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을 설교하는데 있어서는 각 편마다 저자가 어떤 상황에서 기록을 하였느냐? 라는 시대적인 배경을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배경에 따라 해석이나 전달되는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138편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옮겨놓은 후에 지은 시인 것 같습니다. 법궤(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겼다는 것은 마침내 예루살렘이 가나안에서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사실을 만방에 선포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윗왕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 언제인 것 같습니까? 골리앗을 무너뜨린 날입니까? 아니면 헤브론에서 왕으로 등극한 날입니까? 아니면 남북으로 나누어져 있는 가운데서 아브넬 장군이 북 왕국을 다윗에게 같다 바친 날입니까?
바로 법궤를 70년간이나 블레셋에 방치해 놓았다가 옮겨오는 과정에서 임시로 오벧에돔의 집에 3개월 정도 머물게 하다가 예루살렘으로 옮겨 온 날입니다. 이 날 만큼은 다윗이 너무 기뻐서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습니다(삼하 06:14).
명실공이 수도 이전을 하였고, 법궤까지도 예루살렘으로 모셔왔지만 그래도 다윗왕의 마음이 결코 편안한 것은 아닙니다. 아직은 절대적인 왕권이 확립되지 않았고, 예루살렘 밖의 사마리아나, 헤브론 등의 지방 토호들이 계속 반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정세가 불안정한 환난 가운데서도 감사합니다. 하면서 계속 감사를 고백합니다. 바로 이런 감사의 마음을 2016년 전반기를 결산하는 맥추감사주일의 메시지로 전하겠습니다.
1. 다윗은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합니다. |
01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 하리이다.
지금 다윗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지만 세상적인 환경으로는 기쁨으로 감사를 드릴만한 좋은 환경 가운데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은 환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전심으로 감사와 찬송을 올리겠다는 고백은 환경은 어렵지만 앞으로 은혜 베풀어 주실 줄 믿고 계속 감사의 생활을 하겠습니다. 는 결단입니다.
요즘시대에 잃어버린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감사입니다. 먼저 가까운 곳 자식들부터 볼까요? 금수저 안 물려줬다고 부모님께 감사 잘 안합니다. 학생들, 선생님께 감사 잘 안 합니다. 노동자들, 고용주 때문에 잘 먹고 살면서도 감사 잘 안 합니다. 국민들, 정부에 감사 잘 안 합니다.
감사보다는 불평, 원망, 비난만 계속 쏟아 놓는데 어쩌면 여의도에 있는 그케의원들 불평에 오염된 탓일 수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도 이런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단적이기는 하지만 불평이 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또 맞는 현실이라고 해도 꼭 틀린 말은 아닙니다.
감사가 없는 생활이라면 억만장자인들 행복하겠습니까? 마음은 지옥 속에 갇혀 있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맥추감사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2016년 전반기를 하나님의 은혜로 결산을 하는 때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믿음의 가족들 은혜와 감사를 회복하는 날로 삼기를 축원합니다.
다윗의 삶의 스타일을 보십시오. 고난이나 환난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었고 이 감사가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는 비결이었습니다. 현재 세계적으로 고난이나 환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 김삼일 가족들과 비교해 보셔서 내가 불행한 사람인지 아니면 감사하는 사람인지 점검해 보십시오.
지금 당신의 집에 전기가 들어온다면, 세상에 전기의 혜택 없이 사는 20억 이상의 사람들보다 감사할 이유가 충분히 됩니다. 집에 식수 시설이 되어 있다면, 그렇지 못해 아무 물이나 마시는 10억이 넘는 사람들보다 충분히 감사할 이유가 됩니다.
하루 천 원 이상으로 생활을 한다면, 천 원 미만으로 살고 있는 12억 명의 사람들보다 감사할 이유가 충분히 됩니다. 하루 한 끼라도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면, 영양실조로 고통 받는 8억 명의 사람들보다 감사할 이유가 충분히 됩니다.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 내 몸이 건강하다면, 당신은 이번 주를 넘기지 못할 100만 명의 환자들보다 감사할 이유가 충분히 됩니다.
한 번도 전쟁의 위험이나, 수용소의 외로움, 고문의 고통, 굶주림의 쓰라림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전쟁과 기아상태에 있는 5억 명의 사람들보다 감사할 이유가 충분히 됩니다. 체포, 협박, 학대, 고문, 그리고 죽음의 두려움 없이 교회에 나갈 수 있다면, 당신은 이 세상 30억의 사람들보다 감사할 이유가 충분히 됩니다.
만일 당신의 냉장고에 음식이 있고, 당신의 몸에 맞는 옷이 있고, 잠을 잘 수 있는 집이 있다면, 이 세상 사람들 75%보다 더 감사할 이유가 충분히 됩니다. 당신이 은행에 그리고 지갑에 약간의 돈이 들어 있다면, 이 세상의 8% 안에 들기 때문에 감사할 이유가 있는 충분히 됩니다. 부모님이 아직 살아 있고, 지금 혼자가 아니라면, 보기 드물게 감사할 이유가 충분히 됩니다. 당신이 글을 읽을 줄 안다면 이 세상의 문맹자 20억의 사람들보다 감사할 이유가 충분히 됩니다.
2. 다윗은 환난 중에서도 성전예배 드릴 것을 다짐합니다. |
02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다윗의 믿음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일 것 같습니까? 성전을 사랑하며 성전에 거하는 성전중심의 생활입니다. 평생에 성전 짓는 것을 원하여 모든 물품을 준비하였고, 이제 착공을 위하여 하나님의 허락만 떨어지면 되는 상황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은 전쟁에서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 때문에 평화의 상징인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 적합하지 않다고 통보하셨습니다.
대상 22:08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그러자 다윗이 어떤 반응을 합니까? 즉각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앉아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삼하 07:18~20). 다윗의 인생에서 최우선이 성전중심의 예배생활이었습니다.
왕의 위치에서 낮에는 국사를 돌보느라 시간이 여의치 않지만, 밤 시간 작은 틈이라도 나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경배를 드리는 생활, 기도드리는 생활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여겼습니다. 이때 다윗이 드린 예배는 오늘날 예배의 형식과는 다른 형태입니다. 다윗 때의 성전은 일반적인 건물을 가진 형태가 아닌 성막이었으며, 그 곳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실제 오늘날처럼의 예배의 형태를 갖춘 성전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때에 가서 건축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여기 성전이라고 하는 개념은 훗날에 지어질 성전을 영적으로 내다보고 성전, 여호와의 전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하는 장소이기 때문에 외적인 부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부분은 성전에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 하셔야 합니다.
다윗은 어떤 상황을 만나도 하나님의 전에 나아가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였으며, 찬양을 통하여 경배를 올렸습니다. 예배의 생활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말입니다. 때로는 성전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기도로 성전에 나아갔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일상생활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예배에 얼마나 열심을 내며, 또 예배에 얼마나 목숨을 겁니까?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작은 일이 생겨도, 혹은 마음 상하는 일만 일어나도 먼저 예배드리는 일부터 중단하고 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판에 예배는 무슨 예배야? 당신 같으면 이런 처지에 찬양할 기분 나겠어? 라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작은 시험만 와도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 찬양의 자리에서 후퇴합니다. 영적 마이너스 자리로 이동을 합니다.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잘못은 상대방이 했는데 왜 내가 시험에 드는 것입니까? 왜 내가 영적 손해를 보아야만 합니까?
다윗은 환경이 막히고, 정치가 막히고, 외교가 막히고, 영적으로 답답함을 느낄 때는 어김없이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상대로 기도하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참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세상에 교회도 많고 예배도 많지만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 영으로 예배드리는 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참된 예배를 드리는 자가 얼마나 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만은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요 0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3. 다윗은 환난 중에서도 살려주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
07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 하시리이다.
다윗은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나를 세우신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나를 살려주실 것이다. 라고 믿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이 살아 있으면 어떤 환경에 놓여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살려 주실 줄 믿었습니다. 다윗은 지금 이 순간은 많은 주변 국가들이, 열왕들이, 지방 토호들이 날뛰고 있어도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는 한 안전한 구원의 자리에 이르게 될 줄 믿었습니다.
구약시대 야곱의 열한 번 째 아들 요셉을 보십시오. 형들의 시기로 하루아침에 노예 신세로 전락하여 애굽에 팔려갔습니다. 그때 요셉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과 원망을 하였습니까? 아니면 이런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 하며 기도와 감사로 밀고 나아갔습니까?
성경은 이에 대해 침묵을 합니다. 다만 13년 동안의 요셉의 일정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결과를 만들어 주실 줄 믿고 감사의 생활로 나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다니엘을 보십시오.
총리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을 하였지만 경쟁자들의 시기로 인해 절체절명의 위기를 만납니다. 올무에 걸려 사자 굴에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다니엘은 지금은 환난이지만 하나님께서 자기를 분명히 붙들어 주실 줄 믿고 기도의 방으로 올라갔습니다. 마침내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사자 굴에서 안전하게 나온 것입니다(단 06:10).
롬 0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옛날 채석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에 김씨 성을 가진 한 믿음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점심시간이 되면 일꾼들은 각자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꺼내서 먹습니다. 사람들은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밥을 먹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김씨는 하나님 앞에 정성껏 기도를 하는데 그 시간이 3분이되기도 하고 5분이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마누라가 그렇게 고맙더냐? 김밥 한 줄이 그렇게 좋으냐? 별의별 소리를 하면서 놀리지만 김씨는 하나님께 진지하게 감사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또 웃고 난리입니다. 김씨 빨리 눈 떠봐. 자네 하나님이 김밥 들고 도망을 가네. 보니까 개가 와서 김밥을 물고 도망을 가는 겁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고 김밥을 물고 도망을 가는 개를 한참 따라가는데 뒤에서 와르르~ 소리가 들립니다. 그 언덕위에 쌓여있는 돌무더기가 굴러 떨어지면서 그 밑에서 밥을 먹던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난리가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개를 보내서 김씨를 그 돌무더기에서 구원하여 내신 것입니다. 이후부터 사람들은 김씨의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시네. 하면서 감히 비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람의 뇌는 약 140억 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입술의 언어가 불평적인 생활을 계속 하면 우리의 모든 세포들 가운데 특별히 뇌세포가 불평에 익숙한 세포로 바뀌어 진다고 합니다. 불평 체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건이 터지면 뇌가 기가 막히게 불평거리를 찾아내는 비판의 세포로 바뀌어 집니다. 반면 우리의 생각과 언어가 하루하루 감사로 쌓여져 가면 뇌세포가 감사의 세포로 바뀌어 집니다. 성도 여러분, 감사할 조건이나 환경이 특별히 있는 게 아니라 감사를 잘 하는 사람만이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이 받는 복은 세 가지의 형태가 있습니다. 첫째는 땅의 것은 받지만 하늘의 것을 받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믿음 없이 살아도 땅에서 잘 됩니다. 둘째는 하늘의 복은 받았지만 땅의 복은 누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을 함께 받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위의 물질의 복을 감사와 기도로 밀고 나가서 잘 받아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어떤 사람이 인간의 행복을 논하면서 그대의 마음속에 감사하는 생각이 없으면, 그대는 파멸의 노를 젓고 있는 사람이다. 부디 다른 공부보다 먼저 감사하는 공부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감사는 우리의 삶을 윤택하고 행복하게 하는 요소입니다.
감사는 꽃씨와 같습니다. 감사할 때마다 꽃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 곁에는 꽃밭이 생겨나고, 향기가 가득해지고, 더 많은 감사의 열매가 맺혀집니다. 반면 불평은 쓰레기입니다. 불평의 언어가 쌓여지면 더러운 쓰레기가 내 곁에 쌓이는 것과 같습니다.
감사의 절기를 통하여 우리가 잊어버린 단어 감사를 회복해야겠습니다. 환난을 만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감사하기로 작정하십시오.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에 불만을 잠재우고 감사를 깨우십시오. 여러분의 입술에 불평을 멈추고 감사를 고백하십시오. 감사를 많이 하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건강하고 행복합니다. 감사지수가 높을수록, 건강지수와 행복지수도 높아집니다.
골 02:0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0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은혜의 강단 > 2016년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 예수님을 미쳤다고 소문냅니까?(막 03:20~35) (0) | 2016.07.16 |
---|---|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여기에 있습니다.대하 07:11~16) (0) | 2016.07.09 |
사랑의 섬김은 선교입니다.요삼 01:03~08) (0) | 2016.06.25 |
심령이 건강한 성도가 받는 복(요삼 01:01~02 (0) | 2016.06.18 |
나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립니까?(눅 12:35~44) (0) | 2016.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