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6년 말씀

나는 소통입니까? 고집불통입니까?(고후 13:10~12)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6. 12. 17.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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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을에 사는 청년과 할아버지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고 갑니다. 할아버지 나무해 오십니까? 그러자 할아버지가 꿩알이다. 할아버지, 나무해 오시느냐고요? 열 두 개다. 청년이 다시 큰 소리로 말합니다. 아니, 할아버지, 나무해 오시느냐고 여쭈었습니다.

이놈아, 그런다고 내가 안 먹고 너 줄 것 같으냐? 결국 귀가 어두운 할아버지와 마을 청년은 더 이상의 대화를 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말이나 행동을 통하여 상대에게 전달하는 것을 communication 즉 소통(疏通)이라고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이 소통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에는 나이, , 출신지역, 학력, 직업, 경력, 취미, 가족상황 등 제각기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공동체의 우선순위가 무엇일 것 같습니까? 서로 통하는 일입니다. 말이 통하고, 생각이 통하고, 느끼는 감정들이 통하면 사랑나눔이 잘 이루어집니다.

요즘 가장 많이 듣고, 많이 쓰는 말 중에 하나가 무엇입니까? 소통입니다. 반대의 개념으로는 불통이라고 합니다. 소통은 서로의 뜻이 통하여 의견에 충돌이 없고, 오해가 없는 상태로서 이런 소통을 위해서는 십자가의 사랑과 양보의 미덕이 있어야 합니다. 소통이 잘 되어 공동체를 아름답게 꾸미는 일이 우리의 관심사인 이상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뜻에서 나는 소통입니까? 고집불통입니까?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강론하겠습니다.

 

 

  1. 성도 간에 소통하는 일이 우선입니다.

 

 

10 그러므로 내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넘어뜨리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사도 바울은 3차 선교 여행 중 마게도냐의 한 지역에서 자신이 세운 고린도교회에 첫째 편지에 이어 둘째(55~57년경) 편지를 보냈습니다. 왜 보내었습니까? 자신이 떠난 후에 발생한 내부 문제를 좀 부드럽게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장점도 많고 단점도 많은 교회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떠나자마자, 거짓 사도들이 들어옴으로 극심한 진리와 정치적인 분쟁에 휘말렸습니다.

어떤 분쟁이냐 하면 고린도교회의 설립자 바울을 거짓 사도로 몰아 비난하고, 바울의 가르침을 무력화시키려는 일을 시도하였습니다. 이 정도 되면 교회가 혼돈밖에 더 있겠습니까? 이런 소식을 들은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혼란에 빠트린 거짓 사도들의 정체와, 그들이 가르친 거짓 복음을 낱낱이 공개하면서 경고를 합니다.

 

고후 13:02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바울은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에게 법의 절차를 따라 두세 사람의 증인을 세워, 합법적이고 공정한 재판을 엄격하게 시행하겠다고 경고합니다.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선언인데 그러면 바울이 정말 그들을 시원하게 징계하는 것이 목적이겠습니까?

바울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징계보다 거짓 사도들과 그들에게 놀아 난 무리들이 미리 회개하고 믿음의 자리로 돌아오는데 있습니다. 돌아오는 증거, 회개하는 증거로서 05절을 제시합니다. 05절대로 실천만 하면 과거의 일은 불문에 붙이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의 선행 조건은 신뢰와 소통에서 나옵니다.

 

고전 13:0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내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10절 말씀을 잘 보시면 바울은 먼저 대면하여 얼굴 붉히는 것을 원하지 않음을 밝힙니다. 02절에서는 고린도교회를 방문하면 거짓 사도들과 그 일당들을 즉각 징계하겠다고 단호하게 하더니만 엄포만 놓고 슬쩍 한 발 물러서는 겁니까? 아닙니다. 서로 간 떨어져 있기 때문에 만나기 전 잠시 쿨 타임을 가지면서 영적 소통을 잘 하여 웃는 얼굴로 만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성도들 간에, 또 이웃에게 혹 옥신각신 책망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거기에는 반드시 사랑과 소통의 윤활유를 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이 없는 책망, 소통이 없는 책망은 오히려 반발을 낳고, 악순환이 되어 파탄을 가져 오기 알맞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거짓 사도들의 말을 듣고, 분별력 없이 바울을 의심하고 그 가르침을 떠난 일에 대하여 화가 난 것은 이미 확인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런 일들을 놓고 최종적으로 그들에게 단 하나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자기의 감정을 내려놓고 보니 소통의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권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누구든지 소통만 잘 이루어지면 영적인 죽음에서 건져 낼 수가 있습니다.

 

 

  2. 불통을 해결 못하면 교회의 걸림돌 됩니다.

 

11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형제들아 기뻐하라.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를 향하여 먼저 형제들아 이렇게 부릅니다. 여기 형제들은 고린도교회의 일반적인 성도들과, 고린도교회에 깊이 자리를 잡은 거짓 사도들의 무리와, 그들에게 미혹이 된 자들도 포함한 형제들입니다. 바울은 형제들에게 특별히 기뻐하라고 권합니다.

이 기쁨은 세상과 더불어 누리는 쾌락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면서 누리는 신령한 기쁨입니다. 기쁨의 요소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만일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면 하나님과의 사이에 불통이 오고, 성도들과의 사이에도 불통이 옵니다.

 

불통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교회의 걸림돌 되는 현상입니다. 세상 어느 교회도 시험과 분쟁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불통 때문입니다. 불통의 특징이 교회의 걸림돌 되게 하는 이상 바울은 불통을 소통으로 전환하기 위하여 위로를 받으라고 권합니다.

여기 위로라는 말은 서로 서로 소통을 하도록 격려하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실제 고린도교회는 다툼과 분냄, 당짓는 것, 중상 등과 같은 불통의 요소들 때문에(고후 12:20) 서로 간에 더욱 소통의 위로와 격려가 필요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일상생활에서 뚫려 있어야 할 소통이 막혀 발생하는 답답한 상태를 좋아 할 사람 없습니다. 또 인터넷을 하면서 가끔 연결이 되지 않아 컴퓨터 화면에서 불완전한 동그라미만 빙글빙글 도는 상태를 경험해 보지 않습니까?

정말 답답하고 열 받죠. 또 휴대폰으로 급한 통화를 위해 걸어도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습니다. 다음에 다시 걸어주십시오. 라는 메시지만 되풀이 되면 더욱 열 받습니다.

 

우리 몸도 소통이 잘 되어야 병이 붙지 않습니다. 뇌에 혈관이 막혀 피가 소통되지 않으면 뇌경색이라고 하고, 뇌에 혈관이 터지면 일반적으로 중풍이라고 합니다. 심장에 피가 소통되지 않는 병을 심근경색이라 합니다. 대개 병원에 가다가 죽습니다.

경색(梗塞) 이거 아주 무서운 병입니다. 그런데 몸에만 피가 통하지 않아서 병이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소통이 잘 되어야 건강한 인간관계가 부드러워 집니다. 영적인 관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소통이 되지 않으면 영적 경색증에 걸리고, 교회에서 소통이 불통으로 바뀌면 그 병은 나와 너 둘 중에 하나는 걸림돌 되는 현상을 만나고 맙니다.

 

2009년 아이폰 3GS(iPhone 3GS)라는 스마트폰이 등장하였습니다. 단순히 통화 기능만을 가진 휴대폰의 기존 관념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혁명적인 사건인데 이후부터 이제는 스마트폰 없이는 살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편리한 기계도 외국에 장기간 나가면 함부로 데이터를 열어놓지 않습니다. 요금제가 워낙 비싸기 때문입니다. WIFI가 잡히는 곳에 가면 겨우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으나 WIFI 잡히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위에 안테나 그림이 희미하게 나오고 밑에는 네트워크에 접속 할 수 없습니다. 네트워크 연결 상태를 확인해 주세요. 라는 메시지가 나옵니다. 일시적인 불통이기 때문에 좀 답답하기는 하지만 이내 해결할 길이 있습니다. 문제는 교회에서 영적으로 막혀서 그것을 풀 수 없을 때입니다. 그러니 막혀서 불통의 통로, 걸림돌의 통로가 되지 않도록 소통을 위해 마음의 준비를 잘합시다

 

 

  3. 소통을 위해 눈높이를 상대에게 맞추어야 합니다.

 

11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12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입맞춤은 고대 근동에서 행해지던 인사의 한 형식이었으나 초대 교회에서는 여기에다 성스러운 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16:16; 벧전 05:14). 거룩한 입맞춤은 모든 성도가 하나님 안에서 교제하고 한 가족으로 연합한다는 뜻이며, 주님의 만찬을 앞두고 상호간의 용서와 화해의 증표이었습니다. 거룩한 입맞춤은 신뢰의 행위로서 하나의 떡과 잔에 참여함으로써 하나 됨을 새롭게 깨닫고 온갖 불화들을 떨쳐내는 완전한 소통의 증표입니다.

 

12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원만한 소통을 위해 본서 말미에 주변의 여러 사람들을 안부로 동참시킵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의 가족이라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안에 있는 성도들은 모두가 한 가족이기 때문에 당연히 원만한 소통을 하여야 하며, 소통을 위한 눈높이를 상대에게 맞추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사람끼리 갖는 신뢰는 한계를 만나는 때가 있습니다.

인간관계에 기초한 소통은 불완전한 사람들끼리의 모임이다 보니 종종 시비와 충돌도 일어납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예수님이 주인이 되어야만 수습이 되고 은혜를 회복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라고 권합니다.

 

0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성도 여러분은 소통하는 일에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성도 간에 소통하는 일을 우선으로 삼고, 교회의 걸림돌인 불통을 해소하고, 소통을 위해 나의 눈높이를 상대에게 맞추어야 함을 말입니다. 서로를 존중하는 소통을 주님은 원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직도 불통의 관계로 있고, 우리 믿음의 가족들 간에도 불통의 관계가 계속 남아 있습니까? 예수님을 다시 주인으로 영접하십시오.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고 통제하시도록 사람의 생각을 완전 비우시기를 바랍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어도 하나님의 존재가 믿어지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이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믿어지지 않는다면 이제 항복하십시오.

 

내 힘으로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미움의 문제를 극복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위로 영, 치유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만져주시면 그때는 사랑이 회복됩니다. 성령님의 능력이 임하시면 용서할 수 없던 사람도 사랑으로 수용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모든 불통의 삶을 단절하고 유쾌한 삶, 상쾌한 삶, 통쾌한 삶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성령님의 임재는 이웃과의 관계를 열어 주십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이런 고백이 필요합니다.(따라 하십시오)

 

보혜사 성령님, 이 시간 내 안에 주인으로 오십시오. 다스려 주십시오. 변화시켜 주십시오.(아멘)

 

보혜사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가슴을 터치할 수 있도록 심령의 문을 여시기를 바랍니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사모하십시오. 나의 삶 속에서 이웃 간에, 성도 간에 불통한 부분들 성령님의 임하심으로 시원하게 풀리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건강한 교회를 이루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무엇일 것 같습니까? 중직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통이라는 괴물일 것입니다. 각자 생각이 다른 이상 장애물은 거두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성에 길들여진 우리의 가슴은 너무나 작아져 있습니다.

초월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에는 바짝 마른 나뭇가지처럼 메말라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목이 터져라 불러도 오히려 하나님, 제발 내버려 두세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라는 자신의 막강한(?) 능력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안 나타납니다.

 

기독교는 섬김의 종교요 그 섬김의 키 워드가 소통입니다. 소통하지 못하면 잘 섬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자기중심으로만 사는 사람, 그래서 말이 안 통하는 사람과 지내보았습니까? 지옥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 소통하려면 이기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소통을 잘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상대방에 유익을 주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주변의 사람들을 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야 소통이 됩니다.

물이 계속 소통이 되면 썩지 않습니다. 그러나 물이 소통 되지 않고 한 곳에 고여 있으면 썩어버립니다. 마찬가지 원리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공동체는 썩습니다. 한의학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지 않으면 통()이 온다. 우리의 일상생활 원리와 너무 일치하는 말입니다.

 

워낭소리라는 영화(2009,1,15 개봉)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로 경북 봉화에 사는 최 노인과 소의 삶을 조명한 것입니다. 평생 땅을 지키며 살아온 농부 최 노인에겐 40년을 부려온 소 한 마리가 있습니다. 소의 수명은 보통 15년인데 이 소의 나이는 무려 마흔 살입니다. 살아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데 최 노인에게는 최고의 친구이며, 최고의 농기구이고, 유일한 자가용입니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최 노인이지만 희미한 소의 목에 달린 워낭(방울) 소리는 금방 알아듣습니다. 최 노인은 다리가 불편해도 소 먹일 풀을 베기 위해서 매일 산을 오르며 심지어는 소에게 해가 갈까 논에 농약도 아예 치지 않습니다.

소 역시 제대로 서지 못 하면서도 최 노인이 고삐를 잡으면 산 같은 나뭇짐도 마다 않고 나릅니다. 무뚝뚝한 노인과 무덤덤한 소, 둘은 모두가 인정하는 환상의 친구입니다. 소의 눈빛을 보아도, 걸음걸이를 보아도 서로의 상태를 잘 알아차립니다.

노인은 소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소는 주인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어느 해 봄, 최 노인은 수의사로부터 소가 올 해를 넘길 수 없을 것이라는 선고를 듣습니다.

 

최 노인은 죽기 전에 소를 팔아보려고 우시장에 가는데 그때 소가 눈물을 흘립니다. 이미 최 노인의 마음속에도 소를 팔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시장에 가자 그런 늙은 소를 누가 사느냐며 핀잔을 듣고는 소를 끌고 집에 돌아옵니다. 그 후에도 노인과 소는 가장 가까운 친구로 살다가 죽습니다. 소를 땅에다 묻는 노인의 모습은 죽은 자식을 묻는 심정처럼 안타깝습니다.

제가 집에서 편안하게 컴을 통하여 이 영화를 보면서 불통의 세상에서 사람과 짐승 사이에도 사랑이 있으면 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보고 싶은 분은 시간 내어 집에서 보십시오. 제가 보내 드리겠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죄인인 우리와 하나님과 사이에 중보자로 소통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19:30). 우리 모두 소통을 잘 하여 주님의 근심을 들고 교회를 평안하게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