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9년 말씀

[종려주일]예수님은 나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사 53:01~06)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9. 4. 13.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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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이사야를 읽으면 좀 재미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6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용상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01장부터 39장까지이고 둘째 부분은 40장부터 66장까지입니다

그리고 이사야 둘째 부분 40장부터 66장까지는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해 집중합니다. 빨리 감을 잡으시는 분은 묘하게도 구약성경 39, 신약성경 27권 합해서 66권과 닮았구나. 라고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둘째 부분 27장을 구약 속의 신약이라 부릅니다.

 

이사야를 기록한 사람은 B.C 742년경 유다 왕국 13대 히스기야 왕 때의 인물입니다. 예수님 탄생 약 740년 전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때는 이스라엘의 북쪽 강대국 앗수르가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때로써 이사야는 이 일을 하나님이 믿음을 저버린 이스라엘에 주는 경고라고 선언했습니다

구약시대 선지자 중에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가장 많이 한 선지자입니다. 오늘 말씀 이사야 53장은 장차 오실 메시아의 모습과 고난과 죽음에 대한 기록입니다. 내용을 숙지해 보시면 메시아의 성취자로 오신 예수님께서 그 기록대로 다 이루셨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이사야는 동사를 과거형으로 사용했습니다. 예언이면 예수님의 고난에 대하여 미래형으로 기록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예언하는 53장의 동사를 현실에서 이미 생생하게 이루어진 과거형으로 다루었습니다. 왜 동사를 과거형으로 사용합니까? 그만큼 메시아의 고난이 사실임을 알리려는 목적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제목을 예수님은 나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로 정했습니다.

 

 

 1. 예수님은 우리가 받을 멸시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0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오늘 말씀에서 이사야가 계속 강조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우리라는 인칭 대명사입니다. 본문에 12번 나옵니다. 우리는 나도 되고 너도 되는 말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신분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의 신분이 어떠합니까? 06절에 자세히 설명해 놓았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간 존재임을 밝힙니다. 우리에 비교되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그에게입니다. 그분은 바로 주님입니다. 이어서 담당시키셨도다. 라고 나옵니다. 그와 우리, 우리는 죄인이고 그는 오실 메시아로서 메시아가 죄인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습니다.

 

이렇게 대신하는 죽음을 대속(代贖)이라고 합니다. 구약의 제사 제도는 대속의 원리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어떻게 합니까? 율법에 정해진 원칙 따라 사람이 짐승을 제물로 가지고 제사장에게 나옵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모든 죄를 사람 대신 그 제물에 전가합니다. 짐승이 죄를 지은 사람을 대신해서 죽고 대신 사람이 짐승의 제물 때문에 죄 사함을 받습니다

이스라엘이나 우리나라 문화권에서 보지 말아야 할 참담한 어떤 광경을 보았을 때 어떻게 합니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립니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멸시(蔑視)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라는 문장을 이해해 보십시오.


메시아로 오실 예수님께서 장차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릴 존재처럼 무시를 받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존귀와 영광을 합당하게 받으실 그분이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 바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죽을 우리를 위해 대신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릴 때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김삼일 가족 여러분, 사진을 통해서 예수님으로 그려진 초상화를 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림을 보면 서양 사람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백인의 외모에 길게 내린 머리카락, 움푹 들어간 눈에 오뚝한 콧날 매우 다정스러운 눈빛은 예수님이 아주 잘 생기셨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진과 그림이 정확히 예수님의 얼굴을 묘사한 것이 아닙니다. 주로 유럽인 중류층 화가들 문화에서 그려진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세계의 문화를 바탕으로 볼 때 이스라엘 사람은 가나안 사람 특유의 외모 곧 오늘날 중동계 사람들과 비슷한 외모를 지녔습니다. 예수님 역시 머리가 짧고, 턱수염이 있고,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졌다는 게 역사가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예수님 복원 모습                                                            예수님 초상화

    


52:14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 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많은 사람이 질리듯 놀란 것은 사람이라고는 도무지 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기 때문입니다. 상하였다는 말은 좋은 표현이고 실제는 흉한 벌레와 같은 모습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은 저런 흉악한 모습을 지닌 자가 어떻게 메시아일 수 있느냐?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서 저렇게 되었다고 여겼습니다(04).

 


 2.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와 고난을 담당하셨습니다.

 

0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우리의 질고를(חֳלִי 홀리) 지고. 질고(疾苦)는 질병으로서 육체의 질병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질병이 어디서 왔습니까?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그 원죄로부터 왔습니다. 이제는 죽음에 이르는 병 때문에 신령한 즐거움이 줄어들었고 생명 역시 매우 짧아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기만 하면 우리의 질고를 그때부터 해결하십니다. 세상에서도 해결함을 받을 수 있고, 천국에서는 주님과 더불어 질고 없는 영원한 행복을 누립니다. 예수님이 질병에 시달리는 자와 그 가족의 아픔을 동정하신 예를 보겠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11: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우리의 슬픔을(מַכאֹבָה 마크오바) 당하였거늘. 구약성경에서 슬픔이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육체의 고통(03:07)과 정신의 고통(32:10)입니다. 이사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겪고 있는 질고와 슬픔을 대신 책임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실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이 예언으로부터 74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이스라엘에 오셨고 우리를 위하여 온갖 슬픔을 다 당하셨습니다. 그 현장을 보겠습니다.

 

27: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슬픔을 당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나 인류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또한 슬픔에 우는 자들을 이렇게 부르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세계에 공생애로 등장할 때 정의의 예언자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0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모든 제물이 예표한 실상(實像)입니다. 수많은 짐승이 피를 흘리며 죽은 것은 장차 오실 메시아의 질고와 슬픔을 의미합니다. 오늘을 종려주일이라 부릅니다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옷을 벗어 길에 카펫처럼 펴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흔들며 환영한 것을 기념하여 불렀기 때문입니다(11:07~10).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은 김삼일 가족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어떤 마음으로 섬기기를 원합니까? 우리의 질고와 슬픔을 담당해 주신 주님을 더욱 귀히 여기며 살기를 축원합니다.

 

 

 3.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0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까?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입니다. 05절을 보시면 3인칭 대명사 그라는 말이 네 번 나옵니다. 그가 찔림은, 그가 상함은,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동시에 1인칭 대명사 우리가 네 번 나옵니다. 우리의 허물, 우리의 죄악, 우리는 평화를, 우리는 나음을. 이상의 말씀을 통해서 아주 중요한 네 단어를 기억해야 합니다. 십자가 사건의 본질을 설명하는 중요한 네 단어 찔림과 상함과 징계와 채찍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피를 흘려야 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고난을 받으셔야 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입니다. 결과는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05절보다 어떻게 더 정확하게 십자가를 묘사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를 위한 대리 고난입니다. 성경 곳곳에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는 고난이라고 밝힙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 고난을 담당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지기 위해 오셨음을 밝힙니다(고후 05:21).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배척과 멸시와 천대를 받으신 이유가 우리를 대신한 형벌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303장 가사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1. 날 위하여 십자가의 중한 고통 받으사 대신 죽은 주 예수의 사랑하신 은혜여 보배로운 피를 흘려 영영 죽을죄에서 구속함을 받은 우리 어찌 찬양 안 할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신 모습을 사도 베드로는(벧후 03:18) 이렇게 확인했습니다.

 

벧전 0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이제 모든 고난이 다 끝났습니까?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아직도 우리가 받을 고난이 있다고 말합니다.

 

0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바울은 골로새교회를 향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말을 합니다. 왜 남은 고난이라는 말을 합니까? 십자가 효능이 조금 부족해서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온 인류를 구원하는 능력으로 넉넉합니다. 차고 넘칩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말하는 남은 고난이란 전도자의 사명 따라 일하는 가운데서 모질게 겪는 고통의 흔적들을 말합니다. 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고 한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십자가는 마음으로 지는 것이 아닙니다. 말로 지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일상생활에서 우리의 삶으로 직접 져야 하는 의무입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6:24). 김삼일 가족 여러분, 예수님 오시기 740년 전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한 그 십자가 가치를 가슴에 깊게 새깁시다. 그 사랑과 은혜를 찬양합시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어떤 마을에 잘 지어진 아름다운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 벽에는 선명한 글씨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건물 벽에 담쟁이 넝쿨이 자라면서 벽에 쓰인 글을 가렸습니다. 그 글 중에 십자가에 못 박힌 이 부분이 담쟁이 넝쿨에 가려졌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만 보이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담쟁이 넝쿨이 더 자라나서 이번에는 그리스도를 가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말은 우리는 믿는다. 입니다. 그러다 끝내는 이 담쟁이 넝쿨이 벽을 모두 가려 원래 있던 글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누구를 믿으며, 무엇을 전합니까? 우리의 영혼을 죄에서 해방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며 삽시다. 기독교에서 예수님을 빼고, 십자가를 빼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의 의미를 빼면 무엇을 말할 수 있습니까? 세상 소리밖에 더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십자가 이야기를 싫어하고 십자가의 고통을 싫어합니다. 제가 이 말씀을 읽어드리고 마칩니다.

 

05:0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고후 0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 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