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벌이나 개미가 모인 공동체를 보면 철저한 역할 분담이 있습니다. 여왕벌을 중심으로 한 집단을 형성하여 주위를 맴돌고 있는 호위 벌들, 열심히 꿀을 따오는 일벌들, 벌이 드나드는 문 앞에서 외부의 침입자를 막아주는 보초 벌들입니다.
개미들 사이에도 겉으로 보면 그 개미가 그 개미 같아 보이지만 엄연한 역할 분담이 있습니다. 먼저 여왕개미는 계속해서 알을 낳고 번식합니다. 이 여왕개미를 중심으로 일개미는 열심히 일해서 먹을 것을 물고 들어옵니다. 반면 그 옆에는 빈둥빈둥 노는 개미가 있습니다. 병정개미인데 이놈은 절대로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이 쳐들어오면 병정개미가 떼를 지어 나아가서 물고 늘어지는 싸움을 합니다.
꿀벌이나 개미는 자기의 영역에서 다투지 않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또한, 겨울 양식을 위해 여름에 열심히 식량을 저축합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꿀벌과 개미는 부지런히 일합니다. 이렇게 부지런히 일하는 곤충들에 대하여 솔로몬은 그 부지런함을 배우라고 권합니다.
잠 06:06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어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목적 없이 놀고먹는 일을 하면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생활의 규범으로 안식일 즉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엿새 동안은 힘써 일하라 하셨습니다. 일 안 하고 놀고먹으면 주일을 안 지키는 죄와 같다는 뜻입니다. 반면 일을 하자고 하면 이리저리 계속 빠져나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일은 안 하면서 시끄러운 사람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피해야 할 대상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인간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만나서 안 될 사람은 피하고, 꼭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서 공동체를 잘 받들고 섬겨야 합니다. 공동체를 섬기는 일은 하나님의 뜻이요 사명입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말씀의 제목을 「우리는 일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로 정했습니다.
1. 당분간 갈라서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
06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절박한 명령을 내립니다. 잘못된 종말론에 빠진 자들로부터 떠나라는 명령입니다. 여기서 떠남은 출교와 같은 공개 추방이 아니라 개인의 신앙 관계에 선을 그으라는 뜻입니다. 모든 교제의 단절은 분명 아닙니다. 다만 거짓 교사들로부터 시한부 종말론 교리를 듣고 믿음의 현장을 이탈한 부분을 바로 잡기 위한 명령입니다.
잘못된 종말론에 빠진 자들은 주님께서 이제 곧 오실 것인데 지금 육신의 일을 하고 있을 때인가 하며 일상생활을 거부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성경은 사귀지 말아야 할 사람, 떠나야 할 사람에 대해서 안내를 합니다.
미련한 사람 즉 믿음의 지혜가 없는 사람을 떠나라고 명합니다. 솔로몬은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는다고 안내합니다(잠 13:20). 미련한 일 행하는 자는 만나지 말라는 뜻입니다(잠 17:12). 지혜로운 사람을 가까이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사람과 사귀면 미련이 오게 마련입니다.
악한 사람을 떠나야 합니다. 솔로몬은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 하지도 말라고 안내합니다(잠 24:01). 악인이 잘되는 것처럼 보여도 부러워하지 말고, 함께 있지도 말라는 말씀은 같이 있으면 어느 틈에 그 사람 행동에 물들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사람, 방탕한 사람을 떠나야 합니다. 솔로몬은 술을 즐겨 하는 자들과 고기를 탐하는 자들과는 어울리지 말고 사귀지도 말라고 안내합니다(잠 23:20). 그러면 모든 불신자와 사귀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나쁜 짓만 골라서 하는 사람들은 사귀지 말라는 뜻입니다. 불신 세계에 속한 사람은 우리의 전도대상입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05:10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숭배 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말 많은 사람, 남의 비밀을 누설하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솔로몬은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 남의 비밀을 누설하는 자를 사귀지 말라고 안내합니다(잠 20:19). 쓸데없이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하고 다니는 사람, 이간질하여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을 가까이하면 도무지 유익이 없습니다.
좀 더 넓게 해석을 하자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고 자기들이 해석하는 대로 행하는 사람, 진리의 말씀을 왜곡시켜 주님의 일을 그르치는 자들을 멀리하라는 뜻입니다. 교회에서는 바르게 지도하는 일을 그대로 지키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자기의 생각대로 사는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이 문제를 생산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오직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성도의 길입니다. 지금 데살로니가교회 일부 성도들이 시한부 종말론에 사로잡혀 말씀의 길을 이탈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영혼을 위해서 한 발자국 물러서서 관찰하여야 합니다.
2. 교회에서는 누구든지 일하여야 합니다. |
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데살로니가전서의 주제는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교회에 편지를 보냄으로 성도들이 음의 가닥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재림 신앙에도 눈을 떴는데 한편 문제도 생겨났습니다. 시한부 종말론에 편승하여 일상생활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자들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주님께서 곧 오실 것인데 일할 필요가 있느냐며 일상생활 자체를 팽개쳤습니다. 이런 잘못된 시한부 종말론을 바로잡기 위한 지도서가 데살로니가후서입니다. 첫 번째 편지를 잘못 이해한 부분을 고치기 위한 목적입니다. 먼저 바울의 교회관을 보겠습니다.
고전 04:0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0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하나님의 교회에 심긴 성도의 목적은 첫째도 충성이요, 둘째도 충성이요, 셋째도 충성입니다. 교회에서 사명자로 세움을 입었습니까? 성실과 최선을 다해 충성해야 합니다. 맡은 일들이 성도의 환경과 형편에 따라 각기 다릅니다.
문제는 일이 중요하냐? 덜 중요하냐가 아닙니다. 작은 일처럼 보일지라도 맡았으면 충성입니다. 예수님은 작은 일에 충성한 자에게 큰일을 맡기신다고 하셨습니다.
마 25:21,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 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10절을 보십시오.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일해야지 게으르거나 진리에서 이탈한 경우에는 구제의 대상에 넣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구제의 대상을 고아, 과부(노인), 장애인 등 사회의 약자를 구제의 대상으로 정했습니다. 일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일하지 않고 얻어먹기만 좋아하는 사람은 구제의 대상에서 제외하라는 말씀입니다. 교회의 일은 자신을 위해서도 해야 하고, 이웃을 위해서도 해야 합니다,
10절을 다시 보십시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예수님이 곧 오실 것인데 일해서 무엇하고 공부해서 무엇하냐며 삶을 포기한 자에 대한 경고입니다. 이 집 가서 얻어먹고, 저 집 가서 얻어먹으며 무위도식하는 사람, 사지가 멀쩡하여 건강함에도 일을 하지 않으면 여간한 민폐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곧 오실 것이니 모든 세상일은 내려놓고 오직 믿음 준비하고 기도에 전념해야 한다는 시한부 종말론자들 말이 처음에는 상당히 설득력 있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을 멈추고 보니 당면한 경제 문제가 등장하였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신앙생활 잘한다고 자부했겠지만 이내 걸인 수준으로 전락하여 먹을 것을 찾아 떠돌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밥을 얻어먹고 지내는데 이게 얼마나 잘못된 일이며 덕이 안 되는 일입니까? 이런 사람들에게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을 하겠습니까? 그저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런 삶은 은혜의 삶이 아니라 마귀가 조종하는 삶입니다.
3. 결국은 함께 구원의 길로 가야 합니다. |
14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 이어 데살로니가후서를 보내면서 그래도 계속 사도의 가르침을 순종하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은 공개 지목하여 사귀지 말라고 권합니다.
왜곡된 믿음, 그 민망함을 깨닫지 못한다면 이제는 그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라고 명합니다.
인격의 모욕을 주어도 좋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이들을 출교를 내리지 않고 이렇게 부끄럽게 하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미워서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라도 깨닫게 하여 진리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려는 바울의 배려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하나님께 올리려는 영혼의 중매자 심정을 15절에서 밝힙니다.
15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같이 권면하라.
결국은 구원의 길로 함께 가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13)는 말씀에 아멘 하면 됩니다. 선한 일이 무엇입니까? 복음을 위한 일, 교회를 위한 일입니다.
교회의 일에는 때로는 시험이 발목을 잡기도 하고, 때로는 권태기를 만나기도 합니다. 믿음생활이 순풍에 돛 단 것처럼 잘 진행되기도 하나 때로는 흔들리는 때도 있습니다. 평생 넘어지지 않고, 시험 들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13절 말씀을 거울로 삼도록 기록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뿐만 아니라 갈라디아교회에도 이 말씀으로 권면하였는데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갈 06:0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우리는 어떤 선한 일을 합니까? 그 일이 복음 전하는 일입니까? 나누어주는 일입니까? 사랑을 베푸는 일입니까? 어떤 일이든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교회생활은 공동체 생활입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자세를 가지지 않으면 이기주의로 흐를 수 있습니다.
자기를 나타내려는 공명심 대단히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일할 때 자기를 알아주면 하던 일도 그만두거나, 한 일이 별로 드러나지 않으면 그 일을 중단해 버리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기록한 성경에서 낙심하지 말 것을 10번이나 당부하였습니다.
그만큼 믿음으로 나아가는 일이 힘들고 곳곳에 암초가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도 주님의 일을 하다 낙심할 수 있는 환경은 만나나 낙심은 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고후 04:0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01, 16).
웬만한 믿음으로는 낙심할 수 있는 환경을 극복하기 힘듭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할 때 자기중심이 되지 않도록 신경을 쓰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공동체에서 자기를 알아주지 않거나 하는 일이 잘 드러나지 않을 때 포기 할 가능성이 생깁니다.
주님의 몸 된 공동체의 일이 작은 일로 보입니까? 눈에 안 보이는 일입니까? 혹 시시해 보이는 일입니까? 그래서 포기를 합니까? 큰일로 봅시다. 현재 우리의 주변에서 아웃사이드 된 분 있습니까? 그분의 손을 붙듭시다. 함께 구원의 길로 손잡고 갈 형제이기 때문에 꼭 붙들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화란의 철학자 스피노자(Benedictus de Spinoza, 1632.11.25-1677.2.21)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올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질서가 있는 믿음생활, 계획이 있는 믿음생활에 적용 할 수 있는 명언입니다.
담배 피우는 사람들 보면 새 갑을 열 때마다 언제 이것을 다 피우나 하며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담뱃값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만일 국가에서 의무로 담배를 피우라 하면 담뱃값도 아깝고 20개씩 든 담배를 언제 다 피우겠습니까? 매우 지겨울 것입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피운다면 질식해서 죽을 것입니다. 그런데 생활화되니 아까운 줄도 모르고 지겹지도 않습니다. 생활화되면 쉬운 법입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면 오늘 먹고 죽자 할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또 개인의 삶에 위기가 닥쳐 헤어나올 힘이 없다면 자포자기할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생활화되어 있으면 온갖 고난을 만나도 믿음으로 감당합니다. 반면 믿음이 생활화되지 못하면 교회 생활이 오히려 고역이 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김해삼일교회에 세운 일꾼으로 믿습니까? 그러면 교회에 대한 충성을 생활화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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