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일 가족 여러분은 구약성경 요나서에 나오는 심판의 메시지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제가 요나서를 오래전이지만 강론하였기 때문입니다.
주제는 하나님께서 선지자 요나를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보내어 니느웨가 멸망한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살고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 두려운 메시지입니다. 이에 니느웨의 주민들이 다 회개하여 구원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니느웨의 주민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다시 악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백 년쯤 지난 후에는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괴롭히기까지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앞서 예언한 다른 선지자들보다 나훔 선지자를 통해 니느웨의 완전 멸망을 선포하십니다. 니느웨 주민들을 심판하시겠다는 메시지입니다. 그 내용이 요나 때와는 전혀 다른 무서운 심판의 메시지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니느웨는 이제 피의 도성이 될 것이다. 포악과 노략질이 떠나지 아니할 것이다. 살육당한 시체가 무더기를 이룰 것이다.
사람이 걸어 다니다 시체에 걸려 넘어질 것이다. 도시 전체가 황폐하게 될 것이다. 주민들은 낙담하고 왕궁은 소멸하여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갈 것이다.
나훔 선지자가 심판의 대상으로 삼은 예언은 요약하면 두 가지입니다.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황폐하게 되고(나 03:07) 앗수르 왕도 멸망한다는(나 03:18) 경고입니다. 이런 심판의 예언이 무려 65년 동안 선포되었습니다(B. C. 701~664).
오늘 말씀은 왜 이런 절망의 메시지를 니느웨가 받아야 하는 가의 이유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제목을 「니느웨에 임한 심판의 메시지」로 정했습니다.
1. 심판의 대상인 니느웨는 어떤 곳입니까? |
01 니느웨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경고(מַשָּׂא 맛사). 목소리를 높인다는(사 03:07) 뜻입니다. 경고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나훔의 메시지가 하나님에 의한 메시지임을 선포하기 위함입니다.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왕하 19:36)는 요나서 01:02 절에 의하면 큰 성읍입니다. 성의 규모보다 인구가 많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욘 04:11).
니느웨는 노아의 세 아들 중 함의 손자 니므롯이 세운 큰 도시입니다(창 10:06~09). 이라크 바그다드 북쪽 40km 지점 모술 근교입니다.
이 도시에서 B. C. 4500년 때의 물품들이 많이 발굴된 것으로 보아 오래된 성읍인 것이 확인됩니다. 성읍의 규모를 보면 당시 성벽이 이중으로 된 난공불락입니다. 요나가 그 성 전체를 도는 데 사흘이나 걸렸던 만큼 앗수르의 수도로 불릴만합니다.
니느웨는 군사 요충지이고 교역과 종교의 중심지로서 주변의 시리아, 베니게, 블레셋, 이스라엘, 애굽 등을 정복하여 막대한 부를 챙겼습니다.
정복한 나라들을 폭정으로 다스림으로 원성을 샀습니다. 교만하고(사 10:13), 잔인하고(나 3:1, 10, 19) 이기주의가 만연한(습 02:15) 도시입니다.
이 니느웨를 요나서는 그 악독이 하나님께 도달하였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안하무인 격인 니느웨가 심판을 자초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니느웨의 죄악상을 나훔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 03:01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 도다. 02 휙휙 하는 채찍 소리, 윙윙하는 병거 바퀴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03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니느웨는 네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탐욕이 넘치고, 둘째, 사자처럼 잔인하고, 셋째, 거짓과 술책으로 나라들을 속이고, 넷째, 귀신을 숭배하도록 현혹합니다. 마술로 백성을 미혹하고 귀신을 숭배하도록 한다는 뜻입니다.
이 니느웨를 수도로 하는 앗수르에 의해 B.C. 721년 북 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니느웨의 죄악에 대해서 책임을 반드시 물으십니다.
나훔 01:11 절을 보면 악을 꾀하는 한 사람 즉 앗수르의 산헤립 왕이 너희 중에 나와서 사악한 것을 권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악한(בְּלִיַעַל 벨리야알). 이 히브리 단어는 무가치함, 무익함, 파멸 등의 의미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이 용어를 사탄의 별명으로 비유하였습니다.
고후 06: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앗수르의 왕 산헤립은(11)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탄을 숭배하도록 열국을 미혹하는 일에 미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죄악에 대해서 책임을 물으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앗수르 왕에 대하여 네가 그렇게 대단하고 강한 자냐? 네가 의지하는 모든 방백이나 장수들은 지극히 짧은 생명체 메뚜기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나 03:17). 메뚜기가 무엇입니까? 한 철 생명의 보잘것없는 곤충입니다.
앗수르가 멸망 당한다는 메시지입니다. 이렇게 앗수르 제국은 나훔이 예언을 한 지 50년이 지난 B.C. 612년 중동 지역 신흥강국 바벨론에 의해 아주 멸망하였습니다.
2. 엄한 심판도 회복할 기회가 있습니다. |
03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 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
02절 말씀을 액면대로만 보면 당장 심판하시겠다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03절을 보면 하나님 앞에 돌아올 만큼의 시간을 주신다는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אָרֵך 아레크) 하시며.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말씀이지 징계를 거두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바로 징벌하실 때가 있습니다. 광야 시절 다른 불을 담아 제사를 지낸 나답과 아비후(레 10:01~02)와 아나니아 삽비라(행 05:01~11)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십니다(출 34:06, 민 14:22). 죄인들을 향해 참으시는 까닭은 선택자의 경우 회개를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벧후 03:09).
시 103:08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하나님은 가능하면 분노를 더디 하십니다. 이 일이 바로 은혜중의 은혜입니다. 반면 사람은 분노의 일을 만나면 잘 참지 못합니다. 순간에 폭발합니다. 참아도 얼마 가지 못하여 다시 폭발합니다. 일전에 이런 교통사고가 있었습니다.
상식 이하의 사고 현장이 하나 있습니다. 고속도로에서 두 대의 차가 가다 갑자기 한 차가 끼어들었습니다. 그러자 뒤차가 전조등을 켜며 위협합니다.
그리고 급히 속력을 내어 앞차를 추월하고 운전을 방해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상대방 차도 가만히 있지 않고 다시 추월했습니다.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고속도로 1차선에서 급정거했습니다. 뒤차도 급히 속도를 줄여 충돌을 면했습니다.
문제는 뒤를 따르던 다른 차들에서 5중 연쇄 추돌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이 사고로 한 사람이 죽고 네 사람이 다쳤습니다. 물론 신경전을 벌이던 두 차의 기사도 크게 다쳤습니다. 다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해서 일으킨 사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분노는 폭발하기 전까지 충분히 회개하고 돌아올 기회를 주십니다. 요나는 니느웨에 대한 심판의 유예 기간을 얼마로 정했습니까? 사십일입니다(욘 03:04). 이 기간을 잘 잡은 니느웨의 주민들은 회개하여 성 전체가 구원받았습니다.
기회는 왔을 때 붙들어야 합니다. 기회는 영원히 내 곁에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니느웨가 100년 후에는 완전 다른 모습입니다.
처음 요나를 통해 회개의 기회를 줄 때 자기 옷을 찢고 재를 덮어쓰면서 회개하고 엎드렸던 니느웨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악해졌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전합니다.
히 03:15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김삼일 가족 여러분, 은혜의 기간이 있을 때 바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노에 대하여 참으시지만, 그 참음은 제한된 사랑입니다. 완고한 마음을 무너뜨려야 회개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은 왜 니느웨에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까? |
07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신가? 라는 의문과 하나님은 이방인은 전혀 배려하시지 않으셨는가? 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읽을 때 신령한 영의 흐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하나님으로 보기 쉽습니다.
구약시대의 큰 흐름은 메시아가 오실 수 있도록 준비하는 시기임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창 03:15(原始福音)에서 예언한 여자의 후손 메시아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야 했습니다. 바로 오실 메시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은 온 세상의 하나님으로 일하셨습니다. 메시아의 계보에 들어간 구약시대 여자들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족보는 여자 이름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여리고의 라합과 모압 여자 룻을 등장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애굽을 구원하셨고, 야곱과 그의 일가를 구원하셨습니다. 요나를 통해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구원하셨고, 나훔을 통해 니느웨를 구원하려 하십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에도 온 세상 민족을 상대로 일하셨습니다.
창 12:0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악한 니느웨에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그대로 두었다가 적당한 때 심판하시면 될 터인데도 굳이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까?
니느웨는 하나님의 택한 나라가 아닌 이방 국가입니다. 나훔에 나오는 내용을 종합하면 자비가 아니라 즉각 심판받아야 할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니느웨에 대하여 회개의 경고를 날립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만 갇혀 있는 분이 아니라 인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같은 분입니다. 그러면 왜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달라 보입니까? 시대의 차이 때문입니다.
신약 시대는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 구원하는 시대이며, 하나님은 만국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온 세상을 상대로 복음의 문을 여셨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를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이 여러분에게 전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딤전 02:0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어느 나라든지 어떤 단체든지 죄악이 한계에 도달하면 심판하십니다. 그 심판이 임하기 전에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에 대해 그토록 오래 참으셨지만, 심판의 메시지 그대로(나훔 02:13) 결국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였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나훔을 읽으십시오. 읽으면서 시간을 한번 재어 보십시오. 1장부터 3장까지 읽는데 10분도 채 안 걸립니다.
오늘 점심시간도 좋습니다. 아니면 집에 가서 읽으셔도 좋습니다. 심판의 메시지를 나에게 주시는 메시지로 읽고 아멘으로 받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요즘은 의류 판매장에서 made in Korea 제품이 대다수입니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이런 제품 중에 중국산이 더러 있다고 합니다. 저렴한 중국산 의류를 수입하여 라벨만 한국산으로 바꾸는 원산지 둔갑 라벨 갈이가 급증하기 때문입니다.
실제 최근 동대문 시장과 종로구 창신동 일대에서 made in China 라벨을 제조국명 made in Korea로 라벨 바꿔치기하는 현장이 자주 적발됩니다.
심지어 저희 가게는 원산지 라벨 갈이를 하지 않습니다. 라는 문구를 출입구에 붙여 놓은 업체도 라벨 갈이를 하다 붙잡힌다고 합니다.
의류만 가짜입니까? 믿음도 가짜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 앞에서 회개한다고 말은 하지만 전정한 회개를 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뜻입니다.
오늘 말씀 나훔의 주제는 지금까지의 형식의 믿음, 가짜 믿음을 깨뜨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함을 안내하는 말씀입니다.
나훔은 김삼일 가족이 어떤 일을 하든지 그 일에 대한 책임감이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성경입니다. 모든 일의 잘못은 나입니다. 이렇게 깨달읍시다.
나훔은 우리 믿음의 가족이 고난을 만날 때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성경입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은 위로하시는 위로의 성경입니다.
나훔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의뢰하는 자들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성경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이 날뛰어도 우리에게는 기도가 정답입니다.
벧후 03:09….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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