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8년 말씀

나는 위로를 주는 자입니다(골 04:10~11)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8. 8. 11.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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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방송의 세계 테마기행에서 춤추는 서아프리카 4부 편을 보았습니다. 이 가운데 가나의 성채(城寨)를 보면서 가슴이 울컥하였습니다. 가나의 성채는 아프리카 가나의 대서양 베냉만 연안 케타에서 베인 사이 약 500Km에 걸쳐 흩어져 있는 여러 개의 성과 요새들을 가리킵니다.

이곳에 유럽의 포르투칼, 네덜란드 등 다수 국가가 1482년부터 1786년 사이에 연안무역을 위한 요새화와 무역통로를 위하여 성채(城寨)를 지었습니다. 가나의 성채 주변은 천혜의 자연과 더불어 아름다운 바다와 하늘을 자랑하는 곳으로 유명하며 아프리카에서 보기 드문 자연경관입니다.

이 가운데 가장 악명높은 성채는 1653년 네덜란드에서 건축한 케이프코스트(Cape Coast) 서쪽 10Km 지점 엘미나 성채입니다(Elmina Castle). 이 성채에서 인류역사상 가장 잔인한 아프리카 흑인들의 노예무역이 일어났습니다. 그야말로 악명높은 노예무역의 센터입니다.


성채 내부를 보면 노예 대기소에는 화장실이 없습니다. 이런 곳에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원주민을 잡아다 1백 명, 2백 명씩 가두어 놓고 노예 상선이 올 때까지 대기시킵니다. 그러는 동안 건강에 열악한 사람은 그대로 죽어 나갑니다.

그야말로 짐승 이하의 취급을 받으면서 팔려 가든지 아니면 병으로 죽든지 했는데 그 수가 무려 1,200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마지막 대기소 문을 열고 나가면 바닷가 노예무역선이 기다리며 노예들은 카누에 태워져 노예무역선에 실립니다

그 나가는 문 위쪽에 돌아올 수 없는 문(DOOR OF NO RETURN)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곳에 2009년 당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방문함으로 가나 국민이 많은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지난 역사일지라도 이들의 가슴 아픈 역사는 영원한 위로의 대상입니다.

 

우리의 주변이나 넓게는 세계 곳곳에서 고난과 억압으로 불행한 죽임을 당하거나 가슴 아픈 흔적들을 안고 있는 곳이 많습니다. 복음의 초창기인 1세기 때의 전도자들도 고난과 박해의 결과로 목숨까지도 내어놓은 일이 허다하였습니다. 그들이야말로 도 누구보다도 위로가 필요하였던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도 사도 바울이 복음 전하다 겪는 고난 속에서 위로가 되는 사람을 만났다고 소개합니다. 이 말씀을 따라 나는 위로를 주는 자입니다라는 제목으로 강론하겠습니다.

 

 

 1. 사람은 누구나 위로받기를 원합니다.

 

고후 01:0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사람은 누구든지 그의 속 사정을 들어보면 누군가로부터 위로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담대하게 보일지라도 실제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저의 목회 소망이라면 외롭고 힘든 사람에게 위로자가 되는 일입니다

이 일을 위해 그렇게 살려고 노력은 했지만 제대로 열매는 맺지 못했습니다. 동시에 저도 누군가로부터 위로가 필요합니다. 저의 삶이 끝난 후에, 아니면 지금 저를 알고 있는 누군가로부터 나는 이일기 목사로 인해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말로 인해 저는 목회의 보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저의 이런 마음이 여러분에게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을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위로자로 다가가십시오. 주위의 사람이 여러분의 위로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바울에게는 많은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에 등장하는 동역자가 약 100명쯤은 되고 로마서 16장에는 26명의 이름이 나옵니다. 로마서는 그 26명이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해 간단하게 그 행적을 밝힙니다

그만큼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꾼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해박한 믿음의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이웃을 향해 위로자로 다가가지 못하면 그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통계상으로 사람이 철이 들고 난 때로부터 나이가 들어 더는 친구를 사귈 수 없을 때까지 가까운 친구가 5~6명 정도 되면 보통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나는 이 사람과 친하다. 어떤 것도 함께 할 수 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5~6명은 됩니까?

100명쯤은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많으면 좋기는 하겠지만 자기만 그렇게 생각할 뿐 상대방이 좋은 친구라고 여기지 않으면 그때는 별 소용이 없습니다.

 

40:0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내가 만나고 교제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겉으로는 든든하고 화려하게 보이는 것 같습니까? 그럴지라도 사람인 이상 위로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안타깝게도 요즘은 정직한 사람, 위로자로 쓰임 받으려는 사람 찾기가 어렵습니다

위로를 받으려고만 하지 줄려고 하는 사람이 드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김삼일 가족의 공동체에 들어오게 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외로운 사람, 흔들리는 사람을 위로하고 그 상한 마음을 싸매주는 데 있습니다.

내가 김삼일 공동체의 일꾼입니까?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사람으로 인정되고 어떻게 불리는가가 중요합니다. 얼마나 신실한 마음으로 성도를 위로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일꾼과는 반대가 되는 구경꾼으로 불린다면 자신에게 명예롭지 못합니다

혹 내가 그런 사람입니까? 그러면 고쳐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한결같은 일꾼은 정직합니다. 눈가림으로 하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합니다. 변덕도 부리지 않습니다. 이런 일꾼이라야 위로의 역할을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2. 사도 바울에게 세 사람의 위로자가 있습니다.

 

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11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바울 하면 대단한 인물 아닙니까?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한 일꾼이며, 때로는 그의 손길을 통하여서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일도 있었습니다(20:07~12). 신약성경이 기록되던 시절 가장 위대한 인물로 일컬음 받은 인물입니다. 이런 대단한 인물이 아리스다고, 마가, 유스도 세 사람으로 인해 위로를 받았다고 전합니다.

 

위로가(παρηγορία) 되었느니라. 믿음의 일꾼 바울이 한 말입니다. 그러면 이들 세 명이 어떤 상황에서 바울에게 위로가 되었는지 10, 11절로 살펴보겠습니다.

 

아리스다고(Ἀρίσταρχος). 바울의 선교여행에 자주 동행한 사람으로서 바울이 나와 함께 갇힌 자라고 소개합니다. 아리스다고는 데살로니가 출신으로서(20:4) 바울과 함께 에베소의 연극장에서 폭도들에게 극심한 고난을 겪었습니다(19:29).

이때 아리스다고는 바울을 보호하기 위해 대신 잡혀서 고난을 겪었고, 계속 바울의 선교 일정을 따라 예루살렘에도 갔으며 후에도 바울이 여러 힘든 일을 만날 때는 언제나 바울 곁에서 지키고 있었습니다(19:29; 20:04). 이후 바울이 로마로 호송되는 과정에서 바울과 동행하는 자로 등장하는(27:02) 것을 보아 바울의 여러 선교 일정에 동참한 것 같습니다

바울과 함께 갇힌 자란 바울과 함께 매인 자가 되어 수고했다는 뜻일 수 있고, 아니면 바울의 투옥 때 자원하여 함께 거하면서 수종 들었다는 뜻도 됩니다. 아리스다고는 바울 곁에 그저 함께 있어 줌으로 바울의 위로자가 되었습니다. 교회 부흥의 원동력은 이런 아리스다고처럼 같이 있어 주는 일꾼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바나바의 생질 마가(Μάρκος). 마가가 누구입니까? 본래의 이름은 요한인데(12:12) 사회생활의 편리를 위해 마가라는 로마 식 이름을 사용하였습니다. 바나바의 생질(甥姪. 04:10)로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교회로부터 선교사로 파송 받아 나갈 때 수행원으로 따라 나셨습니다. 그가 이런 직책에 발탁된 데에는 나름대로 신앙의 장점이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침묵하지만 적어도 기도의 깊이, 전도의 열정, 충성하는 모습, 신앙의 굳은 결의와 각오 등이 있지 않았겠는가? 라는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마가는 편모슬하에서 성장한 것 같으며, 예수님의 70인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10). 

특별히 베드로의 믿음의 아들로(벧전 05:13) 불렸으며, 무엇보다 마가복음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귀한 일꾼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역사가 유세비우스의(Eusebius. 260-340) 기록에 의하면, 그는 이집트에서 알렉산드리아교회를 세운 뒤 감독으로 일하다 순교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유스도(Ἰοῦστος)라 하는 예수. 세 번째 인물은 유스도입니다. 본명은 예수로서 이 사람의 행적이 오늘 말씀 외에 더는 나타나지 않습니다본명이 예수임에도 유스도라고 하는 것은 당시 로마인들이 쓰던 라틴어로 음역할 때 가장 가까운 이름이 유스도였기 때문에 이렇게 소개됩니다.

이때까지 예수라는 이름은 매우 흔한 이름이었습니다(여호수아, 예수아). 그러나 2세기 이후에는 이런 이름이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라는 이름을 기피 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세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자기에게 위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바울처럼 위대한 인물도 세상에 사는 동안은 사람의 위로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변 모든 사람이 다 위로받기를 원하는 줄로 생각하고 다가가시기를 바랍니다.

 

 

 3. 김삼일 가족은 위로자의 삶을 사십시오.

 

11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들은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복음을 집요하게 배척하는 유대인들 속에서 아리스다고, 마가, 유스도와 같은 동역자들이 바울 곁에 있음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들이 할례파이기 때문입니다. 할례파란 할례받은 일에 대한 상당한 자부심으로 유대교를 믿는 자들입니다

대다수가 안티기독교입니다. 이들 가운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있어도 유대주의 성향으로 이방에 복음 전하는 일을 등한히 하였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옥고(獄苦)를 겪을 때도 별로 동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리스다고, 마가, 유스도 이 세 사람은 바울과 함께 복음 전하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바울에게 기쁨을 주었고 바울도 이들로 인해 위로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사막에서 진주를 줍는 것 같은 기쁨입니다.


10절 말씀에서 괄호로 묶은 내용을 보십시오.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무슨 뜻입니까? 한때는 바울의 마음을 크게 불편하게 했던 자입니다. 13:13 절을 보면 바울의 1차 선교여행 때 버가에서 도중 하차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선교사의 일정을 힘들게 하였습니다.

 

13: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이 일로 마가는 바울의 신뢰를 완전히 잃었습니다. 마기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 두 선교사가 크게 다투는 원인제공도 하였습니다. 이런 마가를 바울이 지금 골로새교회에 추천합니다.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아도 신뢰를 회복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리스다고, 마가, 유스도 이들은 본토 출신 유대인입니다. 반면 이들 세 사람과는 달리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 출신 디아스포라 유대인입니다.

서로 간에 완전 소통을 하려면 난관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함께 머리를 맛 대고 의논을 하였으니 이 일이 바울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할례파로부터 오해와 편견과 방해만 받아 왔던 바울에게는 아주 특별한 위로입니다. 본토인 유대인과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완벽히 하나 되는 일이 여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위로자가 되는 일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슴에 품을 때 가능합니다. 그저 안일한 생각으로는 위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복음의 일꾼에게 위로자로 다가가야 합니다. 만나는 어떤 사람에게도 위로자로 다가가야 합니다

처음에는 열심히 일하는 것 같은데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위로자는 고사하고 바람과 같이 사라지는 자리에 서지 맙시다. 이런 모습은 일꾼에게 위로자가 아니라 마음을 무너뜨리는 걸림돌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무엇일 것 같습니까? 서로 간에 얼굴과 얼굴을 잘 유지하는 일입니다. 의사소통이 안 되면 자칫 불신관계에 빠져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가 힘듭니다. 어쩌면 헤어지는 아픔을 겪을지 모릅니다. 야곱이 그러했습니다.

 

31:02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פָּנִים panim face)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성경은 대인관계에서 이것은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용서하라. 용납하라. 사랑하라. 격려하라. 칭찬하라. 축복하라. 감사하라. 귀히 여기라. 반대로 이것은 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비판하지 말라. 욕하지 말라. 정죄하지 말라. 판단하지 말라. 함부로 말하지 말라. 대인관계에 대한 결론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종합하면 서로 간에 한마음이 되어 사람들에게 위로자로 다가가라 이런 의미입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안 좋은 일 있으면 다 털어버리십시오. 바울은 1차 선교여행 때 마가의 도중하차 행동을 털고 나니 오히려 유익하다고 평가하였습니다(딤후 04:11). 서로 좋지 않은 기억이나 마음에 담고 있는 앙금이 있으면 이 역시 털어버려야 합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다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좋지 않은 기억들, 가령 기분 나빴거나 섭섭했던 일도 위로자로 세움을 받으려면 편안하게 풀어야 합니다. 상대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풀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만나면 그 순간부터 긴장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꼬투리 잡히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피곤합니다. 위로자 앞에서는 무장이 해제됩니다. 사람들이 여러분 곁에서 쉴 수 있도록 하십시오. 긴장을 풀 수 있도록 하십시오. 위로자로 세워진 사람 곁에 가면 쉼을 얻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우리의 관계가 필연의 관계입니까? 선택의 관계입니까? 천국까지 함께 가는 필연의 관계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사십시오. 사람이 내게서 떠나는 삶이 아니라 모여드는 삶 말입니다

이런 인생을 꼭 사십시오. 우리 이런 고백을 해 봅시다. 김삼일 가족으로 인해 나는 위로를 받습니다. 제가 실수하면 다 용납해 주십시오. 저의 모자란 부분을 넓게 보십시오.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 제 앞에서 긴장하지 않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저의 불찰을 용서하십시오. 사랑합니다. 많이 사랑합니다. 끝까지 사랑합니다.

 

15:05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06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