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알코올 중독자에게 두 아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형은 깨끗하고 행복하게 살았고, 동생은 그의 아버지와 같이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습니다. 심리학자는 두 형제에게 각각 당신은 어떻게 해서 이런 사람이 되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형과 아우의 대답이 꼭 같았습니다.
모두가 아버지 때문입니다. 같은 아버지를 보며 자랐지만 형은 나는 저렇게 되지 말아야겠다는 긍정적이면서 적극적인 선택으로 행복의 길을 걸었습니다. 반면 동생은 난 아버지의 아들이니 별수 없다. 이런 부정적인 패배의식으로 살았기 때문에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좋은 쪽으로 본을 보이고 본이 되는 것, 이거 대단히 중요합니다.
교회가 성장하려면 좋은 소문이 나도록 믿음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김해삼일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분, 믿음의 본이 되는 좋은 일꾼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저의 말씀이 좀 부담스럽습니까? 시원하게 들리지 않는 것 같네요?
데살로니가교회는 사도 바울이 3주 동안 복음을 전하여 세운 교회이다 보니 오랜 역사와 경륜을 내 세울 수 있는 자랑꺼리가 전혀 없습니다. 평안하게 믿음생활을 할 여건이 갖추어진 교회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바울을 감동시킬 정도로 은혜로운 교회로 성장하여 그리스의 전 지역 마게도냐와 아가야에서 본을 보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의 모습을 통해 믿음의 모델이 되는 것은 생활수준이나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예수님을 얼마나 잘 닮느냐에 따라 결정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김해삼일교회는 데살로니가교회 보다 사랑이 더 넘치고, 형제애도 더 넘치는 교회, 믿음의 본을 보이는 교회로 나아 갈 수 없겠습니까? 다 우리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주의 말씀 우리교회도 믿음의 소문을 냅시다. 에 이어 오늘 말씀은 나도 믿음의 본을 보여 줍시다. 라는 제목으로 강론하겠습니다.
1. 바울은 믿음의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
0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바울로부터 복음을 받기 전에는 우상과 죄악의 세력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선교 팀을 통하여 복음을 받은 후에는 구원의 은혜를 입은 새 생명의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전하는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라는 표현의 순서를 주의 깊게 보십시오. 믿음은 주님을 믿기 전 믿음의 본이 되는 사람으로부터 영향력을 받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말보다 먼저 자신의 생활로 본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전도를 잘 받았을지라도 그 전도자의 삶이 본이 되지 못하면 오히려 실족 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바울 선교 팀이 전해 준 복음과 그 열정적인 믿음의 모습을 본받아서 짧은 기간에 믿음의 소문을 내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언행일치의 삶을 함께 전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또한 바울은 그의 서신을 통해 자신은 본을 보였다고 공개를 합니다.
고전 04:0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01; 빌 03:17).
복음의 본을 보여 줄 수 있는 그 열정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야 합니다. 복음의 열정에 이끌림을 받는 사람이 세상을 영적으로 감동 시킵니다. 바울은 복음의 열정으로 세상을 품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열정 그것은 한 마디로 표현하면 예수쟁이입니다. 복음에 대한 열정, 교회를 위한 열정, 예수님처럼 살고자 하는 열정, 바로 예수쟁이로 사는 사람은 믿음의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누구를 복음의 모델로 삼았을 것 같습니까? 전도자 스데반입니다. 바울이 변화되기 전 사울의 이름으로 어떤 일을 하였는지 아시지요? 대제사장으로부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고, 죽이는 일을 위임받은 사람입니다.
행 09:0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02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예루살렘교회 집사요 전도자인 스데반을 돌로 처형하는 순교의 현장에도 사울이 있었습니다(행 07:58). 그때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하는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성령님의 감동과 은혜가 충만하였고, 얼굴은 천사의 모습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데반이 이렇게 외칩니다(행 06:15).
행 07:59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 변화가 된 후부터 그의 가슴에는 스데반의 순교의 현장이 그의 마음에 깊게 울려 왔을 것입니다. 이때부터 믿으려면 스데반처럼 믿어야 하고, 복음을 전해도 스데반처럼 순교의 정신으로 본을 보이면서 전하겠다는 기준을 세웠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 짧은 기간이지만 바울의 이런 열정적인 가르침과 보여주는 삶에서 강한 영향력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역을 하는가 보다 그 사역을 감당하는 정신이 중요합니다.
2.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도 본을 보였습니다. |
0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라는 접속사를 보십시오. 어느 부분을 연결하는 부분입니까? 바로 06절입니다. 바울 선교 팀이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본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이제는 그들도 그리스(헬라) 전역에 있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믿음의 본이 되었습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이 어떤 곳입니까? B. C. 146년 이후 그리스는 2개 주로 나누어 북부를 마게도냐, 남부를 아가야로 불렀습니다. 마게도냐의 수도는 데살로니가이고, 아가야의 수도는 고린도인데 특별히 마게도냐의 수도 데살로니가는 남유럽의 상업 중심 도시입니다. 이런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 믿음이 급속히 그리스 전 지역에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을 때 생명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자기들에게 복음을 전해 준 바울의 모습을 닮기 위해 믿음의 몸부림을 쳤습니다. 바울의 메시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니 그 말씀이 본이 되었고, 그 본이 되는 말씀이 자기들을 전도자의 삶으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 복음을 처음 접할 때 얼마나 많은 시련과 고난을 당하였습니까? 그럼에도 믿음으로 감당하고 받아들이니 그 말씀 속에서 능력이 나타나고, 삶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른 교회들에게 믿음의 본이 되는 정도로 성숙하였습니다.
0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순종의 행위로서, 기쁨으로 감당하면 믿음의 열매가 나타날 것입니다. 반면 사람으로부터 영광을 받으려 하면 그때부터 외식이 됩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 예수님을 믿음으로 핍박이 왔고, 지역에서 쫓겨날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을 만났습니다. 당장은 야손과 그 형제들이 위기를 만났습니다. 유대인들이 불량배를 동원하여 고소를 함으로 고난을 당한 후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보석금을 내고 석방을 받게 됩니다(행 17:05~09). 이런 일을 당하면서 까지 바울 선교 팀을 보호하였고, 자신들도 끝까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던 담대함의 근원이 어디입니까?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이론이 아니라 성령님을 통한 능력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처럼 우리도 성령님이 주시는 은혜를 가슴 속에 담아야 합니다. 아가서 01:08절을 보면 갈 길을 알지 못할 때는 앞서 간 양떼의 발자취를 보고 따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넓게 적용을 하면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간 사도들과, 앞서 간 믿음의 선진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라는 의미로 받을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이런 믿음의 행적들, 얼마나 아름다우며 본이 되는 일입니까? 그래서 좋은 성도, 믿음의 본이 되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좋은 모델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은 누구를 모델로 삼고 있습니까? 누구를 자신의 롤 모델로 삼아 그를 닮고 따르려는 가에 따라 자신의 믿음의 모습이 정립이 됩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 롤 모델이 된 바울의 열정을 가슴에 품고 사는 가운데 어느덧 자신들도 마게도냐와 아가야 전 지역의 믿음의 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복음의 열정을 품은 사람은 세상도 감당하지 못합니다(히 11:38). 왜냐하면 나팔처럼, 천둥처럼 울려 퍼지기 때문입니다.
3. 믿음의 본이 되면 우상생활부터 정리합니다. |
09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 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지와.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마 06:33). 그럼에도 하나님 중심의 생활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믿음생활의 우선순위가 바뀔 때,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물질과 향락들이 밀고 들어옵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과거에 하나님을 모르고 섬겼던 지역의 우상의 요소들을 내어 버릴 수 있었습니다. 돌아보니 생명이 없는 거짓된 우상들, 헛된 일들 정말 많이 하였는데, 생명의 주님을 만난 이후부터는 변화 된 삶, 경건한 믿음의 삶, 하나님 중심의 삶을 통하여 우상을 미련없이 제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 헬라의 다신교에 젖어 있던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우상 숭배를 과감히 청산하고 하나님께 돌아왔다는 말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기 전 섬기던 우상을 떠나면 큰 재앙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우상이 죽은 것이고, 거짓된 것으로 깨달아지는 순간 헛된 일을 버리고 담대하게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진리의 복음과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만나면 그때부터 그 속에 자리 잡고 있던 우상들이 더 이상 있을 곳이 없어 밀려나갑니다. 인간의 마음은, 복음과 우상을 동시에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빛과 어둠이 함께 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이 들어오면 더 이상 우상이 머무를 수 없습니다.
중세기 때 세상의 모든 실권을 교황이 장악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로마 교황 중에 노켄티어스(1243~1254)라는 금은보화를 좋아하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 교황이 금과 은으로 된 여러 식기들을 감상 하면서 당시 유명한 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제 금과 은은 내게 없으나 하고 말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생각지 않소? 그러자 아퀴나스가 대답하기를 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 하고 말할 수 있는 시대도 지났습니다.
이 대화는 사도행전 03장에 나오는 베드로가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하였던 말을 인용한 대화였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한 말은 황금을 좋아하는 교황에게 충고한 말입니다. 물질에 대한 탐욕이 오면 기적도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돈을 위해서라면 하지 말아야 할 일도 서슴없이 하고, 꼭 해야 할 일도 눈감아 버리기 일쑤입니다. 이제는 불신자들도 성도들을 향하여 구별되고 거룩한 삶 보다는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말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냐? 물질이냐? 라는 물음 앞에 선택을 해야 합니다.
믿고 하나님께 돌아왔으면, 신앙인답게 살아야 하고, 물욕의 자리에 말씀으로 하나님으로 채워야 합니다. 차차, 천천히 이런 식으로 망설이면 물욕의 우상에서 헤어 날 수 없습니다. 물욕을 비우고, 우상을 내 쫓는 일에 혹 환난과 고난이 따르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주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또 믿는 자의 본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물욕과 우상의 길은 결국은 파멸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잠 23:04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 지어다 05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어떤 교회의 주보에 실린 글을 소개합니다.
1. 집안일이나 회사 일로 시간이 없고 너무 바쁘면 교회에 나오지 마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이 기억하고 드리는 정성스런 시간을 원하시지 쓰고 남은 자투리 시간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2. 이런 일 저런 일로 쓰다 보니 물질이 없으면 헌금하지 마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첫 열매와 정성을 원하시지 쓰다 남은 물질을 받으시는 거지가 아니십니다.
3. 집안일과 회사 일로 찌들고 힘들면 교회 봉사하지 마시오. 하나님은 귀찮은 마음으로 억지로 하는 봉사를 받을 만큼 구차하지 않으십니다.
4. 직분을 받고 그 직분을 잘 감당치 못하려면 그 직분을 포기하시오. 하나님은 직분의 종류를 보시는 분이 아니고 그 직분을 얼마만큼 성실하게 잘 감당하는 지를 보시며, 맡은 자에게는 반드시 책임을 물으십니다.
이 글을 우리 모두에게 적용을 한다면 나는 어떤 성도인 것 같습니까? 무늬만 성도입니까? 아니면 행동으로 믿음의 본을 보이는 성도입니까? 지금 우리는 누구를 본받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바울과 같이 우리도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같이 너희도 나를 본받으라.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정에서, 자녀들 앞에서, 공동체의 모임에서 말입니다. 김해삼일교회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본받는 그 삶을 살고 있다면 이제부터 다른 사람에게도 본이 되는 생활로 믿음생활 잘 하기를 축원합니다.
살후 03:09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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