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오늘의 설교를 여는 첫 말씀입니다. 남 유다의 10대 왕 웃시야는 16세에 왕의 자리에 올라 52년 간 나라를 통치하였습니다(B. C 792~740). 특별히 선지자 스가랴의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정치를 하자 하나님께서 유다 왕국에 큰 번영을 주심으로 국가의 경쟁력이 높아졌습니다.
고대사회에서 국가의 경쟁력이란 군사력과 경제력을 의미합니다. 웃시야는 군사력을 잘 정비하여 블레셋 땅을 점령하였고, 주변 국가 암몬으로부터는 조공까지 받았습니다. 또한 경제면에서는 여러 성들을 건축하고, 저수지와 웅덩이를 만들어 고원과 평지에는 가축을 길렀고, 산과 들을 개간하여 농토를 확장하였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백성들은 풍요를 누리면서 남 유다 역사상 가장 번성을 누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주변국에 최고의 국격을 높인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 웃시야가 인생 말년에 교만의 악에 빠졌습니다.
제사장만이 하나님께 드릴 수 제사를 자신이 드리려다 하나님의 징계로 나병이 발발하였습니다(대하 26:18). 결국 웃시야는 별궁으로 쫓겨나서 남은 인생을 격리되어 살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왕이 죽었으니 국가적인 위기 아닙니까? 주변국들이 볼 때는 호재입니다.
이때 젊은 일꾼 이사야가 국가의 앞날을 놓고 성전에 기도하러 갔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국가를 위한 하나님의 사명자로 부름을 받습니다. 우리에게도 위기의 상황이 닥칩니까? 일단 성전으로 오십시오.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십시오.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혹 하나님의 사명자로 부르시는 것은 아닙니까? 만일 그렇다면 일꾼으로 쓰임 받아야지요.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1. 사명자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
0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스랍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을 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이렇게 세 번을 반복하며 찬양을 하는 스랍은 어떤 존재입니까? 사 06:02,06절에만 나오는 이 명칭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을 모시는 천사 중의 한 부류입니다.
여섯 날개를 가진 스랍들이 서로 하나님을 향하여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라고 세 번을 반복하는 것은 히브리어에서 최상급의 표현입니다. 최고로, 지극히 거룩하다. 라는 의미로서, 하나님은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최고로 거룩하신 분임을 나타내는 표현 방법입니다.
계 04:08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오늘 말씀의 출발점이 웃시야 왕이 죽던 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사야는 웃시야의 죽음으로 국가가 위기에 놓이자 성전에 기도하러 들어갔습니다. 이때 천사가 성전에서 기도하는 이사야의 영의 눈을 열어서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를 보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도 체험하게 하였습니다. 스랍들이 하나님의 거룩을 최상급으로 이사야에게 보여주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이고, 사명자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체험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사명자는 하나님의 거룩함에서부터 출발하여야 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믿음의 눈으로 체험을 한 후에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믿음의 길은 거룩함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체험할 때 인간의 죄성을 떨쳐 버리고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보아야 영의 눈이 열립니다.
보이는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거룩한 세계가 열립니다. 우리 믿음의 가족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신령하고 거룩한 세계를 보며, 죄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으로 인하여 거룩함이 회복되기를 축원합니다.
유럽의 숲속에 사는 흰 담비는 털이 아름답기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흰 담비의 하얀 모피 털은 귀족들이 탐내는 물품이었습니다. 사냥꾼들은 흰 담비를 잡기 위하여 특별한 방법을 사용합니다. 흰 담비는 자신의 털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강한 속성이 있는데 이 원리를 이용하여 잡는 것입니다. 사냥꾼들은 먼저 흰 담비의 굴을 찾아내어 그 굴 입구에다가 숯검정과 같은 더러운 것들을 막 칠해 놓습니다.
그리고는 사냥개를 풀어 흰 담비를 몰기 시작하면 사냥개에게 몰린 흰 담비는 필사적으로 도망을 하여 자기 굴 앞에 이릅니다. 그런데 자기 굴 입구가 더렵혀져 있기 때문에 굴 안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흰 담비는 자기의 흰 털을 더럽히느니 돌아서서 자신을 뒤쫓아 온 큰 개들을 상대로 싸우는 자세를 취합니다. 이게 어디 싸움이 됩니까? 이내 사냥꾼들이 도착하여 흰 담비를 잡아 버립니다.
흰 담비라는 짐승도 자신의 깨끗함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세상적인 삶을 위하여 거룩함을 포기해서 되겠습니까? 우리의 거룩함을 포기하고 세상의 욕심을 얻으려 하지 맙시다. 무엇보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회복합시다. 이것만이 세상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2. 사명자는 자신의 무능함을 보아야 합니다. |
0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사야는 왕족으로서, 20대에 웃시야 왕의 국정에 참여한 엘리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누구보다도 애국심이 강하였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든든하였습니다. 특히 왕족으로서,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 지도자라 할 수 있습니다.
웃시야가 죽고 나라가 혼란할 때, 혼자 성전에 와서 깊이 있는 기도를 드리는 것만 봐도 귀한 일꾼임에 손색이 없습니다. 아직 예언자로 공적인 부름을 받지는 않았지만 자부심도 있고, 자신감도 있는, 열정의 청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니 세상적인 조건들이나 나름의 열심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는 부정한 죄인, 망할 죄인의 모습만 확인되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이사야는 지금까지, 나름대로 자신에 대한 평가가 꽤 괜찮았던 사람입니다. 좀 잘 나가던 인물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는 자기 부정을 해 버립니다.
성전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깨달은 자기 모습은 깨끗한 자기, 스스로 인정해 온 잘난 이사야가 아니라 못난 이사야이었습니다. 예, 누구든지 하나님과 대면을 하면 자기의 진면목을 보게 되고, 마침내 자기부정이 일어나는 법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알 때 자기를 깊이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이 고백을 통해서 이사야는 고상한 자신과 천박한 백성들을 차별화 하였던 모습을 공개합니다. 즉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전 까지는 적어도 이렇게 기도를 하였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 이 형편없는 백성들을 보십시오. 입술도 더럽습니다. 징계를 받아야 할 자들 아닙니까?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눅 18장의 성전에서 세리를 멀리 두고 기도하였던 바리새인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눅 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세상에서의 성공은 자기 긍정을 하여야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이제 세상의 방법과는 정 반대로 자기부정을 선언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면 입에서 이런 고백이 흘러 나와야 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 제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보니 죄인 중의 괴수이옵니다. 이런 모습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으며, 이 입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한다는 말입니까? 저보다 더 거룩하고 깨끗한 사람을 불러 쓰시옵소서. 라고 자기 고백을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 된 모습을 깨닫고 고백의 자리에 이를 때 사죄의 은총을 입습니다. 그때 우리의 모습 속에 하나님의 거룩함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잘 서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보이는 진리의 말씀 앞에 서려 하지 않습니다.
결국은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맙니다. 자기의 무능함을 보는데서 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인지, 감추어진 죄악과 드러나지 않는 죄악이 얼마나 많은지를 깨닫는데서 은혜가 임합니다. 은혜의 통로는 내가 먼저 죽어야 할 죄인임을 고백함으로 열림을 기억하십시오.
3. 하나님의 사명자는 나 자신입니다. |
0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성경 요소요소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 03:09)?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 04:09)?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왕상 19:09)? 사무엘아, 사무엘아(삼상 03:10)?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렘 05:01).
이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에 시원하게 화답을 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소년 사무엘입니다. 어떻게 화답을 하는지 한 번 볼까요?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03:10). 아주 유명한 구절로서 성구 액자의 단골 구절입니다.
08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명자로 쓰임 받을 사람을 찾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대신해서 갈꼬? 이 음성을 듣고 이사야가 하나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라고 화답을 합니다. 나는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사오니 보내만 주십시오. 라는 각오입니다.
김해삼일 가족 여러분, 죽어가는 영혼들, 죄로 인한 멸망의 길, 지옥으로 달려가는 저 사람들을 건지기 위하여 누가 갈 것인가? 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라고 화답한 이사야처럼,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라고 화답한 사무엘처럼 사명자로 나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생길에는 동반자가 필요합니다. 함께 고뇌를 나눌 동무가 있어야 살맛이 납니다. 희로애락을 함께 할 사람이 있을 때 인생길은 외롭지 않습니다. 인생길에 홀로 버려진 듯 고독으로 슬퍼할 때, 내 옆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할 그때 제가 있습니다. 하고 다가온다면, 누군가 내 옆에 남아서 나를 지지해주고 함께 힘을 실어준다면 다시 일어 설 수 있는 힘을 회복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김해삼일 가족들은 서로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서로 옆에 있어주고, 믿어주고, 지지해주고, 편이 되어 주고, 응원해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나에겐 아무도 없어, 세상에 나 혼자야, 라고 할 때, 왜 그래? 내가 있잖아, 난 널 믿어. 네가 실수해도, 네가 잘못을 해도, 나는 너를 믿어. 난 네 편이야 라고 말 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살이에도 위로자가 필요하듯 하나님의 일에도 파트너가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파트너는 물질 면에서 부유한 자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피부색이 달라도 괜찮습니다. 의로운 자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긍휼을 구하는 사람, 하나님의 주권아래 무릎 꿇는 사람, 그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 흘리는 사람, 절망 가운데도 예수님의 이름에 희망을 갖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모두 같습니다. 다 거기가 거기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간 복음의 사명자로서 살겠다는 각오를 가진 사람이 누구인가를 보십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가운데 담임목사의 설교가 한 순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명자로 부르시는 신령한 음성으로 심령에 들리면 좋겠습니다.
이사야의 고백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 나를 보내 주십시오. 내가 가겠습니다. 왕과 백성들이 내 말을 잘 듣지 않을 것도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나를 죽이려 들 것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가겠습니다. 나를 보내 주십시오. 라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행 13:22). 라는 말씀처럼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마음에 잘 맞는 사람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어느 날 개와 닭이 말다툼을 했습니다. 개가 닭에게 하는 말이 너는 아침에 일찍이 꼬끼오 하고 울어서 주인이 새벽에 일어날 수 있도록 깨우는 사명을 가졌는데 요즘은 왜 벙어리처럼 울지를 않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닭이 하는 말이 요즘은 세상이 달라져서 언제 자는지 언제 깨는지 알 수가 없고, 또 알람을 자기가 필요한 때 켜 놓고 자기 때문에 내가 울 필요가 없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닭이 말하기를, 개 너는 도둑이 올 때 짖는 것이 사명인데 요즘 도둑이 이렇게 난무하는데도 왜 짖지를 않느냐? 하고 물었더니 주인이 도둑인데 언제 짖겠냐? 라고 하였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자세는 주님의 생각이 나의 생각이 되고, 주님의 마음이 나의 마음이 되고, 주님의 뜻이 나의 뜻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계획이 나의 계획이 되고, 주님의 명령이 나의 사명이 되고, 주님의 교회가 나의 교회가 되고, 주님의 자녀들이 나의 형제자매가 됩니다. 주님과 나의 순서가 바뀌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인생의 진정한 목적을 알고 사는 사람은 행복하고, 나를 통해 이 땅에서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알 때 행복을 누립니다.
고전 0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하는 모든 일을 통해서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때 우리 일생이 복된 일생이 됩니다. 김해삼일 가족 여러분, 하나님의 사명자로 부름을 받고, 잘 쓰임을 받는 귀한 삶 복된 삶이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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