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에서 살펴본 여섯 가지 기준 그대로입니다.

 

42 주님께서 주릴 때, 목마를 때, 43 나그네 되었을 때, 헐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옥에 갇혔을 때 돌보지 아니하였다고 하십니다. 복을 받은 오른편 사람은 주님의 기준 앞에서 우리가 언제 그렇게 하였습니까?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불에 들어갈 왼편 사람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44.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심판 기준은 모든 사람의 예상과는 반대였습니다. 결국 심판 기준은 주님께서 사랑하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어떻게 대하였느냐? 입니다. 여기서 왼편에 선 자들이 무슨 악행을 저질렀거나, 의식을 가지고 죄를 범해서 영원한 불에 들어가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이름 없는 이웃, 참으로 힘들게 살아가는 주변의 약한 자에게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일로 인해 심판하신다고 명확한 선을 그어 주십니다

그러면 혹자는 믿음이 아닌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습니다. 오해할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행함이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천국에는 입만 가는 곳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행함에는 믿음이 반드시 들어있는 것이 아니나 믿음에는 행함이 반드시 들어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기 지극히 작은 자들 즉 여섯 부류의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들의 특징이 어떠합니까? 전혀 무기력한 자들 바로 사회 약자입니다. 외부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자들을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소개해 주십니다.

초대교회 시절 교부 터틀리안(Tertullian 155~240)은 너희가 도움이 필요한 형제를 볼 때 그것은 주님을 보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58:10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316년경 헝가리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마르티노(St. Martin of Tours)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일찍 아버지를 따라 이탈리아 파비아(Pavia)로 이주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고, 성인이 되어서는 프랑스의 뚜르에서 활동한 인물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의미 있는 인물이고 유럽에서는 매우 사랑받는 성인입니다. 이 마르티노가 젊은 시절 아미앵에서 군인 생활을 할 때입니다. 337년 어느 추운 겨울날, 그는 거의 벌거벗은 채 추위에 떨며 성문에서 구걸하는 한 걸인을 만났습니다. 마르티노는 도움을 주고 싶은데 가진 것은 입고 있는 겉옷 망토와 칼뿐입니다. 그러자 마르티노는 칼로 자기 망토를 두 쪽으로 잘라 한쪽을 그 걸인에게 주었습니다.

 

그날 밤 마르티노는 잠을 자다 꿈속에서 예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가 걸인에게 주었던 그 반쪽 망토를 걸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천사들과 대화하면서 마틴이 나에게 준 것이다. 라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이때 마르티노가 감동한 후 사제의 길을 걷게 되었고 후에 성자의 반열에까지 올랐습니다. 지금도 독일에서는 1111일에 성 마틴을 기념하는 등불 행진을 합니다. 추운 겨울에 따스한 사랑을 나누어 주었던 마르티노의 사랑을 노래하면서 아이들이 등불을 들고 동네를 행진합니다.

 

마지막 심판 때 주님은 내가 어떤 교파에 속했고 어떤 교리를 붙잡고 있었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고 심오한 은혜 체험을 하였는지 묻지 않습니다. 어떤 큰일을 하고 또 내가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묻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이념을 가지고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도 묻지 않습니다. 다만 삶의 여정에서 만난 이름 없는 한 작은 사람에게 어떤 태도를 보였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오른편 양과 같은 사람이나 왼편 염소 같은 사람 모두가 왜 그렇게 자기들이 그런 자리에 처하였는지를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큰일을 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그런 일보다는 주변의 사람을 돌아보는 착한 마음을 원하십니다. 김삼일 가족에게 도움의 손길이 올 때 외면하지 않으면 됩니다. 천국에서 상급을 결정하는 것은 얼마나 큰일을 하였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단 하나 우리의 주변 작은 이웃에게 어떤 긍휼을 베풀었느냐 달려 있습니다. 주님은 긍휼을 베풀고도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우리 모두 그런 모습으로 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