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6년 말씀

재판관의 자리에 앉지 마십시오.(롬 02:01~11)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6. 10. 22.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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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목사의 고백. 목사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 10가지라는 글이 인터넷에 올라 와 있습니다. 내용 전부를 읽고 싶으면 제목으로 검색하시면 됩니다. 새벽기도에 오래도록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한 집사님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그 분의 머릿속에는 새벽기도에 빠진 사람들의 빠진 횟수와 날짜가 정확하게 입력되어 있습니다.

십일조를 정확하게 꼬박꼬박하는 신자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그 분의 머릿속에는 십일조를 빼먹거나 제대로 하지 않는 동료 신자들의 명단이 빼곡히 들어 있습니다. 40일 금식기도를 다녀온 권사님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목사고 집사고 누구든지 안수해서 해결해 주고 싶어 견딜 수 없어 하는 그 능력이 무섭습니다.

 

사람은 이웃을 비판하는 위치를 좋아합니다. 사회적 신분이 낮은 사람일수록, 목에 힘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비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비판이 뭡니까?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밝히거나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비판의 자리에 앉지 말 것을 명하십니다(07:01). 정신 건강과 영적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고, 또 우리가 비판을 할 만큼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도 비판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비판을 하는 사람은 그 비판으로 인해 심판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본문의 출발점이 무엇입니까?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이어지는 말씀은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있다는 말씀입니다(02).

무슨 뜻입니까? 비판 즉 판단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그 판단으로 인해 심판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판단은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 믿음의 가족들은 함부로 재판관의 자리에 앉으려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제목을 재판관의 자리에 앉지 마십시오. 로 정했습니다.

 

 

  1. 김삼일 가족들은 재판관의 자리에 앉지 마십시오.

 

0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우리가 로마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구성을 알아야 합니다. 전체적 구성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01~03장 까지 구성은 알아야 합니다.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01장은 이방인은 죄인이다. 02장은 유대인은 죄인이다. 03장은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먼저 믿은 사람이나 나중 믿은 사람, 이 민족이나 저 민족 할 것 없이 다 죄인이라고 여기십니다. 그러면 0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남을 판단하는 사람, 재판관의 위치에 앉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구체적 표현은 없지만 로마서 02장의 성격상 율법을 받았다고 자랑하면서도 율법을 따라 살지 않는 유대인들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용어 하나 점검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유대인, 유태인, 유다 사람, 히브리인, 이스라엘 사람 등 알듯 모를 듯 좀 애매하게 구분이 잘 안 될 것입니다. 의미상으로 다 똑 같은 말입니다. 원어와 한자어에서 차용해 쓰다 보니 비슷한 이름이 많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판단을 하는 때가 있습니다. 또 끊임없이 판단을 하면서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우리가 이웃에 대한 판단을 전혀 안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분별하는 힘입니다.

이것은 절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것과 하나님 것이 아닌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과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정확히 판단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말씀 중심으로 올바르게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대인관계에서의 판단은 절대 신중해야 합니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유대인을 넘어서 좀 더 넓게 적용을 하면 이 자리에 있는 우리 자신을 지칭하는 말씀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의인인체, 거룩한 체 하며 재판관의 자리를 사모하는 사람 말입니다. 솔직히 우리는 남을 재판하는 것을 얼마나 즐거워합니까?

남의 약점이나 문제점을 찾아서 그것들을 확대 포장을 하고, 거기에 부정적인 감정과 미움의 감정을 양념처럼 잔뜩 뿌려놓고는 서서히 돌을 던집니다. 이리 저리 재단해 가면서 막 씹는 재판관 역할을 즐깁니다. 재판관 역할 해보면 정말 쏠쏠하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은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자를 놓고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08:0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07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를 판단하실 분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분별하고, 내가 판단하지만 나도 하나님 앞에서 재판을 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겸손한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네가 남을 판단하느냐? 너 자신은 어떤 존재냐? 너는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살아가느냐?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조금도 결격 사유가 없느냐? 를 물어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할 죄인임을 깨우쳐 줍니다. 우리도 이웃과 비교하여 조금 더 낫다며, 우월성을 뽐내는 교만의 위치에 앉지 말아야 합니다.

 

 

  2. 김삼일 가족들은 자기의 들보를 보아야 합니다.

 

07:03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들보란 집을 지을 때 중심 되는 두 기둥을 가로질러 걸치는 나무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남의 허물을 들추는 사람을 비유 할 때 네 눈에 들보가 있다. 라고 표현합니다. 티는 작은 것이고 들보는 큰 것 아닙니까?

남을 정죄하여 재판하는 것은 큰 죄에 속한다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면 혹 내 눈 속에 이웃을 집요하게 정죄하여 재판하는 들보가 있는 것은 아닙니까? 유대인들은 사람의 종류를 유대인과 이방인, 딱 이렇게 두 종류로만 나누어서 유대인이 아닌 사람은 지옥의 불쏘시개 감 정도로 여깁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선택 받은 민족으로서, 지옥에 가고 싶어도 못 간다고 여깁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지옥문 입구를 지키고 있다가 자기들이 지옥에 들어가려고 하면 어, 너는 이스라엘 백성 아니냐? 여긴 네가 오는 데가 아니야, 천국으로 가. 하면서 천국문으로 던져 버린답니다. 이런 사고를 가졌으니 타 민족을 향해 배타적 삶을 사는 것입니다


철야기도 시간에 다 기도하지 않고 자는 것을 보고 한 집사가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 장로 집사 할 것 없이 다 자니 참 민망하시지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얘야, 그렇게 깨어서 남의 흉이나 볼 거면 너도 얼른 자거라.

비판을 잘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왜 그처럼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냐고 물어보면 이렇게 답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의 성품이 너무 솔직하기 때문이라고. 소위 믿음이 좋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 중에 더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여러분, 한 번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보다 더 추하고 악질인 사람 보셨습니까? 못 보셨다고요. 그러면 이제부터 자숙하면서 좀 죽어지내십시오. 뭐 잘한 게 있다고 설칩니까? 그리고 죄를 지은 사람이 먼저 나서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라고 선수 치지 마십시오.


죄인은 그저 입 닫고 가만히 있는 것이 좋습니다성도 여러분에게 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과 그를 재판하는 사람 중에 누가 더 큰 죄인입니까? 재판하는 사람이라고요. , 이제부터 재판관의 자리에 앉지 마십시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죄 문제를 다루게 됩니까? 명심할 것은 예수님이 죄에 관하여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알면 됩니다.

 

18: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여러분, 자기 선언을 합시다. 믿음으로 따라 하십시오. 지금까지 남의 눈에 티만 보려 했습니다. 지금까지 내 눈에 들보를 보지 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오늘 내 눈에 들보를 빼겠습니다. 아멘. 이 말씀이 여러분의 가슴에 새겨지기를 축원합니다.

 

 

  3. 재판관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으면 심판을 받습니다.

 

0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 도다.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하나님께서 이웃을 정죄하는 사람에게는 분명 큰 심판이 있음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심판이 임하지 않았습니까? 이는 우리에게 심판을 생략한 것이 아니라 재판관의 자리에서 내려 올 은혜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계속 재판관의 자리를 고수하려 합니까? 고집을 부리면 그때는 죽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순종은 살 길이요, 고집의 마지막은 심판의 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회개하고 재판관의 자리에서 속히 내려오는 것만이 살 길임을 믿으십시오. 더 이상 하나님과 맞서면 그때는 심판을 각오하여야 합니다.

 

06:37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05절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가만 놔두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다운 면모를 보여 줄 때까지 참고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이웃을 정죄하는 재판관의 자리를 박차고 나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참 된 그리스도인은 이웃의 허물을 공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추함을 가슴에 안고 감싸주는 사랑을 실천합니다. 주 예수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뭘 좀 알게 되고, 익숙해지고, 거기에 대해 나름 이력이 쌓이면 그때부터 판단과 정죄의 자리부터 먼저 폅니다. 먼저 믿었다는 사람들, 교회 생활을 3~40년 이상 했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런 현상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는 말씀 적용을 안 시키고 곁에 있는 김집사가 들을 말로 여깁니다.

 

04:1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성경은 우리에게 죄인을 사랑하는 길을 안내해 줍니다 우리가 성경의 말씀을 대할 때 먼저 자신에게 적용시켜야 하며,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해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저 자신의 일만 잘 살피면 됩니다.

이웃의 허물을 놓고 무엇보다 내가 어떤 상태에 놓여있나? 를 냉정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 받았다고 해서 근본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죄의 통로를 알고 난 후에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래 묵은 그리스도인, 더 훌륭해야 할 그리스도인이 신앙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오히려 마음이 굳어지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오래 된 포도주 일수록 숙성되어서 더 맛있고 값이 비쌉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오래 묵은 유대인들, 위선적이고 외식적인 유대인을 통하여 우리의 허물을 치료하는데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당장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어떤 잘못을 보면 자신에게는 매우 관대합니다. 자신이 모임에 조금 늦으면 도로가 복잡해서 좀 늦을 수도 있지 뭐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남이 늦으면 저 사람은 맨날 지각만 한다고.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이탈리아 중부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St. Francis of Assisi,1181-1226)가 1209년에 자기를 따르는 12명의 동료들과 함께 프란시스 형제회를 세웠습니다. 이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공식으로 인정을 받았는데 이 분이 제자들과 함께 40일 금식을 하다가 마지막 하루를 남겨 놓은 39일째 되는 날 젊은 제자 하나가 스프 냄새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한 숟가락을 입에 떠 넣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함께 금식을 하던 제자들은 눈을 부릅뜨고 그 젊은 제자를 노려보았습니다. 그 때 프란시스가 말없이 수저를 들고는 젊은 제자가 먹었던 스프를 천천히 떠먹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경악의 눈길로 스승을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말합니다. 우리가 금식하며 기도를 드리는 것은 모두가 예수님처럼 살자는 것인데, 굶으면서 이렇게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는 실컷 먹고 사랑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우리는 교회생활, 일상생활에서 어떤 관점으로 이웃을 대합니까? 남을 재판할 때는 매우 엄격한 잣대로 이리저리 가혹하게 재다가도 자신을 재판할 때는 마치 온갖 변명할 이유를 다 찾아내어 솜방망이 휘두르듯 아주 너그럽게 합니다.

우리가 교회 와서 예배드린 후 남는 시간을 어떻게 보냅니까? 큰 소리를 치면서 교만한 마음으로 성도들을 보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다가 이웃을 재판하는 일을 만나면 나는 이만하면 괜찮은 사람이야, 그런데 당신은 왜 계속 그렇게 살고 있는가? 하면서 정죄를 합니다.

 

바리새인 무슨 뜻입니까? 분리된 자, 거룩한 자,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께 가장 책망을 많이 받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겉모습은 경건한 체 하였지만 그 내면의 세계는 거짓과 위선 덩어리이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천국문 앞에 서서 들어가는 사람을 막는 일까지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간혹 , 씨가 고집이 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성씨라도 고집 없을까요? 세상에 고집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 씨가 고집 세다고 하는 것은 다 자기 고집을 변명하여 남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의 특징은 남을 비판하고, 남에게 뒤집어씌우기를 잘 합니다. 자기 결점은 잘 못 봅니다. 반면 남의 잘못은 크게 잘 봅니다.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이러하였습니다. 다 자기변명 아닙니까? 예수님은 눅 18장에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각각 소개하시면서 재판관의 자리에 앉지 말 것을 명하십니다.

 

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