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노후 준비 어떻게 하십니까? 노후 준비는 다 되어 있습니까? 젊은 분들은 미래의 일로 들리겠지만 인생의 황혼기에 있는 분에게는 좀 실감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한 치 앞도 제대로 내다보지 못하기 때문에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믿음의 준비,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나는 주님을 믿기 때문에 절대로 아프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항상 나를 지켜 주시니 사고가 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건강보험, 자동차보험, 생명보험, 실손 의료보험 등에 많이 가입하는데 이런 것들이 우리의 육신의 미래를 준비하는 것들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준비가 있습니다. 영적인 분야의 믿음의 준비, 주님 앞에 설 준비, 주님 맞을 준비입니다. 우리는 한 치 앞길도 내다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지체 없이 가야 할 존재입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여러분, 주님 앞에 설 준비, 주님 만날 준비를 잘 하였는지 우리의 모습을 잘 점검하여야 합니다. 막연히 나는 교회에 다니니 구원 받았겠지? 라고 생각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여 살아가는 지를 돌아보자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청지기 비유가 많이 나옵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신임을 특별히 얻은 사람으로서 주인의 가정과 재산, 종들을 관리하는 자입니다. 주인은 재산이나 집안 대소사를 청지기에게 맡겨서 대신 처리하게 하는데 이때 청지기가 잘 살펴야 할 것은 주인의 뜻입니다.
주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 자신에게 어떤 직무가 맡겨져 있는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신실한 청지기가 되자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인정하시는 청지기, 칭찬받는 청지기가 되자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립니까?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강론하겠습니다.
1. 나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립니까? |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6절 내용은 간단하지만 그 속에는 많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줄거리는 한 부잣집 사람이 혼인집에 초대를 받았다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그 초대가 친구의 아들의 혼인인지, 그저 동네 사람의 혼인 잔치인지, 어떤 친척의 혼인 잔치인지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습니다.
한국인의 결혼식은 주로 낮에 거행하지만,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 결혼식은 거의 밤중에 거행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낮에는 날씨가 너무 더워서 오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혼식 후의 잔치도 한 밤중에 벌리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물론 신부 집이 가까운 곳이라면 저녁 무렵에 도착하여 잔치가 일찍 시작되지만, 신부 집이 아주 먼 곳이면 자정 무렵이 되어서 결혼식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흥겨운 잔치를 통해 정다운 친구도 만나고, 친척도 만나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경을 넘어 삼경(12~3시)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례를 따라 결혼식 하객들이 잔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은 새벽 2시를 지나는 것은 보통이고, 잔치의 여흥에 따라 시간이 더 길어 질수도 있습니다. 이런 풍습을 잘 알고 있는 주인이기 때문에 잔치 집에 가기 전에 종들에게 36절 말씀을 일러줍니다.
내가 돌아올 때 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문을 두드리면 즉각 문을 열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말입니다. 이 명령을 받은 종은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잠자리에 들 수 없습니다. 주인이 돌아오면 문을 즉각 열어드려야 할 사명자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같으면 통신기기가 발달하여 휴대폰으로 나 왔다. 문 열어라 하면 되겠지만 당시는 이런 문명 매체가 없으니 주인이 올 때 까지 그냥 조마조마하게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36절은 주님께서 일반적인 결혼식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35절과 36절의 마지막 부분을 잘 보십시오.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36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5,36절의 연결점을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곧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분명한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 것 같습니까? 이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40절에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본문 시작 말씀과 40절이 잘 연결됩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이 바로 주님께서 언제 올지 모르니 준비하고 기다리는 나의 모습에 해당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을 우리의 주변이나 좀 더 넓혀 국외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연관시켜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오실 때가 가까웠다 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재림의 때를 정확히 아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주님을 맞이하느냐 입니다.
잘 준비한 사람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천국잔치에 참여할 것이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버림을 당하고 영원한 멸망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천국의 생활과 연결되는 줄 아십니까? 그렇게 알고 생활하십니까? 예수님의 비유는 주인의 뜻은 종은 반드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또 주인은 종에게 언제 올지 그 시간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종은 주인이 올 때까지 깨어 있어야 하듯이, 바로 내가 주님을 기다리는 자로서 살아가느냐? 입니다. 나는 주님을 기다리는 자 입니까?
2. 나는 복된 자의 모습으로 주님을 기다립니까? |
43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선생님, 이 비유의 말씀을 우리에게 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겁니까? 반면 평행 본문인 마 24:44,45절에는 베드로의 이런 질문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직접적인 답 대신 또 다른 비유를 들으면서 간접적인 답을 하십니다(42).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라는 것입니다. 본서의 저자 누가는 베드로의 질문을 통해서 이 말씀을 읽는 모든 자들, 바로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는 복 된 자가 되게 함에 있습니다.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37,38절에서와 같이 43절에서도 복을 선언하십니다. 일반적으로 주인이 결혼식에 갔다 좀 늦게 올지라도 종이 깨어 있다 문을 열어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종을 주인이 극진히 대접합니다(37).
대단한 특혜입니다. 정당한 대가로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은총에 의한 대접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깨어있는 성도들 역시 이런 대접을 받을 것입니다. 죄로 인해 영벌(永罰)에 들어가야 할 우리가 예수님의 속량을 받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고, 재림 때에 함께 왕 노릇 하게 되는 것(계 20:04) 역시 은혜의 특혜 아닙니까?
주님은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다고(요 09:04)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복을 받는 일이며, 어떻게 하여야 복 된 자의 자리에 이를 수 있습니까? 예, 우리의 영적 일, 영적 싸움은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야 하며(고전 09:26), 분명한 목표가 있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여야 합니다.
여러분, 종이나 청지기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나를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종은 기본자세가 깨어 있어야 하고, 주인이 필요해서 부를 때 항상 대기되어 있어야 하고, 주인이 문을 두드리는 순간 지체 없이 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종의 모든 일이 주인에게 집중되어 있어야 하듯이, 지혜로운 성도일수록 주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을 기다리는 내 모습이 진정 복 된 자입니까?
오늘 말씀을 듣는 여러분,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는 말씀에 집중을 하십시오. 다시 오실 주님을 만날 기대감으로 믿음생활을 하십니까? 주님의 재림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의심은 안 하겠는데 별로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까?
세상 일로 너무 분주해서 재림하실 예수님을 맞을 준비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습니까? 아니면 나는 당일치기에 강하니 마지막 그때 가서 적당히 준비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전에는 조금 준비했는데 지금은 안식년을 하고 있습니까?
김삼일 가족 여러분, 나의 믿음으로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준비를 안 해도 혹 당장은 별 문제 없이 지나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선택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결과에 대한 책임은 자기가 져야 합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쉽지는 않으나 영광의 주님을 바라보며 고통을 참아야 합니다.
믿음의 길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35절 말씀을 다시 봅시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현재명령형으로서 계속적인 동작을 요구합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켠 채로 계속해서 서서 주인의 오심을 기다리드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그때에, 심판대 앞에 설 때에 혹 이런 말을 할 것은 아닙니까?
계 06:16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3. 주님을 기다리는 자가 받을 복이 있습니다. |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결혼식을 마치고 돌아온 주인을 맞이하는 종, 잠들지 않고 깨어 있는 종이야말로 분명 복이 있습니다(37). 그러면 깨어있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믿음의 등불이 항상 켜져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날짜로는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맞으려고 믿음의 준비를 다 한 상태가 깨어있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그 날과 그 때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마 24:36). 영적 감각이 어두워져 있는 이상 어느 누구도 재림의 날짜를 알 수 없습니다. 믿음의 잠을 자는 이상 주님의 재림은 사람으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때가 될 것입니다(40).
그 날이 오늘 밤이 될 수도 있고, 내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기도하는 중에, 예배드리는 중에, 봉사하는 중에 주님께서 오실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사람의 관점에서는 많은 시간이 흘러서 이제는 재림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영적 감각이 없는 사람은 주님의 재림과 전혀 상관이 없이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재림에 대한 메시지를 들어도 귓가로 흘러버리고, 요즘 세상에 종말이 뭐냐? 재림이 뭐냐고 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라도 주님께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면 좀 시원할 것 같습니다.
벧전 03:0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성도 여러분,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내가 균형 잡힌 믿음을 잘 유지하고 있느냐? 입니다. 제대로 준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내가 만일 믿음의 잠을 잔다면, 그래서 내 믿음이 형편없이 다운 된다면 마귀는 이렇게 조롱을 할 것입니다. 너는 형편없는 존재야. 네 모습은 믿음과 상관이 없는 거야라고 비웃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만일 이런 패배주의적인 삶을 살고 있다면 믿음의 자리, 깨어 있는 믿음의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성령님의 능력과 말씀의 충만한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런 모습이 깨어 있는 모습, 깨어 있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사랑하며 적당히 믿는 사람들, 주님을 위하여 아무런 투자도 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때 가서 나는 너희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부인을 하실 때 통곡을 하게 될 것입니다.
마 07: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오늘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믿음의 출발을 위해서 우리도 영적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풍속에서 주인이 종에게 시중을 드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37절을 보면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수종을 들어 줍니다.
그리고 44절에서는 주인이 그 모든 소유까지도 맡겨주십니다. 이런 말씀들을 영적으로 적용하면 마지막 때에 우리 믿음의 사람, 신실한 사람에게 그렇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주님께서 우리를 영접해 주실 것을 예표 함입니다.
계 0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40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의 결론 40절에 특별한 단어 하나가 나옵니다. 인자(人子)입니다. 사람의 아들(son of men)이라는 뜻으로서 좀 이상한 단어입니다. 남자는 모두 사람의 아들이고, 여자는 모두 사람의 딸 아닙니까? 사람은 누구나 부모의 자식입니다. 그럼에도 누가가 인자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일반적인 이야기를 말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인자라는 개념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인자는 묵시문학의 용어로서 마지막 세상 심판을 감당할 어떤 이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그러니까 인자는 단순히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 보다는 심판자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인자가 온다는 것은 곧 세상이 심판받을 때가 온다는 그런 뜻입니다.
김해삼일교회 성도 여러분, 인자가 온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자체가 바로 준비이고, 깨어 있는 증거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정해진 죽음이 달려오듯이 예수님도 분명히 오십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의 심령에 신령한 불이 붙게 하십시오. 꺼지지 아니하는 불, 믿음의 불, 성령님의 불, 은혜의 불을 넘치도록 공급 받기를 원합니다. 이제부터 진리의 등불을 밝혀 들고 허리에 띠를 띠고, 나를 데리러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서 있는 자세, 깨어있는 복된 청지기의 생활을 잘 감당하기를 축원합니다.
히 10: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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