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6년 말씀

나는 하나님의 사명자입니다.(창 12:01~04)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6. 11. 5. 20:07
728x90

아브라함에 관한 재미있는 한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만들어 파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브라함은 천지만물을 지으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아버지의 우상장사를 어떻게 해야 그만 둘까를 고민하였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아브라함에게 저 신상들이 상하지 않도록 잘 지키라고 당부하고 출타하였는데 마침 이웃집에서 음식 한 그릇을 가져왔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버지가 안 계신 틈을 타서 우상들이 진열되어 있는 신당에 망치를 들고 들어가 제일 큰 우상 하나만 남기고 다 때려 부수었습니다.

그리고는 제일 큰 우상의 손에 망치를 끈으로 꽁꽁 묶어 놓고 이웃집에서 가지고 온 음식 그릇을 그 앞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외출했다가 돌아온 아버지 데라가 신당에 들어가 보니 신상들이 모두 목이 부러지고 팔, 다리, 허리가 꺾어져 있는 것 아닙니까?

데라는 놀라기도 하고 화가 나서 아브라함을 불러 막 야단을 칩니다. 아브라함은 시치미를 뚝 떼고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이웃집에서 떡을 가져와 그 떡을 신당 앞에 두었더니 신상들이 서로 먹겠다고 소동을 부렸는데, 그 중에 제일 크고 힘센 저 신상이 망치를 들고 다른 신상들을 때려 부수어 떡을 차지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더욱 화가 나서 아브라함에게 이놈아? 사람이 만들어놓은 흙덩이 신상이 어떻게 다른 신상을 때려 부수고 떡을 먹는단 말이야? 라고 다시 호통을 칩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겸손하게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을 합니다. 아버지, 생명 없는 우상이 어떻게 사람의 명을 길게 해주고, 복을 준다고 하면서 속이며 파십니까? 이제 이런 일은 그만 두세요.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깊이 깨닫고 우상을 만들어 파는 직업을 버리고 아브라함을 따라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고 합니다.

아브람을 설교의 편의상 아브라함이라 하겠습니다(17:05절에서 개명이 됨).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부르심을 통해서 우리도 사명자로 부름을 받는 일과, 그에 대한 우리의 순종의 피드백이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가를 살펴보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사명자로 부르십니다.

 

0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아직까지 아브라함은 알려진 인물이 아니고, 믿음 생활도 제대로 출발하지 않은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마음이 있는가를 보시고, 순종의 마음이 있는 자를 불러서 사명을 주십니다. 만일 순종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사명을 주신다면 그 뜻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한 국가의 시조로 부르시면서 특별한 사명감을 부여하시는데, 세 가지의 커다란 약속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선택된 가족이 큰 나라를 이룰 것이라는 것. 가나안 땅이 그들의 소유가 될 것이라는 것. 그들이 모든 백성에게 대하여 복이 되리라는 약속입니다.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말씀을 받아들임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이 말씀을 받은 곳이 어디입니까? 성경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땅 우르에 있을 때라고 밝힙니다(11:31, Calvin). 그런데 04절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떠난 곳이 하란으로 나옵니다.

우르와 하란 두 곳이 상충되지 않습니까? 우르냐 하란이냐에 따라 아브라함의 초기 생활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기 때문에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에 대하여는 전도자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설교를 할 때 메시지를 참조하면 충분한 해석이 될 것 같습니다. 07:02~04절에 의하면 갈대아 우르라고 밝힙니다.

그러면 04절 말씀과 충돌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이 같은 차이에 대하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두 번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먼저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셨고, 이에 아브라함이 순종하여 약속의 땅으로 가는 도중 하란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계속 눌러 있자 다시 부르신 것입니다(07:04).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시제로 보면 이 말은 미래 미완료 형으로, 아직까지는 보이지 않은 미래에 보일 땅을 말합니다. 네 뒤에 누가 남든지 상관하지 말고 너를 위하여 떠나라는 이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떠남과 분리의 또 다른 세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11:0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정든 고향을 떠나 정처도 없이 간다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갈 곳에 대한 사전 답사라도 하면 좋겠지만 아브라함은 전혀 알지 못하는 땅으로 하나님의 말씀만 믿고 나아간 것은 분명 믿음의 모험입니다 자기 혼자만 결단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가족과 함께 결단을 하였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고향과 친척 사회를 떠난다는 것은 그 만큼 위험부담도 큽니다. 안정권과 기득권을 내려놓는 것 특별한 사명자가 아니고서는 여간 순종하기 힘든 일 아닙니까?

 

 

  2. 하나님의 사명자는 특별한 복을 받습니다.

 

0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 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큰 민족이란 단순한 숫자적으로 인구가 많은 것 외에 영적으로 위대한 민족을 가리키는바 곧 이스라엘에 대한 적합한 명칭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그의 적은 수의 친척을 떠나기만 하면(01) 그 보상으로 오히려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증표로서 네게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현재 아브라함은 후손이 없는 무자(無子)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상 그 말씀을 붙들기만 하면 그때는 인간의 모든 불가능이나 제약은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부르신 사명자에게 복을 주신다고 했는데, 그러면 그 복, 특별한 복이 무엇입니까? 너는 복이 될 지라는 말씀입니다. 너는 복이 될 지라. 이 의미는 아브라함이 앞으로 받을 물질적 풍요와, 신령한 영적 차원에서 아브라함이 복의 기준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더 잘 이해되도록 번역한 곳이 전에 사용하던 개역성경인데 거기에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 될 지라 이렇게 나옵니다.

 

복의 근원이라는 단어가 참 좋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의 조상이며 지금 이 시대의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의 믿음의 조상입니다. 아브라함으로 인한 복은 그의 가계(家系)에서 약속된 여자의 후손(03:15)인 메시아가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과 영생의 길이 열리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04:16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우리는 믿음으로 인하여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된 것처럼 우리도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자기에게 이런 선언을 하여야 합니다. 나는 복의 근원이다. 이런 선언은 현실을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의 영적 에너지가 됩니다. 자기 선언을 할 수 있는 분은 옆에 있는 분들에게 이렇게 말해 주십시오.

당신은 참 복도 많습니다. 이 선언을 들은 우리 가운데 혹 하나님, 아닌데요. 내가 무슨 복을 받았습니까? 언제 내게 복을 주셨습니까? 복을 받았다면 내가 이렇게 살겠습니까? 나는 하나님께 받은 복이 하나도 없습니다. 라고 말하겠습니까?

이렇게 반문을 하신다면 아직도 신령한 세계를 알지 못하여 구원에 자리에 들어오지 못한 분입니다. 여러분, 복의 기준을 바꾸어 보십시오. 물질의 기준에 대한 눈높이도 좀 낮추십시오. 물질주의에서 신령한 것으로 바꾸십시오.


그러면 내가 복 있는 사람임을 넉넉히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천국 백성이 된 우리를 복의 근원으로 삼으셨습니다. 믿음의 신령한 눈을 뜨고 자신을 점검하십시오. 아멘으로 화답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 되는 통로 이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오늘 말씀을 듣는 우리가축복의 통로라는 말씀입니다. 축복의 통로 여기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합니다. 내가 복의 시작이 되어야지 나에게서 복이 끝나면 안 됩니다.

 

 

  3.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사명자로 출발하였습니다.

 

0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전적으로 순종을 할 수 있는 근거에 대하여 조금 추적을 해 봅시다. 아담으로부터 시작 된 구원 역사는 그 10대 후손 노아 때에 홍수가 발발하였고, 노아로부터 10대 후손으로 아브라함이 태어났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태어났을 때는 노아도(950) 892세로 생존하고 있었고, 아브라함은 노아의 후손 10대와 함께 살았으며 노아와는 58년을 동시대를 살았습니다. 노아와 아브라함의 겹치는 58년 세월이면 세상에 인구가 그렇게 많이 번성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대의 상당한 기간 동안 주제가 노아 홍수와 바벨탑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노아 홍수와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노아에게 직접 들었다는 성경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각 지역으로 번져 나간 후손들과 같이 살았고, 교류는 충분히 있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여러 사람들을 통하여 상당히 실감 있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노아와 아브라함이 살고 있는 지역 간의 거리가 못갈 만큼 멀지는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혹 궁금증을 풀기 위해 전설적인 인물 노아나 그 아들을 직접 찾아가서 홍수 이야기를 들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라면 친구들과 아무리 힘들어도 찾아 갔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하나님의 사명자로 부르시는 프로그램을 따라 미지의 땅 아직 가 보지도 않은 세계를 향하여 믿음의 출발을 합니다. 아브라함은 과거의 바벨론 다신교의 습성에서 유일신 하나님을 신앙하는 자리로 진입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의 사명자는 소망이 없는 과거의 생활과 소망이 넘치는 현재의 생활을 확실하게 분리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 하나만을 재산으로 삼고 믿음의 순례 길에 나섰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한다고 하면서도 실제 행동으로 잘 옮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롯이 아브라함과 함께 메소포타미아를 떠난 사실이(11:31) 거듭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이름이 안 보입니다. 나홀이 아브라함의 말을 잘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일행이 떠난 후, 많은 시간이 지난 다음 나홀도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우르에서 메소포타미아로 옮겨간 사실이 나옵니다(24:10).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여기에서 우리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버지 데라의 관계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사명자로 부름을 받아 가나안으로 나아가는 여정 속에서 중간 지점인 하란에서(우르에서 960km) 머물게 됩니다. 그런데 그 머무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고 있습니다.


왜 전진하지 않고 계속 머물고 있습니까? 아버지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의 이름 뜻은 지연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름처럼 아브라함이 아버지 때문에 하란에 계속 머물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안 가겠다고 버티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란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에서 임시로 쉬었다 가는 곳이지 영구히 머물 정착지가 전혀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버지가 걸림돌이 되고 있고, 하나님의 프로그램에도 방해가 되었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알아서 걸림이 되는 요소를 제거하셨습니다.

 

07:0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아버지 데라가 죽은 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하란에서 다시 부르고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란을 떠납니다. 물론 많은 가축들과 소유물을 그 먼 거리를(480Km) 이동하여 간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힘들어도 꼭 가야할 길이라면 가야 합니다. 만약 소유물들이 걸림이 되거나 지장이 된다면 그것들을 처분하고서라도 가야 합니다. 그 길만이 행복의 길이요, 살 길이요, 영생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 역시 죄악 된 이 세상에서 분리되어 의와 거룩함을 향하는 순례의 길을 떠나야만 하는 신분입니다. 하나님께서 떠나라 하면 떠나고, 가라 하면 가야하는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억압하고, 부자연스럽게 하고, 속박하기 위하여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생명이 되고 복이 되는 말씀인 만큼 그대로 받고 순종하면 복이 됩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하라 하면 할례를 행하였고, 독자 이삭을 바치라 하면 바친 것처럼, 우리도 말씀대로 살아서 많은 사람에게 간증을 할 수 있는 길을 택하여야 합니다

나는 부모, 친척, 형제, 친구를 신뢰합니까? 나에게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신뢰합니까? 부모님이 물려주는 것을 바랄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챙겨주시는 것을 바랄 것입니까? 지금 이 순간 바로 나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하심은 버리고, 벗어버리라는 말씀이요, 믿음의 사람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나를 복된 세계로 부르심에 믿음으로 아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