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부활주일을 맞아 김삼일 가족 여러분 삶의 모든 영역이 기쁨으로 회복되기를 축원합니다. 혹 믿음이 죽어있다면 살아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과 부활주일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제가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하면 여러분은 맞습니다. 맞고요. 로 화답하시면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맞습니다. 맞고요. 예 맞습니다. 맞고요. 주님께서 남기신 부활의 흔적은 우리의 미지근한 믿음을 회복시키는 원동력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부활주일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부활주일이라 달걀을 삶아놓으셨습니까? 부활주일의 의미는 달걀 삶아 먹는 주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달걀을 먹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죽은 것 같은 달걀에서 새 생명이 태어나는 것처럼, 예수님이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음을 기념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2019년 부활주일 메시지를 나는 부활의 증인입니다. 라는 제목으로 강론하겠습니다. 이 복된 날, 주님 안에서 우리 모두 부활의 증인으로 태어나기를 축원합니다.
1.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
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사건에 대하여 여러 차례 설교하였습니다(행 02:32; 03:15; 04:10; 05:30). 초대 교회 시절 사도들의 복음 메시지 내용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입니다.
30절 말씀도 그중 한 부분인데 문장 구조를 잘 보십시오. 부활 사건의 주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셨다는 이 진리의 메시지에 사두개인들이 먼저 반발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중심 역할을 하였으며 무엇보다 부활 자체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셨다고 하니 충돌을 피할 길 없습니다.
초대 교회 시절의 메시지 중심은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하나님이 살리셨다. 이겁니다. 이 단순한 복음이 부흥을 가져왔고 세계 선교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와 텅 빈 무덤 위에 세워진 종교입니다. 기독교의 최대 상징은 십자가요, 빈 무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구원의 확증입니다.
공회원들이 사도들에게 부활의 메시지를 전하지 못하도록 위협한 때로부터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할 약 25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말씀이 들어가는 곳에는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부활 사건만은 성도들 마음에 시원하게 자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이제까지 역사에 없는 특별 사건이기 때문에 잘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에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통해서 이런 안타까운 메시지를 던집니다.
고전 15: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 우리의 구원, 우리의 삶과 죽음 이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허무함과 같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제가 예수님의 부활을 이렇게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분석할 사안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다. 아멘입니까?
현실주의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여러 모양으로 증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 방법으로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냥 믿음으로 받아들여야지 다른 이론을 갖다 붙이면 안 됩니다. 매년 부활주일을 맞이할 때마다 이 놀라운 사건을 놓고 믿어지느냐 안 믿어지느냐로 논쟁하지 마십시오.
지식으로 받아들일 사안이 아닙니다. 예수님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의 일상생활에 기쁨으로 스며들어야 합니다. 만약 부활주일이 기념일 자체로 끝나면 그것은 우리에게 별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삶 가운데 능력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받지 못하면 의와 진리와 선과 사랑 등을 아무리 외쳐도 그것은 생명 없는 하나의 소리에 불과합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부활의 진리가 자리 잡지 못하면 아무리 교회 출입을 많이 해도 잠깐의 화려함을 유지하다 이내 시들어 버리는 화병의 꽃과 같은 격입니다.
2.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인해 회개와 죄 사함을 얻었습니다. |
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31절은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일을 좀 더 자세하게 풀어 놓은 구절입니다. 부활의 주님으로 인해 회개함과 죄 사함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회개함(μετάνοια)이 무엇입니까? 마음의 변화, 회개, 회심 이런 뜻입니다. 그러면 죄 사함(ἄφεσις)은 무엇입니까? 석방, 면제, 용서의 의미입니다.
베드로가 31절에서 회개와 죄 사함을 함께 언급하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가치가 회개와 죄 사함 이 두 선언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회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죄 사함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미 잘 압니다
행 0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그를 오른손(δεξιός 덱시오스)으로 높이사라는 문장을 잘 보십시오. 하나님의 오른손이란 하나님의 능력을 지칭합니다. 예수님은 법 없는 자들에 의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손으로 죽임을 당한 예수님을 하나님은 오른손 즉 권능의 손으로 살리시고 높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살리시고 높이셨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오른손으로 사용된 문장이 구약성경에서 61회 나오고 신약성경에서 15회 옵니다. 한 마디로 사람이 하나님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의인법화 한 단어입니다. 오른손은 신의 능력입니다.
오늘 부활주일 메시지를 통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이 여러분의 모든 삶의 영역에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인한 회개와 죄 사함은 구원의 필수요소입니다. 이 두 가지가 없이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세상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 어떤 감언이설을 동원할지라도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 없이는 구원의 자리에 이르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이름만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유일한 통로입니다(행 04:12).
행 0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복음이 복음 되지 못하는 이유는 죄를 가볍게 여기기 때문이며 이미 마귀의 올무에 걸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죄 사함보다 시급하고 중대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이 화해의 복음, 죄 사함의 복음이 있으므로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이 죽어야 할 만큼의 죄의 심각성을 느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이 길이 열리고 은혜의 길이 열립니다. 사도 요한은 이런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요일 0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3. 나는 예수님 부활의 증인입니다. |
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세상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부활의 복음을 직접 전하시지 않고 사도들에게 위임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육체의 부활에 사람들이 집착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세상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자신의 부활을 증명해 보이셨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처음에는 많은 사람이 놀랍고 신기해서 이리저리 따라다녔을 것이지만 이내 시들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적 보고 찾아온 사람은 이적 끊어지면 오히려 믿음생활 잘못하는 기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의 세상 가치관으로 돌아가는 습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그 근거를 보겠습니다. 오병이어나(마 14:17~21) 칠병이어(마 15:34~38)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 한 분만 지도자로 추대하면 민생고 문제는 해결될 것 같아서 열렬히 지지하고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그렇게도 지지하며 따르던 예수님으로부터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왜 이렇게 급작스럽게 마음이 변하였습니까? 예수님께서 무리를 훈련하시는 메시지 속에서 두 가지의 큰 오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째 오해는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요 06:35) 하신 말씀 때문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요 06:42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이에 예수님이 수군거리지 말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무리가 이번에는 서로 다투면서 이 사람이 어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도록 주겠느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의혹을 가집니다.
둘째 오해는 예수님이 내 살을 먹지 않고 내 피도 마시지 않으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요 06:53) 하신 말씀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자기들 심경을 밝힙니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겠느냐? 하면서 예수님을 떠났습니다(요 06:66).
은혜의 현장을 체험하였던 사람들이 다 떠났습니다.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기에 예수님 믿는 것을 포기하였습니까? 기적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부활 위에 기초를 세운 생명의 종교입니다. 생명의 종교를 마음에 품은 사람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는 사명자의 길을 갑니다.
사도들을 보십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행 04:20). 우리는 이 일에 증인(μάρτυς)이요. 영어의 순교자(martyr)라는 말이 이 μάρτυς(마르튀스)에서 유래했습니다. 증인은 순교의 자세로 보고 들은 것을 전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이 증인의 삶을 강력하게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면 사도들만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입니까? 사도들은 증인의 선구자이지 그들만 증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모든 사람은 증인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증인의 삶이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여러분 간혹 사고 현장에 부착되어있는 목격자를 찾습니다. 라는 현수막을 보셨지요. 그 현수막을 볼 때면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억울한 사고를 당했다는 의미의 현수막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어서 저렇게라도 애타게 현수막을 걸어놓고 사고 현장의 목격자를 기다립니다.
일에는 목격자가 있고 증인이 있기 마련입니다. 목격자는 사건 현장을 본 사람이고 증인은 사건 현장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자입니다. 내 눈으로 확실하게 보았다 하고 증언하는 일이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증언이 자기에게 불리할 수도 있고 혹 증언한 것 때문에 곤욕을 치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증인은 자기가 본 그대로 말해야 합니다. 증인의 가치는 사실과 신실에 있습니다.
새날은 어제 일을 잊고 다시 시작하는 날입니다. 새달은 지난달을 잊고 다시 시작하는 달입니다. 새해는 묵은해는 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해입니다. 오늘 부활주일을 맞아 과거의 올무에 얽매여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무기력한 믿음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올무를 풀어야 합니다.
행 02:24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해방된 믿음, 전진하는 믿음입니다. 오늘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모든 일에서 풀리기를 바랍니다. 오늘 부활주일의 메시지를 들음으로 인해 우리 모두 나는 부활의 증인입니다. 라는 삶을 잘 살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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