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를 보면 지독하게 불행한 한 가정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가정의 세대 주 이름이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는 의미의 엘리멜렉입니다. 이 엘리멜렉이 그 이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합니다. 모압의 한 지방(사데 שָׂדֶה) 아로논 강변 들판으로 이사한 일입니다.
이곳에서 엘리멜렉은 꿈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죽고 맙니다. 이제 그 가정을 책임지고 나갈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의 아내 나오미입니다. 나오미는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다행히도 말론과 기룐 두 아들을 결혼시킵니다. 며느리의 이름은 오르바와 룻입니다.
그런데 남편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아들도 그만 죽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 많은 십 년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탈하였기 때문에 만난 시련으로 봐도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나오미가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지금이라도 하나님을 섬기던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돌아오는 길이 어려워도 결단하여야 합니다. 나오미는 마침내 모압의 한 지방에서 지낸 십 년 생활을 정리하고 베들레헴을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큰 며느리 오르바는 나오미의 권유로 친정에 주저앉았습니다. 반면 작은 며느리 룻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시어머니를 따라나섭니다. 이렇게 하여 나오미는 룻을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믿음의 자리로 돌아오는 길은 복을 회복하는 통로입니다. 하나님께서 돌아온 나오미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서 옛날의 영광을 되찾게 해 주십니다. 룻에게는 메시아의 조상이 되는 복을 안겨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계보에 등장하는 흠 있는 여자 4명 중 세 번째 사람 룻에 관한 내용입니다.
룻은 그 민족의 특성상 이스라엘에 도무지 들어올 수 없는 신분인데도(신 23:03) 믿음 줄 하나 단단히 붙잡고 메시아의 조상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제목을 「믿음으로 메시아의 조상이 된 룻」으로 정하고 말씀을 강론하겠습니다.
1. 불행한 여자 룻이 복 받을 장소로 들어왔습니다. |
01:22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베들레헴으로 들어온 룻이 누구입니까? 고달프고 처량한 생활하던 여자입니다. 모압 지방 한 시골 들판에서 태어난 데다 자기 동네 남자와 결혼도 못 한 처지입니다. 다행히 베들레헴에서 넘어온 외국인과 결혼 했습니다. 시아버지도 없는 궁핍한 가정의 기룐이라는 남자입니다. 그런데 룻의 남편 기룐(כִּליוֹן)이 죽었습니다. 거기다 룻의 시숙에 해당하는 말론(מַחלוֹן)도 죽었습니다.
한 가정에 시어머니와 며느리 둘 이렇게 과부 세 사람만 남았으니 기막힌 일입니다. 룻의 인생은 그야말로 불행의 연속입니다. 거기다 룻이 속한 나라 모압은 민족의 특성상 이스라엘에 도무지 들어올 수 없는 처지입니다.
모압이 누구냐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딸들 사이에서 나온 두 민족 모압과 암몬 중의 하나입니다. 모압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괴롭혔던 일로 인해 모세가 이스라엘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신 23:03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모압 민족이 이스라엘의 종교로 개종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을 막는 규정입니다. 이런 나라에 나의 하나님은 왕이라는 이름을 가진 엘리멜렉이 이주해 갔으니 복은 고사하고 패가망신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문제는 룻은 모압 민족 출신인데 어떻게 이스라엘의 공동체에 들어왔습니까? 모압이 이스라엘에 들어오지 못하는 규례는 국가 단위의 관계를 말합니다. 개인으로는 얼마든지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남자는 할례의식을 통해서이고(창 17:11~14), 여자는 신앙고백을 함으로 가능합니다.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를 때 이미 자신의 정체성(正體性)을 내리고 신령한 신분으로 이전해 있었습니다(룻 01:16, 17). 한때는 모압의 신 바알브올과 그모스를 섬기며 살아왔지만 이제 그 모든 우상 문화를 완전히 버렸습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이스라엘에 들어옴으로 명분상 이스라엘 민족이 되었습니다. 엘리멜렉이 모압 지방으로 이주하였고, 나오미가 두 아들을 모압 여자 룻과 결혼시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한 일은 지나고 보니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이런 환경을 통해서도 믿는 자에게는 결국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롬 08:28).
룻이 베들레헴으로 왔다고 그 고달프고 배고픈 가난의 삶이 즉시 해결되었습니까? 아닙니다. 보리 이삭을 주우러 다니는 가난은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가난에서도 특별한 프로그램, 신령한 복을 받는 일을 차근차근히 준비하셨습니다. 룻의 가난을 통하여 일하셨습니다.
룻과 보아스가 아직은 신령한 복을 받는 특별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침내 복을 받을 수 있는 영원히 복된 자의 신분으로 다듬고 계셨습니다.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나오미의 하나님을 선택하였습니다. 이 일이 생애 최고의 선택임을 증명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만드십니다.
2. 복 받을 기회를 차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
06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06절을 통해서 복된 기회를 차 버리는 한 어리석은 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01절부터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보아스가 성문에 올라가 있습니다(01). 고대 성문 어귀에는 넓은 장소가 있어서 친구와 만나거나 소식을 논하는 장소로 활용하였습니다(삼하 15:02).
특별히 성읍의 대표인 장로가 주민을 만나고 율법의 판결을 내리기도 하는 아주 중요한 장소입니다(신 21:19). 이곳에 보아스가 올라간 것은 그 성읍의 장로들에게 율법의 판결을 받기 위함입니다. 율법의 판결은 엘리멜렉이 죽은 후 그 집안의 재산권과 계대결혼을 위한 자격자를 정하기 위함입니다.
이 일을 보아스가 지금 주선하고 있습니다. 마침 엘리멜렉의 기업을 이을 사람이 지나가자 보아스가 말합니다. 우리 집안의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그 아내 나오미가 팔려고 하니 여러 증인 앞에서 우선권을 가진 당신이 사시오.
보아스의 말을 들은 우선권자가 그렇게 하겠다고 받아들입니다(04). 단순히 나오미의 기업만 사면 자기에게 분명히 이익이 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땅을 사고팔아도 희년이 되면 돌려주어야 합니다(레 25:25~28). 만일 상속자가 없는 땅을 사면 그때는 영원히 자기의 것이 됩니다.
그래서 선뜻 사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05절에서 보아스가 모압에서 온 여자 룻과 계대결혼의 책임도 있다고 하자 즉각 기업 무를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말합니다. 왜 금방 마음이 변합니까? 모압에서 온 가난한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나오미의 노후를 책임지는 일이 내키지 않았고 또 자기 이름은 없어지고 대신 엘리멜렉의 이름만 남기 때문입니다.
08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
포기각서입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기업 무를 일을 회피하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인격 무시 행동을 합니다. 그 신을 벗기는 것과 얼굴에 침을 뱉는 일입니다(신 25:09). 이런 일을 당하면서도 포기하는 것은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이제 나는 포기하였으니 보아스 당신이 알아서 하라는 사람의 이름은 무명씨입니다. 이 기업 무르는 이야기를 믿음의 눈으로 보면 복 받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기업 무를 책임을 회피하였으니 복 받을 세 가지 기회를 날린 셈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특별히 들어 쓰는 룻의 남편이 되는 기회를 날려버립니다. 둘째는, 메시아의 가계에 들어갈 기회를 날려버립니다. 셋째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만들어 하나님의 나라에 이바지할 기회를 날려버립니다. 이 사람뿐만 아닙니다. 나오미의 큰 며느리 오르바도 룻과 달리 자신의 고향에 머무는 바람에 엘리멜렉 집안 메시아의 조상에 이름을 올릴 기회를 날려버립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더욱 많은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나간 기회와 같은 일이 다시 올 것이라는 기대를 하며 살아갑니다. 다음에, 이다음에라는 말을 자주 하는 것도 기회가 얼마든지 있을 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회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어쩌다가 찾아온 기회가 그 자리에서 나를 계속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기회는 왔을 때 붙잡아야 합니다. 놓치면 통곡이 옵니다. 복된 기회를 놓치고 난 후 땅을 치며 통곡할 때가 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좋은 기회를 차 버리고 난 후에 그 일을 몹시 후회해 본 적은 없습니까?
히 12:16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17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3. 룻은 메시아의 조상이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
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보아스는 성문의 증인과 장로들에게 약속합니다. 나는 엘리멜렉과 기룐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사겠습니다. 기룐의 아내인 모압 여자 룻도 아내로 맞아들이고, 나오미의 노후도 책임을 질 것이며, 그 유산은 고인의 이름으로 남도록 하겠습니다(09, 10). 보아스의 일에 증인이 된 장로들이 여호와께서 당신이 맞아들이는 여자가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처럼 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한 자가 되기를 원한다고 축복합니다.
이 축복의 내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메시아의 가문이 되기를 원한다는 축복입니다. 성읍의 장로들이 이 축복을 할 때는 멀리 내다 보지 못한 덕담에 불과하지만 축복의 말 그대로 메시아의 가문으로 이어지는 놀라운 복이 되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유명한 자가 되기를 원한다는 이 축복으로 인해 보아스의 덕망은 베들레헴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에까지 널리 알려졌을 것입니다. 보아스는 자신이 감당해야 할 책임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기회를 잘 붙잡았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도 보아스의 인생을 붙잡아 주셨습니다.
보아스가 이런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명예보다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청지기의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보아스가 기업을 무른다는 말의 의미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이어지는 신령한 메시아의 계보를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보아스는 하나님이 원하시면 어떤 일이든지 희생할 수 있는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내 모든 소유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자세를 가졌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17절을 보시면 보아스와 룻 사이에 아들이 태어납니다. 주위에서 그 이름을 오벳이라고 지어 줍니다. 여기서 오벳은 누구의 아들이 되어야 합니까? 율법의 규정상 룻의 원래 남편 기룐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이웃 여자들이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엘리멜렉과 기룐의 대를 잇는 아들이 태어났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족보엔 누구의 아들로 올라갑니까? 18절부터 시작되는 메시아 계보를 보면 21절에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이렇게 해서 엘리멜렉과 기룐이 아니라 보아스의 아들로 올라갑니다.
오늘 말씀 룻기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18~22절까지 메시아의 계보 앞에 보아스가 모압 여자 룻으로부터 오벳을 낳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벳을 낳기까지의 긴 경위를 설명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며 믿음생활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전하려 함입니다. 룻의 핏줄을 타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 이 사건이 일어난 후로 무려 약 1,300년 후에 같은 장소 베들레헴에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허물이 크고 별 내세울 것이 없을지라도 주님 안에만 있으면 그런 사람에게도 은혜를 베푸시고 그런 사람을 통해서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죄 많은 사람도 들어 쓰신다는 뜻은 죄인을 골라서 쓰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용서받은 사람을 쓰십니다. 룻과 보아스는 삶의 현장 베들레헴에서 장로들이 예언한 대로 복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촌락이 룻과 보아스로 인해 세계의 유명한 성지가 되었습니다(미 05:02).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18~22절의 메시아 계보를 보십시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유다로 시작하지 않고 베레스로부터 시작합니다. 1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젊은 여자 룻이 네게 상속자를 주시고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은 베레스의 집과 같기를 원한다고 나옵니다.
룻기는 약 일천 년 전의 조상 베레스를 조상의 출발점으로 등장시킵니까? 룻기는 하필 베레스를 가장 중요한 믿음의 출발점으로 놓느냐 말입니다. 베레스가 대단한 인물이기 때문에 이렇게 출발점으로 삼는 게 아닙니다.
창세기에서 베레스를 낳은 다말과 룻기에 나오는 룻은 유다 가문의 메시아 계보가 끊어질 위기에서 계보를 이어갔기 때문에 등장시킵니다. 이들은 메시아의 약속을 믿은 사람이고 구원의 때를 이어가려는 열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런 하나님의 열심을 가진 사람이 베레스를 낳은 다말이요 룻입니다.
마침내 룻이 메시아의 조상 자리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허물이 있는 사람이라도 믿음의 자리에 서기만 하면 사용하십니다. 신 23:03 절을 보면 모압의 후손들은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규례도 메시아를 믿기만 하면 무너집니다.
당시 베들레헴은 유다 족속 중에서 가장 작은 마을이었지만 룻을 통하여서 세계 최고의 유명한 지역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그 공동체는 세워져 갑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의 헌신과 희생을 통해서 믿음의 공동체가 일어나고 여러분 한 사람으로 인해 복된 가문을 열어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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