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8년 말씀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 된 성도입니다.(갈 03:23~29)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8. 1. 20. 20:13
728x90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예수님께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는데 율법에는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는 법조문이 있습니다.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 대신 허리를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시자 그들이 묻기를 중단하였습니다. 이에 일어나셔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허리를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군중들 모두가 이 글을 보고 양심에 찔림을 받아 정죄하려던 돌을 다 내려놓고 현장을 떠났습니다. 마지막에는 예수님과 여자만 남았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그렇게 기세등등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침묵하며 다 떠난 것은 그들도 죄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증거입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자만 죄인입니까? 율법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율법의 기준으로 보면 죄의 경중(輕重)의 차이이지 죄인 아닌 사람 없습니다(03:10). 그래서 요즘은 교회는 부흥 안 돼도 교도소는 계속 부흥된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에 앞서 15~22절 말씀을 통해 아브라함으로부터 모세를 거쳐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구원의 역사를 설명하였습니다.

이어 오늘 말씀은 율법의 권세 아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어떻게 입게 되는 지를 세밀하게 밝혀줍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 된 성도입니다.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1. 율법과 그 기능이 무엇입니까?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율법(νόμος). 이 단어가 로마서에 72, 갈라디아서에 32번 나옵니다. 유대교의 법으로서 일반으로 구약시대의 법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교회생활을 통해서 많이 듣는 말 가운데 하나가 율법(律法)이라는 단어입니다. 무슨 의미인지 아시지요? 믿음생활을 제대로 하려고 정한 하나의 규칙입니다. 크게 보면 성경에 나오는 법은 시행령(施行令)과 금령(禁令)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시행령이란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지침이고, 금령이란 무엇을 하지 말라는 지침입니다. 시행령은 적극법이고 금령은 소극법으로서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이 아니라 해야 할 것은 반드시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반드시 안 해야 합니다.

 

법이란 없을수록 좋습니다. 지키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이란 그 조항이 너무 많고 세분화되어서 결국 법을 다 못 지키게 되었습니다. 법이 있는데도 지키지 못하면 사람들은 거짓말과 위선으로 자기를 감싸기 시작하여 마지막에는 외식주의에 빠집니다. 율법은 악인에게는 죄를 억제하는 기능을 합니다. 죄를 지었을 때 치러야 할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죄를 실행하지 못하게 하는 기능 말입니다.

율법의 이런 기능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율법이 마음에 품은 욕망까지 다 제거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율법의 진정한 가치와 역할은 무엇입니까? 율법의 가치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구원자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역할입니다.

 

24절 말씀을 잘 보십시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라고 안내합니다. 율법은 초등교사다. 무슨 의미입니까? 초등교사(παιδαγωγς)가 개역성경에서는 몽학(蒙學)선생으로 나옵니다.

원문에는 어린아이(6~16)를 돌보며 시중드는 가정교사라는 뜻입니다. 당시 헬라 사회에서 가정교사는 거의 종이었으며, 주된 임무는 주인의 아들을 학교에 등하교시키고, 의식주생활과 예도(禮道)를 지도하는 일을 했습니다.

바울은 할례를 전하는 율법주의 다른 복음을 저급한 수준이라는 뜻에서 초등학문에 비유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율법을 이해하려면 유효기간입니다. 언제까지 이 율법의 영향력이 존재하며 영향을 미치느냐? 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이전까지 입니다.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바울은 23절을 통해서 율법의 유효기간은 예수님(믿음)이 오시기 전까지로서 이제 예수님이 성육신하심으로 율법의 임무는 끝났다고 말합니다.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하고, 죄를 정죄하는 율법의 역할의 기한이 끝났기 때문에 율법은 더 이상 믿음의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치지 못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자손이 온 후로 율법의 기능은 끝났는데 아직도 바른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에 얽매여 있느냐고 묻습니다.

 

10: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2.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 아들이 되었습니다. 여기 아들(υοὶ)이란 성으로 구분 된 아들이 아니라 남녀 모두를 통칭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호칭은 예수님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지만(04:03; 08:29) 구원받은 성도를 가리키는 말에도 사용됩니다(05:09; 08:14).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 말을 쉽게 합니다. 그런데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는 선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까? 구원론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뜻입니다(08:15).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사람의 의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른 영의 거듭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03:03~08). 김삼일 가족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로서 천국백성이 되었음을 믿습니까? 여러분의 고백대로 하나님의 아들의 위치에서 믿음생활 잘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품격을 잘 지킬 수 있습니까?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최고의 사자 상()을 조각한 조각가에게 기자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잘 만들었습니까? 그러자 조각가가 나는 사자답지 않은 부분을 쪼아냈을 뿐입니다. , 그렇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아들답지 않은 부분을 모두 쪼아내면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답지 못한 삶, 변화되지 못한 삶, 옛날 마귀의 종노릇 하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입만 열면 원망하고 불평하고, 볼썽사나운 말을 내뱉으며 부딪치는 스타일을 지워버려야 합니다. 성질대로 사는 인생은 불행합니다.

반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생활은 행복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영접함으로서 모든 죄를 용서받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 상속자로서 변화 된 삶을 잘 유지하여야 합니다.

 

저에게 딸이 둘 있습니다. 큰딸은 여기에 있고, 작은 딸은 유학기간 동안 네덜란드에서 생활합니다. 그런데 두 딸의 모습을 보면 서로 닮았습니다. 또 자세히 보면 아내의 얼굴도 많이 닮았습니다. 어떤 분은 저를 꼭 빼 닮았다고도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바로 유전자(DNA) 때문입니다. 이 유전자가 없으면 저의 딸이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때 교회에 다니고, 봉사활동을 하고, 기도를 한다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하면 곤란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의 시작일 뿐 그 고백으로 신앙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음을 무엇으로 확인합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유전자 곧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의 유전자가 우리 안에 있어야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0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까? 그러면 이제부터 성령님을 좇는 삶, 육체의 행실을 죽이는 삶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믿음은 선언이 아니라 삶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0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네 가지의 은혜가 임합니다(08). 첫째,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14).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15). 셋째, 성령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언하십니다(16). 넷째, 하나님의 아들이 당하는 고난은 유익함을 깨닫게 주십니다.

 

 

  3.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하나입니다.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통하는 형제자매가 되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신령한 가족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새로운 관계는 과거에 사람과 사람을 떼어 놓고 차별시키던 모든 장벽을 무너뜨리는 선언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 종이나 자유인, 남자나 여자 모두가 주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될 수 있으며, 또 되어야 함을 선언합니다. 당시의 사회에서 종과 자유인의 차이란 오늘날의 사장과 종업원의 차이 정도보다 더 심한 차이, 비교조차 될 수 없는 큰 간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지극히 당연해 보이던 신분 차이를 능히 극복하였습니다.

 

28절은 인종차별을 철폐하는 선언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이야 어디 인종의 차이, 신분의 차이가 극복될 것을 상상이라도 했겠습니까? 초대교회 시절만 해도 사회에서 여자는 차별을 당하는 정도가 아니라 매우 무시를 받았습니다.

당연히 불가능하게 보였던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의 장벽, 종과 자유인 사이의 장벽을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한순간에 무너뜨렸습니다. 그런데 이미 무너진 인종차별이 대한민국에서는 부활하였습니다. 무서운 지역감정으로 살아났습니다. 정치인들이 이것을 볼모로 자기의 이익을 챙겨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예나 지금이나 출생 배경과, 부의 정도와, 교육 수준과, 사회의 능력에 따른 차이는 어쩔 수 없이 생깁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은 우리 성도들 사이에는 세상에서는 실현 할 수 없는 진정한 평등과 사랑의 교제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지극히 고질적인 3대 장벽들, 인종과 신분과 성의 차별을 한꺼번에 극복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물론 불신 사회에서는 이런 차별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된 김삼일 가족에게는 이런 일을 만나지 않을 것입니다.

 

고전 01: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너희를 권하노니(παρακαλῶ). 좀 더 강조하는 말로 간청하다, 탄원하다는 의미가 됩니다. 바울의 고린도교회를 향한 간절한 심정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의 온전히 통일 된 몸을 이루라는 의미로 공동체에서 모두가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가지면 파열음이나 분열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런 일은 서로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 할 때 가능하며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한 방향으로 생각을 모을 때 가능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질문을 해 보십시오. 나는 누구인가? 의 질문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고 있느냐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의 신분이나 지식수준, 소유물의 많고 적음으로 인해 차별을 받지 않습니다.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이 장군의 옷을 입으면 장군으로 보고, 일병의 계급장이 붙은 군복을 입으면 일병으로 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있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한 방향을 향하여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가지고 전진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잘 보여주도록 생활합시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대한민국 교회사를 보면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음에도 세상의 가치를 기준으로 하나가 되지 못한 슬픈 역사의 흔적들이 있습니다. 1893년에 설립 된 서울의 곤당골교회(승동교회) 이야기입니다.

대부분 양반으로 구성되어 있던 곤당골교회에서 소란이 일어납니다. 양반 측에서 어떻게 백정과 함께 예배를 드리느냐, 백번 양보해서 백정과 함께 예배를 드리더라도 최소한 양반들은 백정과 구별해서 예배당 앞자리에 따로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Samuel F. Moore(1846~1906) 선교사는 복음 안에서 차별이 없다며 양반들의 요구를 거절하자 양반 교인들 대부분이 곤당골교회를 나가 홍문서골교회를 세웠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곤당골교회는 부흥한 반면 양반들로 구성 된 홍문서골교회는 교인도 없고 계속 퇴보하는 가운데 1898년 곤당골교회에 불이나면서 다시 두 교회가 합쳤습니다. 이후 1911년 장로를 선출하였는데 백정 출신 박성춘 집사가 장로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러자 상놈이 장로로 선출되었다고 양반들이 반발해서 다시 이탈해 세운 교회가 지금 안국동교회입니다.

 

이미 우리는 예수님에게 속한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차별이 없는 세계에 살고 있으며, 매주일 우리는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었다는 찬양을 합니다. 차별이 없는 생활이란 바로 상대방을 더욱 높여 주는 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대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습니다. 이 복을 받는 일에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너와 네 모든 후손이 다 복을 받을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12:01~03). 이 말씀의 능력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이 있습니다. 그 첫째 부분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복을 받고 우리로 말미암아 주위 사람들이 복을 누리도록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 일입니다. 복의 근원이 되는 복을 보여주는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