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축구의 황제로 불리는 펠레(브라질 1940.10.21.~)에게 하루에 몇 시간씩 연습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말하기를, 축구장에 있는 시간은 공을 차는 시간이고, 공을 안 차면 축구에 관해 이야기하고, 축구에 관해 이야기를 안 할 때는 축구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꿈도 축구에 대해서만 꿉니다.
하루 24시간을 축구만 생각하며 지내다 보니 축구 황제로 불리게 되었으며, 지금도 세계 축구사에 영향을 끼칩니다. 성도 여러분, 혹 예수님의 제자라고 생각합니까? 그러면 하루 24시간 중 얼마나 예수님을 생각합니까? 예수님의 제자 기준이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는 사람을 말하지 않습니다.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봉사를 열심히 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물론 제자는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열심히 헌금하고, 열심히 봉사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기뻐하는 제자는 그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 뜻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교회 생활에서 제자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인정도 중요 하지만 예수님이 인정하는 제자이냐? 입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주님께서 인정하실만한 제자인지, 아니면 아직도 제자의 길에 들어서지 못했는지를 점검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제자는 이런 찬양을 부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찬송가 94장인데 믿음으로 부르고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1.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은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2.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이 전에 즐기던 세상일도 주 사랑하는 맘 뺏지 못해.
3.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유혹과 핍박이 몰려와도 주 섬기는 내 맘 변치 않아.
(후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아직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제자가 되지 못했습니까? 그러면 오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주님이 원하시는 제자로 거듭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의 제자입니까?」라는 제목으로 오늘 말씀을 강론하겠습니다.
1. 예수님의 제자 의미가 무엇입니까? |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제자(μαθητής). 예수님 당시의 제자는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학생과 스승의 관계가 아닙니다. 스승의 정신, 스승의 철학, 스승의 삶을 이어가는 자입니다. 분신(分身)이란 의미로 이해되는 단어입니다. 스승은 아무나 제자로 삼지 않습니다.
제자는 일단 스승 밑에 들어가면 그 스승을 닮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자는 스승을 닮은 작은 스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제자입니다. 무려 335회 나오는데 이는 믿음 생활을 한다는 의미가 바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한류 스타의 영향으로 오래전 일본에서 우리나라 배우 배용준 씨를 욘사마라고 불렀습니다. 욘사마라는 말 들어보셨지요? 욘사마는 용준의 일본식 준말인 욘과 우리말의 임을 뜻하는 일본말의 극존칭 사마의 합성어입니다.
이 분 외에 최지우 씨도 열렬한 지지를 받는데 이런 한류스타는 대게 열성 펜클럽이 있습니다. 그런데 펜클럽에 가입하는 일이 매우 어렵습니다. 적어도 그 배우들이 출연한 드라마를 50번 이상 보아야 하고 시험도 거쳐야 하는 일 때문입니다.
어떤 시험이냐면 드라마를 돌리다가 갑자기 멈춘 후 다음 사람의 대본을 연기하게 한다거나, 피아노 위에 얹혀 있는 소품이 무엇인지 알아맞히는 일입니다. 이런 깊은 자격을 갖추었다고 판단되면 그때 저들이 좋아하는 배우의 펜클럽에 가입시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제자라는 말을 쉽게 합니다. 제자훈련, 제자공부, 제자코스 등,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제자로 인정해 주시느냐입니다. 요한복음 06장을 보시면 오병이어 기적 후에 예수님께서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원히 산다고 말씀하셨습니다(55~58). 그러자 제자 중 여러 사람이 듣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정말 어렵네. 누가 이런 말을 소화 할 수 있겠느냐 하면서 떠나갔습니다.
요6:66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구분하면 열두 제자, 칠십 제자, 그 외 관심을 가지고 따르는 자입니다. 이들을 때로는 통칭해서 제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제자는 열두 제자를 말하고, 예수님을 추종하다 떠난 자들은 그냥 무리입니다(막 08:34). 이제 무리가 떠난 후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물으십니다.
요 06: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제자란 기분 따라 왔다가 기분 따라 떠나는 자가 아니라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키는 자입니다. 깊은 훈련과 검증을 거쳐야 진실한 제자가 됩니다. 많은 사람이 교회에서 기독교인으로 불리기는 하지만 어쩌면 무리 속에 있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세상의 이익 꺼리를 만나면 주님을 떠납니다. 교회도 그냥 막 옮겨 버립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열두 제자를 훈련 시키신 주제가 흔들리지 않는 제자도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사명자가 세상을 구하고, 교회도 살립니다.
2. 예수님의 제자는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삽니다. |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기독교인으로서 제자의 길을 가려면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십자가(σταυρὸν)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는 우리가 질 수 없는 십자가로서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지신 십자가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지라고 하신 십자가입니다. 로마의 지배 아래 살던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은 십자가의 형을 선고받으면 그 죄수는 자기가 달릴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까지 가야 하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27:32).
그러므로 제자들 각자에게 자기 십자가가 있으며 그것을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말씀은 매우 무거운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기 전의 자세를 먼저 알려주십니다. 성경 한 구절을 보겠습니다.
눅 0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막 08:34).
자기를 부인하고(ἀρνησάσθω). 거절하다. 포기하다. 내려놓는다. 삶의 중심에서 나를 내려놓는다는 의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그러면 왜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세상에서의 성공이고 출세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이 부귀영화를 얻는 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은 좀 고생이 될지라도 조금만 참으면 그 고생을 보상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었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일상생활 자체가 자기중심으로 되어 있어서 그 삶 그대로 살면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가장 큰 방해 거리가 됩니다. 자기 부인이란 자기를 학대하거나 몸을 마구 대하는 고행주의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자기중심으로 살던 모습을 주님 중심으로 옮기기 위해 청산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현장에서 자기의 길, 십자가의 길이 확고하였기에 자기를 온전히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막 14:36….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삶의 방식 그대로 따를 것을 명하십니다. 자기 삶의 형태를 부정하고 오직 예수님 방식으로 따르기를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는 삶은 자기중심으로 짜여 있는 삶을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현실에서 우리의 이기주의 모습이 있습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내로남불입니다. 그 외에도 몇 가지가 있습니다. 내가 침묵하면 생각이 깊은 것이고, 남이 침묵하면 아무 생각도 없는 것이다.
]내가 늦으면 피치 못할 사정 때문이고, 남이 늦으면 정신자세가 덜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화를 내면 소신이 뚜렷한 것이고, 남이 화를 내면 인간 됨의 그릇이 모자란 것이다. 내가 남의 말을 들으면 마음이 넓어서 그렇고, 남이 남의 말을 들으면 줏대가 없는 사람이다.
인간관계의 대부분 갈등은 자기주의가 강해서 일어납니다. 결국, 자기만 생각하는 삶은 이웃을 무너뜨리기 쉽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에도 걸림돌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음을 가지고 따르는 자들에게 자기를 비울 것을 주문하십니다.
3. 예수님의 제자는 사랑을 실천합니다. |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대단히 무겁고 부담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된 확실한 증거를 이웃 간에 사랑이 있느냐의 유무로 분별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 말은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나는 상대방을, 이웃을 조건 없이 사랑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신 일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 내 모습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볼 수 있다면 그때야 예수님의 제자로 불릴 수 있습니다.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 나를 향하여 저분은 진정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라고 인정해 줄 때 진실한 제자가 됩니다.
구약시대도 이웃 사랑은 최고의 정성으로 행할 것을 안내합니다(레 19:18). 구약시대 계명의 중심이 사랑이며(롬 13:08-10), 신약시대의 새 계명의 중심도 사랑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많이 쓰인 말이 사랑이며, 예수님께서 새 계명이라고 하신 이 사랑은 일방이 아니라 서로가 지키는데 그 가치가 있습니다.
요일 0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 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죄인을 조건 없이 사랑하신 예수님처럼, 배반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 사랑을 서로 나누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랑을 나누지 못하여 불편한 관계에 있습니까?
그래서 죽도록 미운 사람이 있습니까? 한가지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다. 죽이면 됩니다. 미워하고 사느니 차라리 죽이십시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고백한 바울처럼 자기를 죽이십시오(고전 15:31). 행동이 없는 사랑은 외식자입니다.
오래전 미국 샌디에이고의 한 가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낮에 요란하게 전화벨이 울립니다. 한국전쟁에 참여했던 아들의 귀향을 알리는 전화입니다. 어머니는 너무도 기뻐서 목소리를 높입니다.
얘야, 당장 집으로 돌아올 일이지 전화는 왜 거느냐? 우리 모두 너를 기다리고 있단다. 속히 들어오너라. 예, 알았습니다, 어머니. 그런데 집으로 가기 전에 청원이 하나 있습니다. 저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친구 하나를 데려가고 싶습니다.
아, 그래? 그럼 데려와. 그런데, 어머니 이 친구에게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전쟁에서 큰 상처를 입어 눈 하나와 팔과 다리가 하나씩 없습니다. 오갈 데가 없는 친구라 제가 데리고 살까 합니다. 아무튼, 데리고 오너라. 한 달쯤 같이 살자꾸나. 아니에요, 좀 더 오래 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럼, 일 년쯤 같이 살다 천천히 돌려보내지 뭐. 아닙니다. 일생같이 있고 싶은데요. 그러자 어머니가 대답합니다.
얘야, 네가 전쟁터에 나가 있더니 꽤 감정이 넘치는 사람이 되었구나. 냉정히 생각해야지. 그런 장애인과 평생을 같이 지내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란다. 처음에야 불쌍하고 측은한 마음에 성심껏 대해 줄 수 있겠지만 얼마 지나다 보면 거추장스러워질 때가 온단다. 무거운 짐이 되는 거지. 그러니 일생을 함께 지낼 생각일랑 말아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덜커덕하고 전화가 끊겼습니다. 몇 시간 뒤, 해군본부에서 한 장의 전보가 날아들었습니다.
귀댁의 아들이 유감스럽게도 샌디에이고 호텔 12층에서 투신하였음을 통보합니다. 어머니가 가보니 다쳤다는 친구는 바로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은 우리 집에서 나를 어떻게 맞아줄까? 이런 내가 집에 돌아가도 되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가 어머니의 대답을 듣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의 길은 즐거울 때도 있고, 행복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슬픔과 고통과 눈물의 길일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 제자의 길,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가야 합니다.
헌신하면서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가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에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였는데 자기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자기의 삶을 믿음으로 감당하기 위해 져야 할 사명입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 지신 예수님처럼 나도 주님의 제자로서의 길을 가야 합니다. 제자의 길에는 영원한 상급, 무한한 복이 있습니다. 제자의 길을 가는 성도는 불의한 것, 믿음에 금이 가는 것에 눈길을 돌릴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2018 러시아월드컵 조별리그 A조 우루과이와 1차전에서(6월 15일) 선방하여 팀 패배에도 최우수 선수(Man Of The Match)에 이집트 대표팀 골키퍼 무함마드 시나위(Mohamed Elshenawy)가 선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선수가 상을 거부하였습니다. 술을 멀리해야 하는 이슬람교도로서 상을 주는 주체가 주류회사 버드와이저(Budweiser)이기 때문에 경기를 마친 후 트로피를 들고 대기 중이던 상을 거절하였습니다. 믿는 종교는 다를지라도 믿음의 심지가 있었기에 이렇게 하였습니다. 우리 김삼일 가족들은 어떤 믿음의 심지가 있습니까? 믿음의 길에 걸림돌 되는 일이 있으면 다 거두어 버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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